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와의 대화- 이신칭의 리뷰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코람데오닷컴 연구위원회는 종교개혁의 귀중한 유산들에 대해서 연구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종교개혁 분야의 세계적 학자라 할 수 있는 알리스터 맥그라스 교수(Alister McGrath/ 옥스퍼드 대학교 역사 신학)의 다음의 저서들을 리뷰하며 한국적 상황에서 평가해 보고자 한다. - 편집장 주

1.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이신칭의: 하나님의 택하신 구원의 방법 - 홍성철 목사

2.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 유승주 목사

3. 기독교의 미래 - 방석진 목사

4.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 김대진 목사

5. 종교개혁 사상 - 이세령 목사

 

▲ 홍성철 목사 (코닷연구위원, 대전주는교회 담임)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의 뒤를 잇는 개신교 복음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 1953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태생으로 학생시절에는 수학, 물리, 화학 등 과학을 공부했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복음주의 세계최고의 조직신학, 교회사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칭의론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세계 신학계에 여러가지로 기준점을 제시해주는 신학자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쓴 하나님의 칭의론에서도 볼수있듯 맥그라스처럼 어마어마한 원전들을 참고로 해서 교회사적으로 조직신학적으로 칭의론을 연구한 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각 교파별로, 인물별로, 시기별로, 가장 광범위한 원전들을 참고로 해서 객관적인 설명위주로 2,000년 교회사의 칭의론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칭의론을 보면, 그의 뛰어나고 방대한 신학적인 지식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지금까지 2,000년 교회사 속에서 칭의론에 대해 출간된 책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교과서역할을 감당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서문에서 알리스터 맥그라스에 따르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자 개혁과 갱신운동의 기반이었다. 따라서 이신칭의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소개한 혁신적 교리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바울과 루터와 같은 인물들에 의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재발견이었다.

1 부 이신칭의 성경적 역사적 배경

1장 성경적 배경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이신칭의를 위해 구약 창세기 156절을 인용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은혜를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였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믿고 그에 맞게 행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쓴 이신칭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적 이해와 동의가 있지만, 신뢰관계, 곧 인격적 관계가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신약에서 이신칭의 교리를 언급하면서 바울서신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다는 것과 야고보가 강조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비교하면서 이신칭의와 이행칭의를 대비하는지 질문한다. 그러나 바울과 야고보는 같은 말을 다른 상황에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서신에서는 유대주의자들(Judaizers)이 주장한 복음+할례준수가 구원이라는 등식을 반대하여 믿음을 강조하나 곧 참 믿음은 행동이 수반되는 것으로 바울 서신 자체에서 말한다. 그런데 야고보는 참 믿음은 행위를 동반하고 순종을 야기한다. 곧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는 1. 이신칭의의 참 믿음은 선행이 동반된다. 2. 이신칭의 참 믿음은 윤리를 새롭게 조명한다. 따라서 신분에 합당하게 윤리적으로 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2장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칭의

어거스틴은 인간은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타락한 인간성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로 인간 선행이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인간은 자주 죄를 범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인간 힘으로 이루지 못하는 변화를 이루신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칭의의 기반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칭의와 영원한 생명을 요구할 권한이 없다. 어거스틴의 복음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는데 매우 열정적이시다. 반면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인간이 세운 공적을 근거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인간 선행은 전적으로 자율적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부과하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결과다.

3장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여러 면에서 바울서신의 재발견, 특히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 교리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이 칭의에 던진 통찰은 오직 믿음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믿음을 통한 칭의라는 표어가 훨씬 잘 요약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에 칭의는 우리가 하는 어떤 일에 근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한다. 칼빈은 칭의 문제에 있어서 수동적이고 하나님은 능동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게 하는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역사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자의 윤리적 영적 결과는 이신칭의에서 파생된 결과라고 보았고, 이신칭의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게 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인 삶의 기초를 세우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를 믿는 칭의가 윤리적 영적 결과를 낳게 한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의 법정적 칭의 개념이 주입된 의(infused righteousness), 분여된 의(imparted righteousness), 본래적 의(inherent righteousness)든 간에 어거스틴이 세운 의의 개념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를 훨씬 안전하게 세워주었다. 종교개혁의 이신칭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간의 수동성을 천명했다. 믿음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이루신 신적인 일이다. 칼빈은 그것을 성령님의 주된 사역이라고 본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입혀주시는 공로는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화해시켜주시는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희석시키는 일은 기독교 진수를 파괴하는 것과 같았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이중은혜라고 불렀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와 연합에서 분리될 수 없고,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에 떼어 놓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없이는 칭의와 성화는 헛소리일 뿐이다. 게다가 칭의는 성화 없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칭의와 성화는 동시에 수여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것은 상당한 혼선을 일으켰다. 교회가 1500년 넘게 칭의라고 여겨오던 것이 이제 칭의와 성화로 따로 따로 나뉘었다. 그러면서 그 한 부분은 여전히 칭의라고 부른다. 1540년 경 개신교 칭의 교리는 네가지 특징을 갖추게 되었다:

1. 칭의는 그리스도인이 의롭다는 법정적 선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의로워지는 과정이 아니다. 본성이 아니라 신분 변화가 포함된다.

2. 칭의는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외적 사역과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성화 또는 중생 사역을 주도면밀하고 조직적으로 구별한다.

3. 칭의는 의롭다 하시는 외래적 의로서 믿는 자는 외부에서 그에게 칭의가 전가된다.

4. 칭의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믿음을 통해 일어난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칭의의 방편이자 칭의의 기반인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해된다.

4장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로마 카톨릭은 인간이 첫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나 둘째 아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상태로 옮겨져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는 과정이다. 로마 카톨릭은 자연 상태에서 은혜 상태로 전이되는 전 과정을 칭의로 이해한다. 로마 카톨릭은 칭의와 성화를 한데 묶어 이해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믿음과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순종과 선행을 통해 유지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신약의 전반적 견해인 것처럼 말한다.

개신교는 칭의를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법정적 선언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칭의라는 사건은 거듭나는 것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새롭게 되는 성화의 과정과 반드시 구별된다. 그러므로 칭의는 죄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외적 역사이고, 성화는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서 일으키시는 역사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는 이론상 구분될 수 있으나 실제로는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성화되기 때문이다.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삶을 시작한다는 의미로만 칭의를 이해해야 한다. 로마 카톨릭의 이행칭의 교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이다.

그런데 사실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삶이 믿음으로 시작되어 순종과 선행으로 유지되고 발전된다는 점에서는 합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선행을 동반한다는 개신교의 표어가 이 원칙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믿음을 유일한 칭의의 도구로 강조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역사적 지식이나, 지적 확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 안에 자신을 던져 넣는 것이다. 칭의의 객관적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역이며, 이 칭의가 유효하게 되고, 칭의가 우리 것이 되는 수단이 바로 믿음이다.

2부 이신칭의 교리의 현대적 의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방법을 가장 탁월하게 설명해주는 교리가 바로 이신칭의다. 이신칭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필수적인 일이다.

5장 실존적 측면

인간 실존이 변하는 일은 그 실존이 지닌 이전의 관계에 의존한다. 자유하게 하는 복음 진리가 우리를 내면적으로 변화하게 만들려면 머리로 아는 정도로는 곤란하다. 머리로 아는 지식은 가슴으로 느끼는 지식이 되어야 한다.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진리에 대해 객관적으로 아는 것과 주관적으로 진리를 붙드는 것을 구분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칭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붙드는 주관적 지식이다. 예수님을 믿는 칭의 사건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인간 실존을 만드는 사건인 칭의를 받아들여 새로워진 존재가 되는 경험적 사건이다.

6장 인격적 측면

구약의 의의 개념은 인격적인, 즉 개인적 관계에 뿌리를 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인 개인적 관계에 충실하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그 관계에 따르는 의무, 책임, 특권에 따라 행한다는 의미이다.

구약에서 기자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 관계에서 늘 문제를 삼은 것은 하나님과 그들과 인격적 관계의 문제를 이슈로 삼았다. 이와 관련하여 이신칭의의 이슈는 역시 이러한 인격과의 의미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 관계를 바로 잡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의롭다 하는 것은 그가 상대편과 바른 관계에 놓였다는 뜻이다. 이신칭의는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관계의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간의 서로 개인적인 인격적 관계로 우리를 부른다.

