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서 목사(큰사랑교회 담임)

요즘처럼 실감나게 SNS의 위력을 느낀 적이 없다. 댓글의 파괴력이 얼마나 큰지 한 생명을 죽음으로 이끌 때도 적지 않고, 평소 존경했던 사람도 글의 의중을 잘못 읽으면 한 순간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한다. 그로 인해 서로가 받는 마음의 상처는 쉽게 치료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SNS가 가진 힘과 폭력성에 대해 우리는 다시금 돌아봐야 한다. 최근 필자 역시 평소 좋게 생각하던 어느 P교수님의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라는 포비아 비판에 대한 글로 인해 다소 실망과 함께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분은 글을 쓸 때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P교수님은 9천명이 넘는 팔로어를 두고 있는 분이기에 단어 하나하나 유의해서 선택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린 세대들에게 미칠 영향력은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의 글의 의도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관심을 갖는 존재요, 이 시대는 전체의 맥락에서 의중을 파악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있는 시대가 아니다. 삶에 지치고 사나워져 여차하면 터질 것 같은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때에 누군가 아킬레스를 건들면 이내 야수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그 글을 읽으며 느낀 몇 가지를 함께 나누기 원한다.

 

균형잡힌 표현의 아름다움

잠언 25:11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했다. 똑같은 말도 경우에 따라 보약도 되고 비수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경우에 맞는 아름다운 언어의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 물론 교회와 진리가 위협을 받는 위기 상황과 악한 상대라면 얼마든지 무게감 있고 과격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사도들의 글과 종교개혁자들의 글에서 그런 예를 우리는 쉽게 발견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는 언어가 가지는 위력과 폭력성에 조심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P교수의 포비아 비판의 글은 읽는 이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많았다. 예를 들면 병든 인격, 무서운 잔혹성, 위장된 악마성, 왜곡되고 병든 인격, 파열된 영혼의 얼굴등과 같은 언어는 문학적 표현을 떠나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보는 시각에 따라 동성애나 이슬람 경계사역을 하는 사람들 속에 이런 세련되지 못한 요소가 있을 수 있고 그렇게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P교수의 한쪽으로 치우친 논조에 실망하게 된다. 꼭 그렇게까지 표현해야 했을까? 또 정작 비판하는 과격한 요소가 저자 자신의 글에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자신의 비판에 자신이 갇힌 모습이다. 반대 측면에서 잠시만 생각해 보면 저들의 교회를 향한 사랑, 진리를 파수하려는 열정도 느껴지지는 않는가? 사실 동성애와 이슬람 경계사역을 하는 이들의 외로운 투쟁이 판도라의 상자를 봉합하는 동력으로써 작용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경제 논리에 속아 할랄식품에 목을 매는 정부정책에 반대하여 익산, 춘천, 그리고 제주시청까지 날아가 항의함으로 보류시키는 장본인이 바로 그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열심과 열정에 박수를 보내주고, 동시에 잘못된 표현방식에 대해 교훈하는 것이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학자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비판자와 구경꾼이 되는 것은 쉽지만, 저들처럼 비바람을 견디며 목청을 높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더욱 그런 격려가 필요한 것이다.

 

배움의 겸손함

P교수나 필자 역시 개혁신학과 신앙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 역시 과장되고 왜곡된 혐오성 글이나 표현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그럼에도 필자가 과거 동료 교수인 L교수의 SNS 글에 부탁을 했던 것처럼 P교수께도 동일한 부탁을 하고 싶다. 학자들이 먼저 포비아 주제들에 대해 깊이 연구한 후 비판과 대안을 제시해 주셨으면 하는 부탁이다. 학자는 가벼운 가십성 논쟁보다는 학문으로 말을 하는 것이 더욱 힘이 있다. 예를 들어 비록 짧더라도 기독교보 42일자에 실린 이상규교수의 <기독교 전통에서 동성애 어떻게 인식되어 왔는가?>라는 발표는 그 단적인 예다. 판단은 독자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학자는 먼저 가서 보고 구성원들을 바른 곳으로 이끌 책임이 있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기에 학문적 연구와 글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학자의 바람직한 자세라 생각한다. L교수의 경우 그 후 그의 SNS에서 지나친 포비아 글은 찾아볼 수 없었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그의 학문적인 글을 기대한다.

