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이해

올해 5월 18일은 광주에서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일어난 지 만 36주기가 되는 해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19805월 18일을 전후하여 광주와 전라남도 일원에서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기 시작한 데모로 인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냈던 사건이었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도청 및 시내 곳곳에서 벌인 시민들의 시위현장(경향신문 DB)

신군부라는 용어를 이해하려면 19615·16군사정변으로 등장한 군사정권이 전제되어야 한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일어난 5.16 군사구데타는 19791026일 박정희의 사망과 함께 붕괴된다. 이를 틈타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군부 세력이 일어났는데, 이를 신군부라 한다.

그때 당시 필자는 고려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는데 학교는 비상계엄으로 휴교하였고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암흑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모든 언론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전두환, 노태우 10년 세월 동안 불법으로 간주되어 오던 5.18은  김영삼 정권 때에 회복되기 시작하여,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이 제정(199086)되어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 및 기념사업이 이루어졌고,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이 제정(19951219)되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가해자 다수에 대한 법적 처벌이 이루어졌다.

20011218일을 기준으로 확인된 피해자는 사망 218, 행방불명자 363, 상이자 5,088, 기타 1,520명으로 총 7,2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묏 비나리

현재 사회적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이 노래는 여러 설들이 있으나 대체로 정설로 받아들이는 주장을 종합하면 1981년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서 힌트를 얻어 황석영이 가사를 만들고 김종률이 곡을 붙여 부르기 시작한 노래라는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탄생 시킨 백기완의 묏 비나리를 살펴본다.


묏 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백기완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아니 그 한발띠기로 언땅을 들어올리고
또 한발띠기로 맨바닥을 들어올려
저 살인마의 틀거리를 몽창 들어 엎어라
 
들었다간 엎고 또 들었다간 또 엎고
신바람이 미치게 몰아쳐 오면
젊은 춤꾼이여
자네의 발끝으로 자네 한 몸만
맴돌라함이 아닐세 그려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이 썩어 문드러진 하늘과 땅을 벅,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시라
돌고 돌다 오라가 감겨오면
한사위로 제끼고
돌고 돌다 죽엄의 살이 맺혀오면
또 한 사위로 제끼다 쓰러진들
네가 묻힐 한 줌의 땅이 어디 있으랴
꽃상여가 어디 있고
마주재비도 못타보고 썩은 멍석에 말려
산고랑 아무데나 내다 버려질지니
 
그렇다고 해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거라
팔다리는 들개가 뜯어가고
배알은 여우가 뜯어가고
나머지 살점은 말똥가리가 뜯어가고
뎅그렁, 원한만 남는 해골바가지
 
그리되면 띠루띠루 구성진 달구질소리도
자네를 떠난다네
눈보다만 거세게 세상의 사기꾼
협잡의 명수 정치꾼들은 죄 자네를 떠난다네
 
다만 새벽녘 깡추위에 견디다 못한
참나무 얼어 터지는 소리
쩡,쩡, 그대 등때기 가른 소리 있을지니
 
그 소리는 천상
죽은 자에게도 다시 치는
주인놈의 모진 매질소리라
 
천추에 맺힌 원한이여
그것은 자네의 마지막 한의 언저리마저
죽이려는 가진 자들의 모진 채쭉소리라
차라리 그 소리 장단에 꿈틀대며 일어나시라
자네 한사람의 힘으로만 일어나라는 게 아닐세 그려
얼은 땅, 돌뿌리를 움켜쥐고 꿈틀대다
끝내 놈들의 채쭉을 나꿔채
그 힘으로 어영차 일어나야 한다네
 
치켜뜬 눈매엔 군바리가 꼬꾸라지고
힘껏 쥔 아귀엔 코배기들이 으스러지고
썽난 뿔은 벌겋게 방망이로 달아올라
그렇지
사뭇 시뻘건 그놈으로 달아올라
 
벗이여
민중의 배짱에 불을 질러라
 
꽹쇠는 갈라쳐 판을 열고
장고는 몰아쳐 떼를 부르고
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
북은 쌔려쳐 저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 왕창 쓸어안고 무너져라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노래 소리 한번 드높지만
다시 폭풍은 몰아쳐
오라를 뿌리치면 다시 엉치를 짓모고 그걸로도 안되면
다시 손톱을 빼고 그걸로도 안되면
그곳까지 언 무를 쑤셔넣고 아.........
 
