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楊花津), 어자적으로 풀어쓰면 버들강아지가 만발한 나룻터라는 뜻이다. 지금의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일대를 칭하는 이곳은 외국인 묘지로 한국기독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양화진이란 말만으로도 우리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는 이곳에는 한국에 와서 목숨을 버린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 그리고 한국에 와서 죽은 이국인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오늘 우리가 양화진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양화진(楊花鎭)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부는 수도방위를 위해서 이곳과 송파진(松波鎭), 한강진(漢江鎭) 등 3진(三鎭)을 두었는데, 이곳은 나루터 구실도 했지만 외침이나 민란에 대비하여 상비군이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양화진은 과거에는 고양군에 속한 나룻터였는데, 이곳에 ‘조개 우물’이 있었으므로 합정동(蛤井洞)이라고 불렀는데 일제시대에 합정동(合井洞)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 일대를 “머리(頭)를 자른(切) 산(山정)이란 의미의 절두산이라 칭한 것을 보면 역사의 아픈 내력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본래 이곳은 산봉우리의 생김세가 마치 누에가 머리를 처 든 것과 같다 하여 ‘덜머리’(加乙頭) 혹은 잠두봉(蠶頭峰)이라고 불렸다. 이곳 주변 나룻터에는 버들강아지가 만발하고 산봉우리는 아름다워 풍류객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곳이었다.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감리교의 매클레이(R. S. Maclay)가 1884년 6월 말 경에 이곳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아마도 이곳 풍류객들 틈에서 조선의 정취를 보기 위한 것도 한 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이 절두의 슬픈 역사를 지닌 것은 웬일일까?

  

1866년 2월, 곧 고종 3년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천주교도를 탄압하였다. 1864년 고종원연 당시 천주교도는 약 2만명으로 추산되는데, 대원군은 불우한 시절에 남인계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천주교를 다소 이해한 것 같았다. 그의 부인이 천주교도였고, 고종의 유모도 영세 받은 신자였다. 이런 점을 보면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해 관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러시아의 남하를 알아차리고 이를 제지할 목적에서 배외정책을 추진하고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서양오랑캐로 더럽혀진 한강물을 서학도(西學徒)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8천명에서 1만 명에 이르는 가톨릭 신자들을 이 산봉우리에서 처형했다. 이것이 흔히 병인사옥(丙寅邪獄)으로 불린다. 이 비극의 역사를 지켜보았던 이들은 이곳을 절두산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곳이 점차 절두산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때 프랑스 선교사는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고, 화를 면한 3선교사 중 리델(Ridel)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하여 주중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P. G. Roze, 魯勢)에게 박해소식을 전하면서 보복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라고 불린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1966년 병인교난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 절두산에 절두산순교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이런 역사적인 연유로 영화진과 절두산 일대는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역사의 땅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곳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공식명칭은 ‘서울외국인 묘지공원’인데, 서울 마포구 합정동 145-8번지를 의미하는데, 이곳 묘역면적은 13,224 m2이다. 1890년 7월 29일 개설허가를 받은 이곳에는 2004년 8월 현재 555기의 무덤이 있다. 이 중 선교사나 그 가족은 167, 직업인 117, 기타, 130, 미상 141기로 선교사묘가 4분지 1이상이 된다. 국적별로 보면 미국인 279, 영국 31, 캐나다 19, 한국 19, 러시아 18, 프랑스 7, 필리핀 5, 독일 4, 스웨덴 4, 이탤리 2, 덴마크 2, 일본 2, 그리고 남아공, 호주, 폴랜드, 뉴질랜드가 각각 1, 국적 불명이 18, 국적 미상 141기로 알려져 있다.


이곳 양화진이 외국인 묘역이 된 경위는 의료선교사 헤론의 죽음이 동기가 된다. 1885년 6월 내한한 의료선교사 헤론(Dr John W. Heron)은 제중원에서 일하던 중 1890년 7월 이질에 걸렸고 7월 26일 토요일 오전 8시에 서울에서 운명했다. 그의 임종을 앞두고 동료선교사들은 매장지 문제로 고심하게 되었고, 당시 미국공사 허드(Augustine Heard)를 찾아가 이 문제를 의논하였다. 한국에 부임한지 겨우 2달 남짓한 총영사 허드는 서울에 외국인 매장지 문제가 정리되지 않음을 알고 놀랐다.


