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바울의 이신칭의와 산상보훈

▲ 홍성철 목사(영국 웨일즈대학 Ph.D. 대전주는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

이 논고는 계속해서 바울의 이신칭의는 법정적 칭의이며, 또한 그 지위에 맞게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생활방식을 낳게 하는 시작단계로서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신자의 삶으로서 칭의임을 논의한다. 그러면 바울이 논의하는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하고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하나님의 의의 삶은 어디에서부터 근거하는가? 즉 로마서 12-16장의 복음적 삶의 원래 내용은 어디에서 유래했는가? 역사적 예수님의 가르침인 산상보훈에서 유래했다. 그러므로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제자도의 삶의 매뉴얼인 산상보훈은 의롭게 된 믿는 자가 지켜야 할 가르침이다.

1) 따라서 먼저 마태와 바울이 말하는 의의 차이를 살펴본다.

(1) 마태가 말하는 의는 예수를 믿음으로 신자가 보여주는 주로 도덕적 탁월함의 윤리이다. 바울이 주로 말하는 의는 할례와 율법 준수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유대주의 주장에 반하여,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주로 하나님이 믿는 신자를 의롭게 여기는 하나님의 의다.

(2) 마태에게는 신자는 의로운 자라고 결코 불려지지 않으나, 바울은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게 된 의인이다.

(3) 마태도 신자가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순종의 대가로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찾을 것을 강조한 반면,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지위로 주어지며, 또한 그 지위에 맞게 믿음으로 사는 삶의 방식도 강조한다.

(4)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경건한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는 반면(5:20), 바울 복음에서는 불경건한 자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자를 의롭게 여긴다(4:5). Frederick Dale Bruner, Matthew 1-12 (Grand Rapids: Eerdmans, 2004), 170.

(4) 결국 마태와 바울은 모두 진정한 믿음을 가진 새 언약 백성은 모두 십자가의 은혜에 반응하는 삶의 새로운 방식으로서 의로운 생활을 다 같이 강조한다. 마태는 새 언약 백성과 새로운 출애굽을 경험한 신자로서 계명 순종을, 강조하는 반면, 결국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입은 자로서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을 강조한다.

그러면 다시 논의에 들어가서 바울이 예수님이 가르친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을 따랐는가? 그렇다. 바울은 사도들의 전통에 따라 역사적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의 내용, 특히 산상보훈의 가르침을 로마서와 그의 서신서에서 담고 있다. 이로 보건데, 바울의 이신칭의는 산상보훈 의는 강조점이 다를 뿐이지 내용은 같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회개하고 믿는 자는 주의 계명인 그리스도의 법인 산상보훈에 순종한다. 따라서 복음의 원조이신 예수님의 산상보훈 이해를 위한 신학적 근거로서 산상보훈에서 묘사된 더 나은 의는 실천이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다. 비록 산상보훈이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구하도록 말하지만, 산상보훈은 죄인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묘사하고 있다. 산상보훈에서 묘사된 의는 인간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산상보훈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 인해 점진적으로 생산되어지는 것이다. 마태복음과 산상보훈은 원래 의도를 예수님과 마태의 원래 의도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세상과 전혀 다른 급진적 의를 보여주길 의도했다.

2)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는 왜 산상보훈을 지킬 수 있어야 하는가?: (1) 제자가 새로운 출애굽에 참여했기 때문에 산상보훈의 가르침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2) 제자는 새 창조를 경험했기 때문에 산상보훈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3) 제자는 죄 용서를 받은 새 언약의 수혜자이기 때문에 산상보훈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1) 새로운 출애굽: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속박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한 구속자.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와 모세의 생애를 비교하여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그린다. 모세 오경의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율법을 모세를 통해 계시한다. 그러나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과 달리, 예수님은 직접 산에서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여 산상보훈을 가르친다. 그런데 산상보훈은 모세와 같은 중보자를 통해 계시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는 내용이다(5:1-2). 따라서 예수님의 산상보훈은 하늘 위로부터 오는 윤리이다. 산상보훈 마지막 절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셨을 때에 군중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고, 율법 교사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7:28-29).

출애굽기에서 이집트 왕 바로가 히브리인의 모든 남자를 죽이려고 했고, 모세만 구원되었고(1:22; 2:10), 모세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도망했고, 그리고 수년 후에 돌아왔다(2;15; 7:6-7). 마태복음에서 예수님도 위험에 처했으며, 헤롯왕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모든 아기들을 죽였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은 구원되었다(2:13-18). 모세가 어려움에 처해 있었을 때 이스라엘로 도망했다(2:15). 예수님도 이집트로 피난했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셨다(2:13-21). 마태복음 2:17-18절에서 마태는 예레미야 31:15절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속박에 대해 이 구절을 예수님에게 적용한다. 마태는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을 모든 곤경, , 그리고 모든 것에서 구원하는 구원자로 그린다. 또한 마태는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을 강조한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권한 것처럼, 예수님을 죄와 사단의 속박에서 구원할 것으로 묘사한다.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것처럼,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영적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을 묘사한다(5:5).

