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산상보훈의 의

산상보훈에서 는 그 중요성에 있어서 중요한 용어이다. 산상보훈에서 마태가 말하는 는 유대주의 의미를 지닌다. ‘하늘나라는 마태가 사용하는 유대주의 표현이며, 천국은 의의 왕국’(realm)이다(6:33). 의는 율법에 기초하는데, 예수님이 재해석한 율법에 따라 의의 표준을 만든다(5:17-28). 따라서 윤리적으로 예수님이 재해석한 율법이 인간 행동, 사고와 행위의 표준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해석한 가르침의 표준으로 제자는 자신에게 주님이 가르친 의가 있는지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조사해 보아야 한다(5:20; 6:1, 33; 7:12). 예수님의 제자는 지속적으로 의를 구하고 찾아야 한다(6:33).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의를 위한 노력이 인생 목표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산에서 모세의 시내산과 다른 새로운 예수 공동체를 세우려고 설교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마태복음서 7번 등장한다(3:15; 5:6; 10, 20; 6:1;6:33; 21:32). 그러면 마태가 말하는 의는 무엇인가? 마태에게 는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의 선한 행동이다. 마태에게 의 개념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주제다. 마태는 의의 방식으로서 예수님의 을 해석한다. ‘하나님의 뜻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실현된다. 따라서 마태에게 의는 예수를 믿는 의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재해석한 새로운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5:6절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의를 굶주리고 갈망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는 삶의 표현’(expression)이다. 곧 의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행동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5:10절에서 제자들은 하나님 뜻대로 바르고 의롭게 살려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사는 초월하는 의인 윤리를 가져야 한다(5:20). 제자의 의는 바리새인과 비교하여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 5:20절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초월하는 의는 마태복음 5:21-47절에서 살인과 간음과 복수와 원수 사랑이 의의 문제로서 세상보다 더 뛰어난 윤리의 본보기로 나타난다. 그리고 의의 질적 차이는 마태복음 5:48절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48절은 5:20절의 더 높은 의의 요구의 재선언(restatement)으로 보인다. 마태에게 더 높은 의는 완전을 향해 나아감을 지적한다(5:48). 의의 완전함5:21-47절에서 본보기로 등장한다. 5:48절의 완전함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가 보여주는 더 나은 의로서 세상과 바리새인의 것과 다른 것이며, 양적으로 질적으로 다른 규범에 따른 행동이며, 그리고 높은 윤리를 보유한 질적인 개념이다. 5:20절은 율법에 따른 규범에 따른 행동을 언급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예수님의 제자는 율법의 요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그룹의 의는 같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의는 바리새인의 의를 초월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해석과 다른, 예수님이 해석한 율법 해석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이 명령한 모든 것을 준수하는 것이 제자의 .

마태복음 6:1절의 너희의 의5:20절의 제자의 의인 너희의 의와 유사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웃관의 관계 속에서 더 나은 의5:21-48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더 나은 의는 6;1-18절이다. 6:1절의 너희의 의5:20절의 제자의 초월하는 의로 다시 회고하게 만든다. 5:20절의 제자의 의가 본보기로 5:21-48절에서 소개된 것처럼, 6:1절의 제자의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의6:2-6:18절에서 그 본보기로 소개되어 세상에 비교되는 더 나은 초월하는 의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6:1절의 너희의 의6:2-18절에 그 더 나은 의의 예화로 등장하며, 6:19-34절은 물질관계 속에서, 특히 6:33절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논의의 절정으로서 제자는 예수님이 가르친 본보기의 를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5:21-48절에서 나타난 이웃 간의 관계 속에서 더 나은 의의 본보기를 행할 때, 5:48절에서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완전함처럼 완전하게 된다. 이처럼 제자들이 6:2-33절에서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경건의 본을 제자들이 행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완전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6:33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우선적으로 찾는 것은 하나님처럼 완전한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6:33절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규범에 따라 사는 제자의 행동이다. 그래서 6:33절의 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제자의 생활방식의 행동이다. 의롭게 갈망하며 사는 이 명령은 구원을 선포하는 산상보훈의 넓은 문맥에서 또한 주어진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의 결론 부분인 마태복음 7:13-27절에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고 말씀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예수를 믿고 생활로 나타나는 탁월한 도덕적 의가 그 조건이다. 유대주의 배경과 마태복음에서 의는 주리고 목이 마른 자들은 하나님 뜻을 행하길 강하게 갈망한 자들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표준에 순응하길 강하게 열망한다(5:6). 이 산상보훈에서 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거룩한 습관이다. 세상에서 바르게 살려다가 핍박을 받고 모욕을 당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때문에 고통당하는 자다.

4. 결론

바울이 가르친 이신칭의와 예수님이 가르친 산상보훈은 독자들의 상황에 따라 초점이 다르지 본질적으로는 같은 내용이다. 곧 참으로 구원 받은 백성은 하나님이 의롭게 여긴 자들이며, 믿음으로 사는 삶의 방식을 동일하게 가르친다. 따라서 오늘날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 기독교는 바른 이신칭의를 로마서와 복음의 원조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전적으로 해석하고 가르쳐 복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교인들이 성경적인 이신칭의와 새로운 출애굽과 새언약 백성으로서 정체성이 성경적이지 못하면 그 결과는 불행으로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 이신칭의가 발생하지 않으면 두 가지 해악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율법주의신앙이다. 율법주의 신앙은 마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행동한 것처럼. 주일출석, 헌금, 기도생활로 나타나는데 마음의 내면에서 깊은 변화가 없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라는 영적 자각이 없이 종교의식을 신앙생활로 착각하며 산다. 또 다른 하나는 반율법주의다. 진정한 칭의를 경험하지 못하고 교회생활하면,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신앙이 있다고 생각하며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했기 때문에 도덕적 윤리 생활에 무감각하며 산다. 이런 신앙양태는 요한공동체에 나타난 1세기 초기 영지주의자들의 양태이다. 따라서 진정한 이신칭의가 발생하지 않으면 두 가지 영적 위험 상태로 빠져 거짓 칭의를 붙들고 살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는 바른 성경적 이신칭의는 교회를 서게 하고 넘어지게 한다. 곧 바른 이신칭의로 교회와 개인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할 때 마음의 천국과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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