그 어처구니없는 악다구니가
대체 이 세상 어느 놈의 짓인줄 아나
바로 늑대라는 놈의 짓이지 사람 먹는 범 호랑이는
그래도 사람을 죽여서 잡아먹는데
사람을 산채로 키워서 신경과 경락까지 뜯어먹는 건
바로 이 세상 남은 마지막 짐승 가진자들의 짓이라
 
그 싸나운 발톱에 날개가 찢긴
매와 같은 춤꾼이여
 
이때
가파른 벼랑에서 붙들었던 풀포기는 놓아야 한다네
빌붙어 목숨에 연연했던 노예의 몸짓
허튼춤이지, 몸짓만 있고
춤이 없었던 몸부림이지
춤은 있으되 대가 없는 풀죽은 살풀이지
그 모든 헛된 꿈을 어르는 찬사
한갓된 신명의 허울은 여보게 아예 그대 몸에
한오라기도 챙기질 말아야 한다네
 
다만 저 거덜난 잿더미속
자네의 맨 밑두리엔
우주의 깊이보다 더 위대한 노여움
꺼질수 없는 사람의 목숨이 있을지니
 
바로 그 불꽃으로 하여 자기를 지피시라
그리하면 해진 버선 팅팅 부르튼 발끝에는
어느덧 민중의 넋이
유격병처럼 파고들어
뿌러졌던 허리춤에도 어느덧
민중의 피가 도둑처럼 기어들고
어깨짓은 버들가지 신바람이 일어
나간이 몸짓이지 그렇지 곧은 목지 몸짓
 
여보게, 거 왜 알지 않는가
춤꾼은 원래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는 눈짓 말일세
그렇지
싸우는 현장의 장단소리에 맞추어
 
벗이여, 알통이 벌떡이는
노동자의 팔뚝에 신부처럼 안기시라
 
바로 거기선 자기를 놓아야 한다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의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한 춤꾼은 비로소 구비치는 자기 춤을 얻나니
 
벗이여
저 비록 이름없는 병사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어깨를 쳐
거대한 도리깨처럼
저 가진자들의 거짓된 껍줄을 털어라
이세상 껍줄을 털면서 자기를 털고
빠듯이 익어가는 알맹이, 해방의 세상
그렇지 바로 그것을 빚어내야 한다네.
 
승리의 세계지
그렇지, 지기는 누가 졌단 말인가
우리 쓰러졌어도 이기고 있는 민중의 아우성 젊은 춤꾼이여
오, 우리굿의 맨마루, 절정 인류최초의 맘판을 일으키시라
 
온몸으로 디리대는 자만이 맛보는
승리의 절정 맘판과의
짜릿한 교감의 주인공이여
 
저 폐허 위에 너무나 원통해
모두가 발을 구르는 저 폐허 위에
희대를 학살자를 몰아치는
몸부림의 극치 아, 신바람 신바람을 일으키시라
 
이 썩어 문드러진 놈의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다
마지막 심지까지 꼬꾸라진다 해도
언땅의 어영차 지고 일어서는
대지의 새싹 나네처럼
젊은 춤꾼이여
딱 한발띠기에 일생을 걸어라

 

임을 위한 행진곡

1981년 소설가 황석영은 위 백기완의 시의 굵은 글씨로 지정된 부분을 더 압축하여 가사를 만들고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음악인 김종률(소니비엠지뮤직)이 곡을 만들었다. 이후 광주 지역 노래패 15명이 공동으로 만든 노래극(뮤지컬) 넋풀이 -빛의 결혼식에 삽입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동기는 한 마디로 '부끄럽고 죄송해서'라고 한다.

1982220일광주 망월동 묘지에서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결혼식을 하듯 축의금까지 받는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신랑은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1980527일 계엄군의 작전으로 도청에서 사망한 윤상원이고, 신부는 학생신분을 속이고 공장에 취업하며 노동운동가로 활약하며 1978년 광천동 들불야학을 주도했던 박기순이었다.

이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던 1982년 광주는 수백 명의 5월 항쟁 관련자들이 여전히 감옥에 수감되고 입 밖으로 항쟁을 얘기도 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이후 19823월 운암동 황석영씨 집에 황석영, 김종률, 전용호씨가 모였다. 이들은 5월 항쟁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영혼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마음을 두 사람의 영혼을 기리는 창작 노래극으로나마 달래자는 황석영씨의 제안에 따라 전체 구상과 노랫말은 황석영씨가 작곡은 대학가요제수상 경력을 가진 김종률씨가 맡고 전영호씨는 노래 부를 사람을 물색하고 연락하는 일을 맡기로 했다.

