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은 교수들의 삶을 통해서 배운다.

교회는 복음의 말씀을 전해줄 목자들을 길러내는 신학교를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칼빈 이래로, 그 학교에서 봉사하는 이들을 교회의 교사라고 불러왔다. 교회의 교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는 훈련을 목사 후보생들에게 시킨다. 말씀을 읽고 해석하는 훈련이란, 멜랑히톤이 1518년 비텐베르크 대학 취임 연설에서 밝힌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원전에서 길러내는 교육을 말한다.

이는 사람들의 생각과 전통에 집착하며 진리의 주변머리에 머문 중세의 스콜라 신학에 대한 반성을 말했다. 결국 개신교 전통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를 읽고 주해하는 전통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교회의 교사들이 성경을 통해서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성경원전을 통해 말씀을 긷는 일과 동시에 복음이 선포되는 자리인 삶이 있다. 교회의 교사는 목사 후보생들로 하여금 시대를 복음의 진리로 읽어내고 적용해 내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목사 후보생들로 하여금 성경을 주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의 정신과 싸우고 복음의 걸림돌들을 제거하여 참된 교회를 세우는 봉사자로 양육할 책임이 교회의 교사들에게 주어졌다. 목사가 교회를 섬김에 말씀의 봉사자가 되어 성도들이 사는 시대를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는 자들로 교회의 교사들은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교사들에게 이런 역할이 주어졌기에 이들을 존중히 여겨야 한다. 고신 교회는 신학교의 문제를 교회의 문제로 늘 다루어 왔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존경을 구체적으로 표시해 왔는가? 구체적으로 말해서 고신 총회 석상에 자문위원이라 하여 원로 목사와 장로들의 자리는 있지만 교회의 교사들의 자리가 배치되어 있는가? 교계 기자석은 배치하면서도 교사들의 자리가 있는가?

이것이 교회의 교사들을 고신 교회가 존중하는 정도의 상징적인 표시이다. 총회는 교회의 교사들에게 자리를 배정해서 참석하도록 해야 한다. 만약 자리를 배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참석하지 않는다면 이는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오늘 교회의 교사들은 성경이 역사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 지를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를 묻고 싶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온 한국이 숨을 죽이는 시간 동안 교회의 목사들이 어떻게 교회와 사회에게 이 현실을 이해하고 위로할지를 몰라 당황할 때 교회의 교사들은 무엇을 했는가?

한국교회가 추락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런 추락의 원인이 무엇이고, 이를 위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를 교회의 교사들은 제시하고 있는가? 주일학교가 있는 교회가 50%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 교회의 교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슬람이 우리 사회뿐 아니라 교회에게도 직접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종교개혁시기에도 이슬람이 비엔나까지 쳐들어 왔기에, 루터와 칼빈 등에 의해서 이슬람 문제가 언급되어졌다.

오늘날 테러가 수시로 터지고 있다. 테러와 폭력의 문제를 어디서 다루어야 하는가? 이것이 단지 윤리의 문제만인가? 한국사회는 양극화로 극도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기업 생태계와 사회적 분위기도, 양극화는 도를 넘었다. 이것이 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대형교회와 주변의 미자립교회들, 억대의 연봉과 최저 생활비도 보장받지 못하는 목회자의 사례들, 동성애와 현실 문제들에 대한 극단적인 대치들이 나타나고 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예수님의 복음은 어떻게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하지 않는가? 오늘 교회의 문제를 다룰 때 성경적 설교와 복음의 선포가 약해진 것에 대해 문제를 삼는다. 기복적이며 번영 신학에 포로가 된 오늘의 강단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최대의 현안이다. 그런데도 신학생들이 설교를 배울 수 있는 가장 귀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교 경건회 강단에서는 어떤 설교들이 학생들에게 전달되고 있는가?

때론 총회 산하에서 정치적 이슈가 생기고, 불의한 일들이 폭로되고, 심지어 한 때는 관선이사가 파견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사태가 발생해도 교회의 교사들은 잠잠했다. 지금도 어른들에게 밉보일 말은 지극히 삼간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학생들 입에서 존경할 만한 교수들이 적다는 말들이 쉽게 나오고 있다.

이런 말도 들린다. 가르치기는 제대로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졸업하고 나가서 딴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관절 어떻게 가르쳤으면 딴 것에 쉽게 홀리는 학생들이 되었는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최근에 문을 연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신학교가 있다. 거기에 SFC 출신 간사들이 한 해에 두 명이나 입학을 했다. 전업 교수들이 거의 없는 신학교에, 그리고 교단 교회가 없기에 안정된 교회 봉사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 그곳에 왜 학생들이 찾아갈까?

때마다 시마다 역사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유의미하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교수들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답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학생들은 거기에서 새로운 교회의 희망과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현장을 공감하는 교회의 교사들이 되어야 한다. 학생을 가르치는 책임을 일차적으로 잘 하는 것이 교수의 책임이 맞다.

그러나 학생들은 어떻게 배우는가? 물론 말을 통해서 교실을 통해서도 배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사들이 어떻게 현실에 반응하는지를 보고 더 많이 배우게 된다. 교수들의 삶을 통해 복음이 오늘도 역사 속에서 살아있고 숨을 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교회가 공적으로 제시하는 과제에 잘 응답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선생이라면 먼저 찾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교회의 미래가 불투명한 현실에 교회의 내일을 어떻게 담아낼지 담론을 주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신대원을 수도권으로 옮겨야 한다는 토론을 하던 중 서울에서 열리는 학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서울 종로 5가를 중심으로 수많은 포럼과 학술대회와 세미나가 열린다. 거기에 고신의 교사들이 발표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가? 거기에서 발표하고 씨름하는 교수들은 자기 학교에서 불성실하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부류인가? 현장에서 소통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현실을 이해하고 담아내는 작업은 고통스런 작업이다. 그리고 상당기간 멀리하고 있었다면 이를 가까이하는 일이 쉽지 않고 미숙할 수 있다. 그러나 노력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노력하며 교수들이 힘을 모아 공감하며 노력해야 한다. 이런 노력과 훈련이 있다면 교회의 공감을 얻어가고 신뢰를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 사안에 대한 신학적 사고와 반성, 그리고 이를 담아내는 기도의 영성, 그리고 실천하는 윤리는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 이는 동시적인 사건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