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순서

국제공항의 경고메시지

중국의 뉴욕상하이

중국의 기본적 국력

중국의 어제와 오늘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

방향이 설정된 중국교회

중국사회주의 종교 문제의 기본관점과 정책

마무리 글

 

중국의 어제와 오늘

상하이 여행 중 필자는 뉴욕같은 빌딩숲을 헤집고 다니는 택시 기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안후이성(安徽省) 출신이었다. 안후이성은 상하이에 인접한 성으로서, 춘추시대에는 ’() 이라 불렀다. 인구 6,600만 명(2013)이면 우리나라 남북한 인구와 거의 비교된다. 한 때 우리나라 거주 화교들 가운데는 안후이, 산뚱성(山東省)인이 많았다. 성격과 문화가 우리와 비슷하여 이 땅에서 적응이 쉬웠을 듯도 하다. 강한 권설음의 빠른 속도의 말에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해시대에 태생한 지하교회

1950-1951년 중국 공산당은 서방선교사가 세운 교회당과 기구를 허물고, 중국 교회와 외국 교회와의 교류를 단절시켰.. 20세기 초 중국에는 서방 선교사들이 설립했거나 운영한 각 급 학교가 7,382개소(로마천주교 6,255개소), 이들 교육기관은 중국이 공산화 되는 과정에서 교육권회수운동’(收回教育權運動) 명분으로 모두 몰수당했다. 1949년 중국 전역에는 성요한대학(上海), 금릉대학(南京), 연경대학(北京)을 비롯한 기독교 대학 20개소가 있었다. 이들 대학 역시 교육권회수운동당시 전부 몰수되거나 개조 및 병합되었다. 개신교의 중국 선교 143년 만에 생긴 가공스러운 사건이었다. 1958년부터 당국은 교회당을 대량 폐쇄조치했다. 베이징에서 66개소(4개소 보류), 상하이 204개소(8개소 보류), 꽝쩌우(廣州) 52개소(1개소 보류)를 비롯하여 교회당 폐쇄와 함께 신도들이 박해를 받았다. 문화대혁명(1966-1976) 때는 교회의 외부 활동은 물론 정상적인 신앙 활동이 완전 통제, 모진 박해가 이어졌다. 그때 비로소 지하교회’(가정교회)가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지하교회는 형식이 없는 교회, 자발성, 공인된 지도자 없음, 은밀, 일정하지 않는 소형집회, 단순한 목적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시대가 열리면서, 197948, 그동안 닫혔던 교회당 문이 개혁개방에 맞춰 빠이넨탕(百年堂), 신제탕(新街堂), 무언탕(沐恩堂)이 순차적으로 개방되었다. 온 세계 언론은 중국 변화에 기대를 했다.

빠이넨탕 百年堂

저장성의 닝보 빠이넨탕(浙江寧波百年堂)1848년 영국 성공회 선교사 콜발드(Colbald)와 러셀(Russel) 선교사가 설립하였으며, 문화혁명 후 대륙에서 가장 먼저 개방된 뜻 깊은 교회다.

신제탕 新街堂

푸젠성 샤먼의 신제탕(福建廈門鼓浪嶼的新街堂; 1849, Ningboshi Centennial Church)1842년 미국 개혁교회(RCA, Reformed Church in America) 선교사 데이비드 아빌(David Abeel)과 폴르넌(W. J. Pohlrnen)이 세운, 중국 대륙에서 세운 첫 번째 중국인 교회당이다. 교회당 정문 왼쪽 벽돌 기둥에는 중국 첫 번째 예배배당’(中華第一聖堂), 오른쪽 기둥에는 여호와가 계신 곳’(耶和華駐驛之所)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건물 역시 푸젠성 문물보호 대상으로 지정되어 있다.