마태가 예수님을 묘사하기 위해 이 어구를 사용했을 때, 구약 성경에 잘 알고 있던 유대인 독자들은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즉시 인지했을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예언의 그 성취자로서 예수님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을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로 그린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바로의 노예 속박에서 구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를 죄와 사단의 속박에서 구원할 구원자로 그린다. 마태복음 1:21절에서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한다. 이 죄에서 구원은 도덕적,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구원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메시야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죄의 벽을 해방시킨다. 이것은 죄 용서 이상의 것이다. 죄용서는 죄된 생활에서 구원 약속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홀로 인간의 모든 죄를 위한 희생을 제공했다(3:6; 9:9-13; 11:19; 20:28; 26:28; 7:27; 9:12, 26, 28; 10:10).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그리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 수태 고지 본문에서 등장한다. 마태복음 2:15절에서 마태는 호세아 11;1절을 인용한다: “이집트에서부터 나는 나의 아들을 불렀다.” 이 호세아 문맥에서 아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불렀다는 출애굽 사건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마태는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그린다. 마태는 호세아 11:1절을 인용하여 이집트에서 출애굽이 반복되고, 예수 안에서 그것이 성취되었음을 알린다. 마태는 예수님을 통하여 지금 실현되는 새로운 출애굽으로 적용한다. 어거스틴은 산상보훈은 새로운 모세와 새 출애굽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산상보훈은 예수께서 그의 사랑으로 죄와 사단의 속박에서 해방된 자들에게 산상보훈의 가르침을 말씀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산상보훈에서 묘사된 더 나은 의는 사단과 죄의 속박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의다. 그러나 예수님을 추종하는 자는 죄와 사단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그래서 구속자이신 예수님은 나의 백성을 십자가의 구속 사건으로 해방시켰다고 선언하고, 그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의롭게 되어 그리스도의 법을 순종하는 것을 의로 묘사한다. 그러므로 산상보훈은 죄의 속박에서 해방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 나타나는 더 나은 의를 묘사한다.

(2) 새로운 창조물: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새롭게 만드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

마태복음에서 세례요한은 자신을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선포한다(3:11). 그리고 즉시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찍어 불에 태워버릴 것을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한다. 세례요한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알곡의 겨는 불에 태워버릴 것이라는 언급한다. 좋은 열매는 회개를 표현하는 제자가 보여주는 선한 행위이다. 그러나 성령님은 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 성령님의 세례로 예수님의 제자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을 확신시킨 것이다. 산상보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성령님의 열매인 의를 묘사한다. 세례요한의 회개와 예수님의 불세례는 모두 심판의 주제이다. 구원받으려면 개인적 회개가 필요하며, 불같은 성령님으로 정결하게 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그런데 성령님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제자들을 종말론적 심판과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첫걸음을 딛도록 신자를 새롭게 하신다.

천지창조에서 성령의 활동은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고 묘사된다(1:2). 수면 위에 운행하다는 뜻은 날개를 치며 공중에 서 있는 자세로 있다는 뜻이다. 유대인 랍비들에 따르면, 성령임은 새처럼 날개를 치며 나는 새로 묘사한다. 그런데 랍비 문학은 성령님은 비둘기처럼 임하는 성령으로 묘사한다. 사해사본은 성령은 회개하는 자 위에 날개를 치며 나는 성령님의 활동을 묘사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비둘기같이 성령님이 임재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와 구속 사건으로 종말론적 창조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새 창조의 능력이신 종말론적 성령으로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고 믿은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으실 것이다. 마태는 독자들에게 예수님에게 성령의 도래로 새 창조의 주제를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이 새 창조를 바울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포한다(고후 5:17). 에베소서 2:8-11절에서도 신자는 한번 영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고,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었던 자들을 영적으로 살아있는 백성으로 만들고, 그리고 마귀를 대항하여 승리한 자로 세운 것은 하나님의 재창조된 자들이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종말론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6:15).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는 하나님 백성에게 윤리적 명령과 권면의 기초로 이어진다(4:13, 22 24). ‘새롭게 창조된 자인 신자는 하나님의 창조 행동의 받는 자이며, 창조의 원인을 가리킬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영역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6:15). 바울은 선행은 하나님이 영적으로 창조한 하나님의 백성의 증거이며, 신자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의 결과물임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보이기 위해 창조된 존재들이다.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선한 행위는 믿음의 열매다. 신자가 선행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신자가 믿음으로 주님과 친밀한 관계 가운데 살 때 수행될 수 있다. 그리고 믿음과 선한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성취된다. 이로 보건데 신자의 선한 행위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다. 곧 믿음의 선한 "행위는 그 구원의 증거다." 구약의 저자들은 새 창조의 기적을 오래 동안 기다렸고 약속했다. 에스겔 36:26절에서 에스겔을 통하여 돌 같은 마음을 제하고, 하나님 백성의 마음속에 나의 영을 두겠다고 약속한다. ‘나의 영성령은 주의 백성에게 생명을 주는 영이시다. 마태복음에서 성령을 신자 속에 두겠다는 이 약속은 성령으로 인해 마음이 정결한 자들이다(5:8). 하나님은 주의 백성의 마음속에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 그래서 새 창조를 경험한 주의 백성은 새롭고, 급진적으로 변화시켜 계명에 순종하게 만든다.

