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사람이 죽을 때 가장 많이 하는 유언은 나 죽거든 핸드폰을 함께 묻어 달라는 것이 요즘 유행어란다. 제사 밥을 얻어먹어야 겠다 혹은 양지 바른 곳에 묻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핸드폰을 함께 묻어달란다는 것이다. 죽어서도 벨소리를 듣고 싶다는 것인데 이는 사람과의 교통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재미있는 유행어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핸드폰 가입자 수가 2007년 4월 기준으로 4141만 명이라는 통계이고 보면 지금은 약 4200만 명의 사람들이 핸드폰을 소지하고 있다는 추정이 나온다. 우리나라 인구가 4800만 명이라고 하니 초등학교 3학년 아래 정도만 핸드폰을 가지지 않았지 그 위로는 다 소지하고 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

현대의 사람들은 핸드폰과 살고 있는 것 같다. 전철을 이용해 보면 모두가 핸드폰과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보게 된다. DMB를 통해 여러 정보를 얻거나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한다. 혼자 있으면 핸드폰과 함께 노는 것이다. 이어폰을 연결하여 음악을 듣는 것도 핸드폰을 이용한다.

현대인들은 핸드폰이 가족이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핸드폰이 없으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무림고원에 선 것처럼 당황해 하고 불안해한다. 하루에도 수 십 통씩의 전화를 받고 건다. 어딘가의 누구와 대화를 원하는 것이다.

안부를 위해, 친교를 위해, 혹은 사업을 위해, 혹은 업무상 등으로 핸드폰은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비서요 친구이며 애인이다. 핸드폰은 위급할 때 가장 가까이서 그를 도와주는 구조원과 같이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없으면 불안해하기 까지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교통을 원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얼마만큼의 교통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말은 많이 하는데 정작 속에 있는 말로 교통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남북간에 동서간에 수많은 만남과 교통이 이루어지고 많은 말들이 오고 갔지만 여전히 벽이 느껴지고 있는 것은 왜 일까?

마음을 열고 진실을 말하는 사이에는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 없다. 눈만 꿈적여도 그 사람의 속내를 알 정도면 굳이 말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이전에 우리는 핸드폰이 없는 세상에서도 잘도 살아왔다. 만약 우리 눈이 모든 전파를 보게 된다면 지나다니는 수많은 문자들과 음성들을 들을 것이다. 과연 어떤 말들일까? 말과 글에 부딪혀 다치지 않을까 염려 될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우리들은 여전히 상대를 모른다. 모두가 속내를 닫아놓고 말하기 때문이다. 남북이, 동서가 대화를 한다. 그러나 사상과 사상은 대화를 할 줄 모른다. 서로가 옳다고 여겨지는 보물을 내어 보이기 싫은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보신다. 모든 날아가는 문자도 음성메일도 다 보고 계신다. 우리의 대화도 들으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탄식과 자조도 들으신다. 물론 어떤 기도도 들으신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는 속내를 열어 보이는가?

핸드폰 없이도 대화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핸드폰으로는 속내를 열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도에서는 속내를 열어야 한다. 그래야 진실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속내를 열지 않는 기도는 무효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문자들과 음성들이 수평으로만 이동되고 있다. 하늘로 올라가는 음성과 문자는 보석같이 귀한 것일 게다.

위로 올리는 음성과 문자가 진실이어야 하듯 수평으로 이동 되는 음성과 문자가 진실이 되는 세상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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