무언탕 沐恩堂

사실은 1958년에 개칭한 무언탕’ (沐恩堂, Moore Memorial Church in Sanghai, 원래 이름은 무얼탕慕爾堂’(1890, 현재의 건물은 이전 개축한 건물, 1929), ‘무러탕慕樂堂’)을 보려고 한 것인데 시간에 쫓겨 아쉬움만 남겼다. 1931년에 1천명 이상의 집회 인원을 유지했던 무언탕은 1887(淸光緖13) 미국 감리교 선교사(李德創)에 의하여 건축된 목재건물로서 129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1989925, 상하이 인민정부가 상하이문물(黃浦區西藏中路316) 보호 건물로 지정,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혁명 기간에는 교회활동이 중지, 건물은 난징중학(南京中學) 교사로 사용되다가, 1979년 교회의 활동이 다시 회복되었다. 무언탕이 개방된 그 첫 집회 날, 예배 참석을 위해 30여 년간 기다렸던 중국 신도들은 당일 새벽 2, 3시부터 예배당 앞에 줄을 섰다고 한다. 상하이 시 당국은 한 사람도 참석치 않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 줄이 얼마나 길었던지 마치 꼬리를 문 용이 줄을 이은 것(排滿人龍)과 같다고 표현했다. 주일 예배가 시작되었을 때는 가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基督敎今日報, 2013.5.7). 당시 교회 개방은 중국이 외자 유치를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평이 대체적이다. 공산당의 안중에서 자본주의는 인민의 공적’(公敵)이다. 그러나 30년 간 자본주의와 투쟁한 결과의 중국은 빈궁과 정신적 공백의 나락으로 떨어져 쥐를 잡는 좋은 고양이(貓不能捉老鼠便不是好貓)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을 선택한 시장경제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길이었다. 개혁개방은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였지 정치와 종교의 개방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유와 동기야 어떠했던, 중국 교회는 그 개방 틈새를 비집고 지금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 교회를 잇는 교회들

중국 인구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미루어서 13억이라고들 한다(51909:30 현재, 中國人口時鐘Countrymeters 에 의하면, 1377932,477, 그 중 남성인구 51.2%, 여성48.8%, 금년출생654331, 오늘 출생 18,359) 중국 기독교 인구 역시 불확실 하다는 말이 정확할 것 같다. 어림잡아 7천만, 1, 혹은 2억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 정확도는 높지 않다는 판단이다.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사도행전1~4장까지는 숫자 개념 표기가 분명하다. “120”(1:15), “신도의 수가 3,000”(2:41), “5,000”(4:4), 그리고 5장부터는 큰 무리”(5:14), “수많은 사람들”(5:16)로 표현된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기독교 인구 역시 계수를 파악할 수는 없다. 중국에서 기독교인구가 얼마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더해가고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지금 대륙에서는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1990년대 중국 가정교회는 농촌(소형화시대)에서 아주 천천히 발전하여 오늘에 거대한 교회로 부흥 발전한 것이다. 이를 가리켜, 한 가정교회 지도자는 현재는 대형화교회 시대라고 했다. 2000년대 이후 중국 가정교회는 대형화하고 있음이 여러 정황들로 감지되고 있다. 이는 중국의 농촌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현재 중국 인구의 50%가 도시에 집중되고 있으며, 이런 추세라면, 중국사회과학원이 예측한대로 20년 후에는 중국 인구의 75%가 도시에 집중될 것이 분명하다. 현재 중국에는 100만 명 도시가 600여개, 따라서 농촌의 가정교회 위기와 함께 도심지 가정교회는 절호의 부흥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이다. 중국 대륙의 남북 최장 길이를 북쪽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헤이허(黑河)에서 남쪽 윈난 성(雲南省) 덩충(騰衝)까지 일직선을 그어서 동남부(지형평탄, 기후온화, 교통편리, 경제발달) 43%의 국토면적에 중국인구 94%가 집중되어 있다. 중국내 56개 민족 분포를 보면, 한족(漢族) 인구의 92%가 동부, 소수민족은 동북, 서남, 서북에 각각 분포되어 있다. 중국의 가정교회를 사도행전 교회에 비교하는 이유는 나름 세 가지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순수한 갈망’, 목숨을 건 신앙의 열정’, 재림 소망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

필자는 한 때 한어(漢語) 판 사도행전을 다섯 번이나 썼다. 그 때 비로소 중국이 보였다. 그 결과 사도행전 교회를 갈망’, ‘열정’, ‘소망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현재 중국 가정교회는 도심지를 중심으로 발전 정도를 넘어서 부흥을 하고 있다는 것이 여러 측면에서 포착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 교회가 극복해야할 현실적 도전도 만만치는 않은 것 같다.