(3) 새 언약: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새 언약의 피다.

구약의 모세 율법인 옛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효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옛 언약인 모세 율법은 개인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하나님의 계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그들에게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이 하나님 백성을 내적으로 변화시킨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마음에 율법을 새겨 놓을 것이며, 자발적으로 율법의 의로운 명령을 지킬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약속되었다. 그래서 새 언약은 죄 용서의 언약이다. 하나님은 내면에서부터 그의 백성을 변화시킬 것이며, 그 결과로 주의 백성의 인격이 주님을 닮아 그를 기쁘게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이스라엘의 귀환과 회개와 회복을 약속했고(31:21-30), 그리고 마침내 새 언약 제도를 세우겠다고 약속한 것이다(31:31-34). 마태는 예레미야 31:15절을 인용하여 주님의 마지막 성찬에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새 언약의 약속을 성취되었음을 확인한다(26:28-29). 새 언약은 예수님의 도래로 시작되었고, 그는 새 언약을 십자가에 죽음으로 죄용서의 새 언약을 성취한다. 산상보훈은 새 언약의 성취로 제자들의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을 묘사한다. 산상보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발적으로 따르는 제자의 삶에서 자연적으로 자발적으로 발생되는 의를 묘사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삶에서 발생하는 더 나은 의는 새로운 출애굽, 새로운 창조, 그리고 새 언약을 통해 발생한다. 그리스도의 새 창조로 발생한 새로운 의는 마태복음 비유에서 등장한다. 씨 뿌리는 비유(13:1-9, 18-23)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를 옥토와 같은 땅으로 묘사하였다. 그래서 그 씨는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는 것이다. '열매를 맺다'(칼포포래오, καρποφορω)는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 '열매를 맺다,' '생산하다'는 의미다. 구약에서 열매(fruit)는 인간 행동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였다(1:3; 58:12; 3:10; 10:13; 6:19; 17:10). 신약에서 열매는 제자의 행동에서 나오는 제자도의 특성이다. '열매를 맺다'는 행동과 선행이 열매 맺는 것으로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13:23; 4:20, 28; 8:15; 7:4f; 1:6, 10). 마태복음 13:23절에서 열매는 예수님의 메시지로 말미암아 제자의 삶에서 생산되는 의로운 행위를 묘사한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열매는 제자들의 진정한 영적 특징을 나타내는 행위이다(3:8,10; 7:16-20; 12:33; 21:19,34,43). 열매는 산상보훈에서 묘사된 행동양식을 이해될 수 있다(5-7). 열매는 하늘나라 백성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5:13-16; 21:43). 씨 뿌리는 비유에서 7-15배 수확은 정상적인 수확이다. 30배는 참으로 놀라운 수확이다. 60배는 30배의 더블 수확이다. 100배는 아주 많은 수확이다. 씨 뿌리는 비유는 예수님의 제자가 자신의 삶에서 놀라운 행동과 기적과 같은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갱신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지와 알곡 비유에서도(13:24-30, 36- 43), 좋은 씨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로 묘사된다(13:38). 이 아들들은 하늘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13:43). 이 약속은 제자의 마지막 영화의 약속이다(16:2; 12:3). 제자는 마지막 추수를 기다리지만, 예수님은 좋고 의로운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완전히 변하게 될 것을 알려준다.

산상보훈은 회개한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묘사한다. 산상보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모습이 반복적으로 묘사되었다(5:45; 7:7-11). 그래서 산상보훈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훨씬 뛰어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닮는다(5:48; 6:7-12). 예수님의 제자의 의는 자기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의를 향하여 갈망하고 굶주림으로 회개를 나타낸다(5:6). 그리고 그리스도가 오실 때 그들의 의는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보훈의 윤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가능하게 만드는 윤리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예수님이 가르친 윤리는 율법과 선지자들, 그리고 지혜 문학에서 하나로 윤리로 조합한다. 그러나 그 윤리의 조합은 예수 공동체 안에서 세상과 다른 대안적 사회의 윤리이다. 그리고 그 윤리는 성령의 권능으로 역사하는 윤리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야로 보았기 때문에 메시야가 요구하는 윤리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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