7장 윤리적 측면

이신칭의 교리는 진정한 기독교 윤리체계를 입증해 보인다. 칭의라는 선물은 신자에게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살아갈 의무를 지워준다. 신자가 값없이 은혜로 칭의를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그 변화에 맞게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 신자는 의롭다 하심을 받아 세상에서 빛이 되고 산 위의 동네처럼 빛나야 한다(5:14-16). 곧 칭의는 계명에의 순종으로 이끈다. 이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받기 전에는 알 수 없던 것으로 순종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기독교 윤리의 전제는 예수님을 믿고 회심한 자의 도덕적 변화와 성령 하나님의 새롭게 하고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을 통해 시작되는 새로운 순종이다. 칭의에서 시작되는 기독교 윤리의 태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이신칭의 원인보다는 결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신칭의에 기반한 기독교 윤리 체계는 개인의 근본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결론

모름지기 신학자는 이신칭의 교리가 기도하는 방식인 영성행동하는 방식인 기독교 윤리로 나타남을 탐색하고 설명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 따라서 이신칭의가 우리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에 끼친 결과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은 신학자의 의무이다. 칭의는 신자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그 변화의 일부는 삶의 모든 측면의 기초가 되도록 도전한다.

이신칭의 교리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수되어야 할 영적 유산이다. 복음은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리하라고 주신 값진 진주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신칭의 교리를 안전하게 지키고 수호하며 활용해야 한다.

평가

1.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이신칭의 교리의 중요성을 교회가 보존하고 지켜야 할 유산으로 여긴다. 그러면 어떻게 죄인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마가복음 1:15절에서 가장 먼저 복음 전하시며 회개하고 그리고 믿으라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을 받게될 것이라고 설교했다. 바울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 믿음을 증거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신칭의 교리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교회는 예수님의 처음 선포처럼 회개하고 믿으라고 선포해야 한다. 만일 회개하고 믿으라는 성경적 회개를 설교하지 않으면 성경적 이신칭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2.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교회사와 조직신학을 전공한 학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신칭의가 성경 본문 자체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에 대해 성경 주해와 본문의 상황 연구가 보다 더 요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바울이 이신칭의를 로마서에서 다룬 것은 특히 유대주의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믿음이란 수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바울이 세운 교회들은 이미 당시 상황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성경적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자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회심이 발생하여 윤리적 변화가 인격적 관계로 나타난다.

바울서신에서 예를 들자면 성경적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그 은혜에 의해 계속해서 믿음으로 산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믿음으로 사는 자의 삶에는 반드시 윤리적 변화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나타난다. 바울은 이러한 내용을 항상 교리를 먼저 언급하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후에 강조함으로 이신칭의의 결과는 반드시 성화로 나타남을 강조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 성경적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회심계명 순종과 행함은 분리되는 사안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산상보훈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계명에 순종한다. 그 계명 순종은 이웃사랑, 하나님 사랑, 물질 관계, 사회관계에서 나타나는데 주님이 가르친 계명을 이신칭의의 은혜로 지킨다. 바울서신도, 요한서신도, 야고보서도 같은 내용으로 성경적 회개를 하고 믿은 자들은 행함으로 그 은혜를 나타낸다.

3.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신칭의 교리를 가볍게 여겨, 부흥회에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영접 기도와 혹은 성경 구절을 한 구절을 외우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해주는 결과로 이신칭의는 값싼 교리로 전락해 버렸다.

그릇된 칭의는 반율법주의의 미혹이다. 많은 교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나지도 않고, 거룩하게 살지도 않으면서 단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나는 의롭게 되었으며, 구원받았다고 여기며 나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받았다.’고 자부한다. 이런 칭의는 값싼 믿음주의’(easy-believism)라고 불린다. 거듭남과 성화가 따르지 않는 칭의를 말하는 것은 반율법주의이다. 그릇된 칭의 교리는 율법주의의 미혹이다. 율법주의란 믿음으로 즉시에 값없이 의롭다 해 주시는 칭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율법적 노력과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그릇된 칭의 교리 때문에 한국교회는 성경적 회개도 없고 믿음에 근거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 결과로 윤리와 행함이 연약한 신자들을 양산시켜왔고 세상 속에서 변화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이 저지른 윤리 부재로 교회는 세상에 지탄을 받게 되었다. 값싼 이신칭의는 부메랑이 되어 교회로 돌아왔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이신칭의 교리를 다시 강조하여 성경적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도록 가르쳐야 한다. 강단에서 회개와 믿음을 강조하여 종교개혁의 유산이며 기독교 핵심 교리인 이신칭의를 재발견하고 후대에 대대로 물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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