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마저도 세상의 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 안병만 목사(열방교회담임, 코닷운영위원장)

저출산의 재앙이 대한민국을 덮쳤다. 한국의 혼인율(婚姻率)은 역대 최저치고, 출산율은 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1가정 당 1.23). 거의 한 가정이 한 명꼴의 아이를 가지는 셈이다. 지금 젊은이들은 결혼을 하지 않거나 늦추고 있고, 결혼을 해도 아이를 갖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일인 가구 세대가 점점 늘어가고 있고, 싱글이 되어도 아무런 불편함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도 한두 명만 되면 출산의 문을 닫아 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두 명의 아이를 출산하는 것도 부부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모들의 바람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더 심각한 문제다.

젊은이들이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첫 조건이 자녀를 가지는 일인데, 이런 저런 이유로 출산을 자꾸 미루고 있으니 나이가 더 들면 아이를 더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형편이 되기 때문에 저출산의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는 한심한 현상이다. 사실 자녀들을 많이 낳아 그 수가 많은 것은 부족 사회에 있어서는 큰 힘이었고 울타리였다. 그래서 추장이 되는 것도 자녀들의 숫자 의해서 결정이 되었다고 한다. 첨단 무기가 개발되지 않았던 고대부족사회에는 인해전술이 최고의 무기였고, 승리가 보장되는 담보물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집트의 바로는 고센 땅에 살고 있었던 히브리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두려움을 느꼈다. 그 두려움 때문에 히브리인들을 담당하는 산파들을 시켜서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자 바로는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남자 아이가 나면 나일 강에 수장 시킬 것을 명령했다. 많은 아이들이 바로의 명령과 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산모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세상의 법, 즉 바로의 법은 자녀들을 제한하고 죽이는 것이었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 사회는 바로의 법 즉 세상 법에 굴복하여 대부분의 가정이 산아제한을 했고, 그 결과 한명 혹은 두 명의 아이들을 낳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여겼다. 여성들이 복강경수술을 하거나 남성들이 정관수술을 하여 부부가 아기를 낳지 않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그 결과 한 세대(30-40)가 지나고 난 작금에 와서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정책이며, 법이었던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다시 원상 복구하려고 해 보니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 되었다. 정부에서 다각적으로 출산장려정책을 펼쳐도 이미 저 출산 문화에 젖어있는 젊은 세대들은 전혀 씨가 먹히지 않는다.

이런 저 출산 장려정책에 큰 몫을 한 것이 교회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형제자매가 9명이며 처가집도 마찬가지다. 우리 부부는 대 가족 안에서 자라서 아이를 적게 낳는다는 생각은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혼을 하면 많은 자녀들을 출산해야 되겠다는 각오로 결혼 후 6년 안에 3명의 자녀들을 낳았다. 셋째를 낳고 난 다음에는 형님과 누님들에게 호된 꾸중을 들었다. 세 명의 아이를 가지면 어느 교회가 너를 교역자로 청빙을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아이를 많이 가지는 것이 청빙을 받지 못할 정도의 죄가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세 명의 자녀를 가지고 난 다음에 문을 닿아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짓을 했다.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회개한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자녀를 많이 가진 성경적인 목회자를 모셔야 하는데, 경제적인 논리에 굴복하고 바로의 법에 굴복하여 저 출산 가정의 목회자를 선호하게 되었고, 성경에 나오는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가득하여 그 가운데서 충만 하라”(창세기9:7)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영적으로만 해석하여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세속적인 정부 정책을 따르도록 권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가르쳐야 할 교회 지도자들조차도 하나님의 의향을 알지 못하고 전도를 통한 숫자 부흥만 강조하다가 가정마다 다산의 복을 차단시킨 것이다.

이제 이런 현실적인 아픔 속에 어떻게 교회가 다산의 가정을 만드는 일에 앞장설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여러 교회가 어린이 집과 유치원을 경영하면서 성도 가정의 자녀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자녀를 낳을 때 마다 출산 비용과 포상금까지 주어 다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도 쓰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왜 우리가 자녀를 많이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이 희박한 상태이다. 유대인들과 천주교인들 심지어 이슬람교도들도 산하 제한을 하지 않고 그들의 신이 허락하는 만큼 낳는다. 시편 기자는 다산의 축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젊은 자의 자녀는 용사의 수중에 있는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화살 통에 가득한 자는 실로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시편127:4,5).

교회에서 유아들과 어린이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교인 고령화 현상으로 인하여 교회는 늙어가고 있어서 기성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교회당은 텅텅 빌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의 신앙을 이어갈 다음 세대들을 일으킬 수 있을까? 자녀출산 장려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서 젊은이들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가정에 대한 건강한 가치관을 성경적으로 형성하도록 교육하고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산아제한은 바로의 법이고 사탄의 법이며 말씀에 역행하는 행동이다. 불순종하는 세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렀던 것을 성경과 역사는 교훈하고 있다. 교회는 젊은 부부들에게 쉐마를 가르치고 많은 자녀들을 낳아 기르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깊이 체험하도록 해야 한다.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다산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천주교와 유대교 그리고 심지어 이슬람까지도 산아제한을 하지 않고 그 가정에 주시는 자녀들을 다 받아 양육하고 있다. 그런데 진작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라고 믿는 개신교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스스럼없이 산하 제한을 통해 저출산의 인구벽을 쌓는데 주범이 되었다. 위의 세 종교는 나름대로 성경을 경전으로 받아 들려 야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노력하여 계속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고 반대로 기독교는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저 세계교회와 특히 한국교회는 수평적 복음 전도도 잘 안 되고 있다. 교회는 다음세대에게 하나님의 법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길만이 우리가 생존하고 번성할 수 있는 최선책임을 깨우쳐 함께 이 일에 협력해야 한다. 교회와 교단은 다 출산 정책을 세워 많은 가정들이 산아제한 없이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는 대로 받아 양육하고 인재로 키울 수 있는 실천 가능한 정책을 많이 세워 함께 이 무너져가는 현실적 위기를 타개하도록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가정은 무너지고 더 나아가 교회는 그 자취만 남기는 유적지로 변하고 말 것이다.

▲ 차병원 신생아실 / 연합뉴스제공

교회와 민족의 희망은 성도들의 가정이 많은 자녀들을 낳아 말씀 맡은 자로 양육하여, 주님 오실 때까지 신앙의 바통을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를 사도바울은 설명하면서, 그들이 말씀을 맡아서 자자손손 계승해 온 것이라고 강조했다(로마서3:1,2). 젊은 세다가 자녀들을 많이 낳아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는 것이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부모세대가 이러한 성경적 가치관을 교회와 더불어 자녀들에게 가르쳐 실천할 때 오늘의 위기를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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