개항지인 인천에는 1883년에 이미 외국인 매장지가 설정되어 있었다. 허드가 부임하기 전에 서울에서 2건의 외국인의 장례가 있었는데, 이때는 인천까지 운구하여 매장하였다. 그러나 7월은 가장 무더운 날씨인데 당시 사정을 고려해 본다면 인천항 해안 언덕까지 운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 공사 허드는 조선국 교섭통상사무 독판 민종묵(閔種黙)에게 ‘외국인 장지 획정요청’ 공문을 작성하여 알렌을 통역으로 대동하여 직접 통상사무아문을 방문하였다. 헤론의 죽음이 임박하여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속한 처리를 요망하고 기대했으나 헤론이 임종했던 7월 26일까지 장지가 결정되지 못했다. 장례식은 27일 주일 오후 5시 30분에 동료선교사들의 주제 하에 거행되었다. 주한 선교사들은 서울 가까이 묘지로 쓸만한 장소를 지정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조정에서 지정해 준 곳은 한강 건너편 야산 기슭 모래밭이어서 묘지로는 적절치 못했다. 이런 시간을 다투는 우여곡절 끝에 28일 아침 양화진이 외국인 묘역으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그날 오후 헤론은 양화진에 묻혔다. 헤론은 양화진에 묻힌 첫 서양인이 되었고 그의 죽임이 외국인 묘지 획정의 동기를 부여한 것이다.


1893년 10월에는 미국, 영국, 독일, 불란서, 러시아 등 5개국 공사가 공동명의로 조선 정부에 양화진을 ‘외인 묘지’로 공식 승인해 주도록 요청하였고 이 요청이 승인되었다. 1904-5년에는 양화진 외인묘지의 확장을 요청하였고 1905년에 인준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구미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들의 대표가 묘지기를 두고 관리해 왔다. 그런데 1913년 7월 1일자로 조선총독부가 마련한 토지대장에는 이곳 양화진은 ‘경성구미인묘지회’(京城 歐美人墓地會) 소유로 등록되어 있다.


1942년 5월 22일 조선총독부는 한국내의 모든 외국인의 재산을 ‘적산’(敵産)으로 압류하였음으로 양화진의 외인묘지도 동일한 운명을 거쳤을 것이다. 그러다가 미 군정하인 1946년 10월 1일자로 다시 ‘경성구미인묘지회’ 소유로 등기되었다. 그러다가 1985년 6월 17일자로 재단법인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사업회(이사장 한경직)로 그 소유권이 넘어오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때부터 실제적인 묘지조성이 이루어졌고, 이곳에 한국 기독교선교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동시에 ‘경성 구미인 묘지’는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개칭되었다.

  

이전까지 이곳은 잊혀진 역사의 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기독교가 그 백년의 역사를 보내면서 과거를 돌아보기 시작했고, 양화진은 한국교회의 역사를 간직한 기억의 땅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986년 출간된 전택부장로의 「이 땅에 묻히리라」(홍성사)나 정연희권사의 소설 「양화진」(홍성사, 1986, 1992)이 숨겨진 역사의 땅을 기억의 땅으로 소생시키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는 107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이중 38개의 십자가는 각 나라와 시대 교파별 배경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또 타블렛(Tablet) 형태의 비석 속에 세겨진 69개의 십자가는 여러 문양으로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지만 종족과 방언가 민족은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 하나라는 우주적인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 양화진에는 헤론을 비롯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베델, 헐버트, 벙커, 베어드, 무어, 윌리엄 홀 등 숫한 이국의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 따라 이국의 나라로 들어왔고, 과로와 풍토병, 학질이나 이질로 혹은 사고사로 목숨을 바쳤다. 그들은 죽어서까지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한 줌의 흙으로 남아 있다.


양화진 외국인 묘역을 돌아보면 유난히 우리의 발 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 있다. 헐버트가 묻힌 곳도 그 하나이다. 우선 헐버트의 묘비명은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호머 헐버트(Homer B. Helbert), 1863년 1월-1949년 8월. 비전의 사람이자 한국의 친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는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그리고 아래의 글귀가 한글로 새겨져 있다. “일천팔백육십삼년 일월 이십육일 미국에서 탄생, 일천구백사십구년 팔월 오일 서울에서 별세.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단기 사천이백팔십이년 팔월 삼십일일, 헐벗박사 장의위원회 새움.”