정치적 도전

정치적 도전은 중국 정부가 통제하고 있는 삼자(三子) 소속 교회와 비공식 교회인 지하교회(가정교회)가 공히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 도전이다. 삼자교회의 목사는 엄밀히 말해서 구조적(框架)으로 국가 공무원에 준한다. 그들은 정부의 공학적 통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1950~1978년까지, 28년 간 신교와 로마 천주교 신도 약50만 명(國度復興報, 2007.12.23)이 순교 당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것 같다. 1949년 당시 중국 전역의 기독교 인구는 약70만 명에 불과한 것을 고려하면 순교자의 수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당시 중국에서 유형교회는 축소되고 오히려 무형 교회는 팽창했다라는 평이 나온 것 같다. 순교의 피가 과연 헛될까?

극단적 이단화의 도전

중국 교회의 부흥과 함께 이단종파 역시 교회를 혼잡하게 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수입된 이단은 물론 중국내에서 자생한 이단, 즉 루자이팡조우(鹿寨方舟), 모르쟈오파이(末日教派), 링쉐이쟈오(冷水教), 링링쟈오(靈靈教), 베이리왕(被立王; 主神教; 1988, 安徽省, 삼반푸르런(三班僕人, 1990년대, 安徽省), 쿠총성파이(哭重生派, 生命會, 全範圍教會, 동방썬디엔(東方閃電) 등이 있다(中國基督敎播道會總會, 2010). 이런 이단 종파는 주로 중국 농촌을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어서 당국의 감시망에 포착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특히 가정교회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속화의 도전

중국의 경제 발전은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기고 있다. 교회의 세속화는 물질주의 유혹, 실용주의 사조, 향락주의 침식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중국 교회 역시 세속화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 교회내에서 물질주의 유혹에 민감한 세대는 50년대부터 70년대에 태어난 세대로 구분된다. 이들 세대는 중국의 경제적 빈곤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유혹 방어가 빈약하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 성인 중 중년 세대 지식인은 1962년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의 이른바 고양이론’(貓論) 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 세대다. 즉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처세론이 적용된다. ‘누른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다만 쥐를 잡기만 하면 좋은 고양이다’(黃貓黑貓只要捉住老鼠就是好貓)라는 뜻이다. 실용주의는 신앙을 위해 치를 대가보다 이해타산 셈법에 민감하다. 교회가 이런 실용주의 노선에 경도될 때 그 무너짐의 속도가 빨라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향락주의는 80, 90년 대 후의 청년 세대들로서, 이들 세대는 중국의 개혁개방의 경제적 혜택을 누린 세대들이다. 청년세대는 문화혁명의 고난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들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현재의 즐거움을 누리는 세대로서, 자율과 각고(刻苦)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다. 그래서 중국 교회는 지금 이런 향락문화의 현실적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방향이 설정된 중국 교회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종교 신앙자유를 갖는다’, 헌법 제36조의 규정이다. 국무령 제426종교사무 조례’(200477일 국무원 제57차 상무회의통과, 200531일부터 시행) 1장 총칙 제1조는 공민의 종교신앙 자유 보장을 위하여’(為了保障公民宗教信仰自由)라는 말로 시작, 2조는 공민은 종교신앙의 자유가 있다라고 명시했다. 현재 헌법이 보장하는 중국의 종교 신앙 자유외국 교회의 관리와 간섭을 받지 않는 것’(不受境外教會管理和干預)과 종교의 중국화’(中國化)가 전제되어 있다. 이를 1950년에 제정한 삼자’(三自; 自治, 自養,自傳) 종교정책이라고 한다. ‘삼자는 국가종교국 산하의 삼자애국운동위원회중국기독교협회와 함께 국가의 통제 기관이다. 국가의 정책과 간섭 및 통제를 거부하는 교회를 지하교회’, 혹은 가정교회라고 한다. 삼자정책은 기본적으로 중국공산당이 종교 활동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며, 종교 활동에 대한 정치적 방향과 방침을 장악하고, 종교로 하여금 사회주의에 적응하도록 지도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정책에 따라서 중국은 기독교, 로마천주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등 5대 종교를 국영(國營) 종교로 공인하고 있다. 이들 종교는 국가종교사무국공산당 통일전선부지도와 감독을 받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중국공산당 정부의 아킬레스건일 수 있는, 이 종교정책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중국 정부의 종교정책과 관련하여 종교자유 침해’ , ‘인권문제로 지적하고 있다(2005, 2006년도 종교자유보고)