일단 노래극을 만들었지만, 공연은 운암동 황석영씨 자택 2층이었고, 장비는 기타와 장구, , 꽹과리,, 빌려온 녹음기가 전부였다. 소수의 사람만 황석영씨 집에 와서 담요로 거실 유리창을 모두 막고 공연과 녹음을 했고, 그렇게 공연 겸 녹음이 함께 이루어진 '넋풀이' 창작 노래극 테이프가 완성되었다. 가사는 이랬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이처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떤 투쟁을 위해 시작된 노래가 아니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의 축가로 만들었으며, 5.18 묘역에서 불렀다고 애창곡이 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합창과 제창

우선 용어적으로 합창은 (1)여러 사람이 목소리를 맞추어서 노래를 부름, (2)여러 사람이 여러 성부로 나뉘어서 서로 화성을 이루면서 다른 선율로 노래를 부름으로 정의한다. 제창은 (1)여러 사람이 다같이 큰 소리로 외침, (2)같은 가락을 두 사람이 이상이 동시에 노래함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합창은 합창단의 주도하에 따라서 불러도 되고 안 불러도 어색하지 않지만 제창은 참석자들 모두가 함께 불러야 하는 것이므로 만약 부르지 않으면 꼭 반대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비쳐 짐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박대통령이 여야 3당의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좋은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해서 제창이 되는 것으로 알았다가 보훈처 장관이 합창으로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야권이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결국 5.18 기념행사에 참석이 거부되어 퇴장 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보훈처 장관의 말대로 아직은 누구에게는 낯설고 거부감이 있는 노래이므로 합창으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그리고 이 노래를 제창하면 카메라는 알지 못하여 부르지 못하는 사람만 잡게 되고 일부 국민은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게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총리도 부르지 않고 서있었다는 전언이다.

무엇이든지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이쯤에서 야당도 한발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면서 올해는 꼭 익혀서 내년에는 함께 부르자는 말로 국민 화합을 이루었으면 좋을 것이다. 노래 한곡에 국운이 달린 것도 아니고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피터지게 싸울 일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기념곡으로 하자. 제창으로 하자는 것을 고집하면 아직도 이해가 부족한 국민들은 무엇인가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부터 하게 된다는 것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오해와 진실

이 노래에 대해 사람들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가? 그것은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5.18에 북한군이 투입되어 무자비하게 살인을 저질러 남남 갈등을 유발하였다는 설인데, 상당히 그럴듯한 의혹을 제기하는 자는 있으나 공적으로 사실확인된 바는 없다. 두 번째는 북한 공작금을 받은 황석영이 작사했기 때문이라는 설로, 노래 제목의 []은 김일성을 지칭한다고 주장하는 설이다.

그렇게 오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기도 하다. 19938월호 <월간조선> 등에서도 황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는데, 황석영은 1989~1991년 기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입북하고, 일곱 차례에 걸쳐 김일성을 만났던 인물이다. 황씨는 독일에서 체류하다 1993년 한국으로 돌아온 뒤 수감(징역 7년형)되어 1998년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다고 알려지고 있어 그런 오해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범민련 등 좌파단체는 자신들이 주최한 행사에서 호국선열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민주열사에 대한 묵념’, ‘국민의례를 대체한 민중의례’, ‘애국가를 대체한 민중가요 즉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서 보수 쪽의 사람들에게는 좌편향적 그들만의 노래로 낙인 찍혔던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아직도 그 노래를 부르기에는 다소 어색함이 있고 양심적으로 자유를 얻지 못한다.

과연 어디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오해인지는 아직 확실히 가려지지 않았다. 이 문제를 두고 의혹의 당사자인 백기완, 황석영, 김종률, 지만원 등 진보 보수 논객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진위를 가리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픈 상처는 드러내어 오해를 푸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보수적 사람들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양심의 자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기독교인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인가?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과연 이 노래를 기독교인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노래를 당시의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들어지고 망월동 묘지에서 불려지는 애창곡이 되어 진 것에 국한 된다면 기독교인이 이 노래를 부르는 데는 양심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리 국민 전체의 화합을 위하여 백번이고 천번이고 양보를 한다고 하여도 기독신자의 양심에 양보가 안 되는 것이 우리 고신의 정신이다. 우리는 그렇게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신사참배 그거 한번만 양보하면 모두가 평안할 텐데 뭘 그렇게 야단이냐 하는 생각이 신사참배를 하게 만들었지 않는가?

이것이 김일성을 위한 노래라면 더구나 양보할 수 없고 영혼결혼식을 위한 노래라고 변명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만 이 노래 가사의 모체가 된 백기완의 시와, 작사 동기는 그랬지만 영혼결혼을 직접 묘사하는 찬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가닥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런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원작자 백기완과 작사가 황석영은 오늘의 시대에 맞는 해석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참고: 두산백과, 위키백과, 네이버 검색, 지식인, 개인 불로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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