  

헐버트가 어떤 분이었기에 “한국의 친구”라고 했을까? 그는 유니온신학교 재학 당시 조정의 초청을 받고 1886년 6월 내한했다. 처음에는 관립 소학교 교사로 있었으나 육영공원이 설립되자 그해 8월부터 외국어교사가 되었다. 1894년 육영공원이 폐교하게 되자 그는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는 1903년 우리나라 YMCA 창설의 주역으로서 초대 회장이 되기도 했고,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를 발간하기도 했으며, 배일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국운이 기울 때 고종은 헐버트를 밀사로 미국에 보내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고 미국의 도움을 청하고자 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과의 비밀조약 가츠라테프트 조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 침략을 묵인해 주려했으므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지는 못했으나 헐버트는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의 운명을 슬퍼했다. 그는 「전환기의 한국」(The Passing of Korea)을 써서 한국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실로 그는 격변기 한국에서 한국인의 처지를 함께 괴로워했던 한국의 친구였다. 그러했기에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소망했던 것이 아닐까?


  

아펜젤러의 장녀 엘리스 아펜젤러의 묘비 또한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로 왔노라”(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 그가 1885년 11월 8일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감리교의 첫 선교사 아펜젤라가 내한 할 당시 그녀는 어머니 태중에 있었던 셈이다. 그녀는 이화학당 교수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 교장으로 한국을 섬겼던 여성이었다. 이것은 2대에 걸친 봉사였다.


그의 아버지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니아주 서더튼에서 출생하였고, 지금의 드류신학교를 거쳐 선교사로 임명받고 내한한 첫 감리교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언더우드와 동역하며 한국교회건설에 기초를 세웠다. 배제학당을 세우고, 정동감리교회를 설립하고, 문서운동과 성경번역에 매진했다. 이 일로 그가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선박 충돌사고로 한국에서 순직했다.


이때가 1902년 6월 11일이었다. 비록 그는 양화진에 묻히지 못했으나 그 의 딸과 그의 아들 아펜젤러 2세(Henry d. Appenzeller)는 양화진에 묻혔다. 아들 아펜젤러 2세는 신흥우를 이어 1920년 1월 배제학당 4대 교장에 취임하여 봉사했으나 일제에 의해 1939년 해임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미국에서 거주하던 중 1953년 12월 1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 달라”는 그의 유언을 따라 그의 유해는 1954년 10월 18일 영화진에 이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는 신명기 33장 27절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이렇게 보면 첫 선교사 아펜젤러와 그의 두 자녀까지 한국을 위해 헌신했으니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로 왔노라”는 말은 거짓됨이 없다.


루비 켄드릭(Ruby Kendrick)의 묘비 또한 우리의 시선을 끈다.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학교 교사였던 켄드릭. 그녀가 미혼 처녀의 몸으로 한국에 온지 겨우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가 1908년이었다. 1907년 9월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황해도 개성여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 급성맹장염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한글을 공부하며 훗날의 한국의 젊은이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고자했던 켄드릭이었다.


그러했기에 그에게 있어서 천의 생명도 부족했던 것이다. 그녀의 묘 앞에 세겨진 비문은 그녀가 살아 있을 때 미국 남감리회 소속 텍사스 엡윗 청년회에 보낸 편지에 기록된 한 구절이었다. 그가 병으로 치료 받을 때 또 이렇게 썼다. “만일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회원들에게 열씩, 스물씩, 쉰씩 아침, 저녁으로 한국으로 나오라고 전해주세요.” 이 편지는 텍사스 웹윗청년회의 연례대회 기간 중에 배달되었다. 멀리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이 편지를 들고 기도하던 청년들은 감명을 받았고, 곧 바로 켄드릭이 죽었다는 급보를 접하고는 함께 모여 있던 웹윗청년회원들은 슬픔은 가누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의 소식은 선교의 불길을 일으켰고, 3년 동안 텍사스 웹윗청년회의 20명의 젊은이가 선교사로 자원했다. 또 텍사스 웹윗청년회는 모급한 돈으로 켄드릭의 묘비를 세워주었는데 그것이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였다.


물론 외국인 묘역은 양화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이 양화진 아닌 다른 곳에도 묻혀있다. 캐나다 출신 초대 선교사 멕켄지(W. J. Meckenzie)는 황해도 소래에 묻혀있고, 남장로 출신 선교사들은 광주 양림동에 묻혀 있다. 스코필드박사(Dr F. W. Sschofield)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호주선교사들은 부산과 마산, 진주에 묻혀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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