필자는 P교수께서도 포비아 주제에 대해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 영역의 전문가는 아니다. 학자라는 말은 자신의 해당분야의 전문가라는 뜻이지 만물박사라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전문 영역이 아니라면 포비아 주제의 전문가에게 배울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동성애나 이슬람에 대해 최고 전문가에게 배워야 한다. 신학적 이해와 함께 삶의 정황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깊은 이해가 선결되지 않았다면 그 영역에 대한 언급은 조심하고 자제해야 한다. 사실 동성애나 이슬람의 위급성은 학자들이 아는 정도를 뛰어넘는다. 특히 학자들의 이슬람에 대한 무지는 심히 우려될 정도다. 상식선의 이슬람 세력에 의해 왜곡된 지식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흔히 현 정권이 유신시대로 회귀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 이유는 대통령의 인식이 유신시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라나는 현 세대가 인식하는 동성애나 이슬람 개념은 P교수의 시대와는 전혀 다르다. 동성애자들은 그동안 다국적 대기업의 전폭적 지원 하에 오랜 세월 치밀하게 접근해왔다. 그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들이 동성애를 친근하게 느끼고 반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슬람 역시 초등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투하된 이슬람 교육 자료에 의해 아이들은 기성세대가 느끼는 인식과는 다르다. 사단의 치밀한 전략을 알게 된다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학자는 살아 있는 학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할 책임이 있다. 최근 필자는 어느 모임에서 볼프의 <알라>에 대한 철학과 교수의 비평을 듣고 그의 신학적 무지에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잘 모르면서 비평하는 그의 용기(?)에 감탄하며 약한 젊은 세대들에게 얼마나 해악을 끼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펜

필자는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애쓰시는 P교수님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더불어 부탁드리는 것은 고통의 때(딤후 3:1)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이정표 역할을 잘 감당해 달라는 것이다. 학자에게 시대를 꿰는 영적 통찰력이 없으면 현장과 괴리된 눈물 없는 메마른 이성의 노예가 되고 만다. 필드의 영혼을 마음에 두고 각골지통(刻骨之痛)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학자들은 왜 사람들이 동성애와 이슬람에 대해 포비아적 경향을 보이는지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가 볼 때 이 둘은 향후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악한 영향력이 있다. 우리는 이 상자가 열림으로 인해 치르고 있는 서구교회의 몸살과 고통의 아우성을 듣고 있다. 동성애가 열리자 연이어 일부다처, 다부일처, 근친혼, 수간 등의 성적, 윤리적 타락 현상이 나타났고, 동시에 차별금지법이 법제화되었으며, 교회는 더 이상 비판의 입을 열지 못했다. 미국교회 역시 그 뒤를 따르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그 지진파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일 수년 내에 차별금지법이 통과된다면 지금과 같은 학자들의 자유로운 비평이 가능할까? 타종교를 비판할 때 어떻게 되는지 잘 알 것이다.

이슬람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저들은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접근해 왔다. 만일 이슬람대학이 한국에 세워진다면 그 속에서 원리주의자가 나올 것은 필연적이다. 이유는 이집트에서 소지만 해도 감옥에 간다는 원리주의 교과서인 사이트 꾸틉의 <진리를 향한 이정표>와 같은 책이 버젓이 번역되어 유통되고 있는 허술한 나라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한 책을 번역한 이유가 무엇일까? 교육수준과 도덕의식이 높고 특히 기독교인이 많은 종교성이 강한 한국은 최적의 먹잇감인 것이다. 이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종교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다. 학자는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 내다보지 못하는 그곳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다가오는 위기가 어떤 것인지 경고의 소리를 내야 한다. 정작 펜을 휘둘러야 하는 때는 한쪽 구석에 쳐 박아놓거나, 반대로 우려했던 일이 발생해서야 허겁지겁 필봉을 휘두르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가장 비겁하고 무책임한 청지기다. 뒤늦게 입을 닫고 있었음을 회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올라오는 세대는 인본주의 교육을 받고 자라나는 세대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지금은 구경꾼이나 비판자가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진리 수호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싸울 수 있는 투사가 필요한 위기의 시대다. 학자들 역시 그 사명을 받은 이들로서 펜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충성되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펜의 위력과 위험을 기억하면서 바람직한 교회의 미래를 그려줄 수 있어야 한다.

 

박광서 목사는

인하대(B.A.)와 고려신학교(M.Div.)를 졸업했고,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석사(Th.M.)학위를 받고, 백석대 대학원에서 청교도로 박사(Ph.D.)학위를 받았다. 그는 급격한 세속화와 진리의 상실로 인해 신음하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변혁시킬 수 있는 글로벌 영적 지도자 양성을 위해 하나님의 꿈을 불태우는 행복한 목사이다. 현재 부천 역곡 소재 큰사랑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차세대 리더 양육가이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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