공산당의 관리 감독하에 있는 종교

마오쩌뚱은 어릴 때 부모의 영향으로 불교 신앙을 가졌다고 한다. 그 후 성장 과정에서 과학에 접하면서, 마르크스(K. H. Marx, 1818-1883)와 엥겔스(F. Engels, 1820-1895)의 이론에 심취했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종교의 본질과 종교 이론에 근거하여, 종교를 환상幻想이라고 확신, 중국인민의 혁명을 고민하는 가운데 오늘의 중국 종교정책 기반 조성에 공헌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오쩌뚱은 원칙적으로 종교보호정책을 강조했으며, 종교는 하루아침에 소멸하지 않기 때문에 행정명령으로 소멸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초대 총리를 역임한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역시 같은 맥락의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19512, 마오쩌뚱은 통일전선 공작에서 당과 종교가 서로 단결 협력하여 통일전선형성으로 중국을 재건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이것이 오늘의 중국의 종교정책이라고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교조(敎條)반종교와 반미신으로서, 이는 문화혁명 기간에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마오쩌뚱의 혁명초기 농촌에서는 모든 전통적 관습과 풍속마저 반공산주의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종교는 역사발전 과정에서 생성되다가 결국 소멸하는 것으로 보았고, 장쩌민(江澤民, 1926-1993)2000, 전국통일전선공작회의에서 종교의 존재와 발전의 객관적 가치 존중을 밝힌 바 있다. 이는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이 일관되게 견지해 온 종교의 소멸론에 정면 대치된 입장이었다. 장쩌민은 개혁개방 20여년을 맞는 시점에서 국가 통제 하에서도 종교의 발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중국의 현실일 것이다. 시진핑(习近平) 주석은 2016423, 전국종교공작회의에서 중국의 종교정책을 중시하고, ‘당의 종교기본 방침견지를 역설했다. 이는 지금까지 추진해 온 사회주의 종교이론에 근거한 삼자회의 철저한 관리 감독을 확인한 셈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중국기독교 제9차 대표회의 의미

중국기독교제9차 대표회(中國基督教第九屆代表會議, 2013. 9.8~11, 北京)에서 삼자회(三自會) 주석 푸센웨이(傅先偉) 장로는 과거 5년간의 사업보고에서 240만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이 보고에는 중국 가정교회의 성장계수는 포함되지 않았으며, 가정교회는 삼자회의 공식보고에 비하여 2~3배 증가했을 것으로 추산하는 것이 사실이다(基督日報The Gospel Hearald, 2013.9.9, HK5년마다 한 차례씩 소집되는 이 회의는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중국기독교협회양회’(兩會)의 회칙수정, 양회의 위원선출, 양회의 사업과 재정심의 및 양회의 일반사항들이 토의된다. 9차 대표회의에 보고된 사업보고는 2012년 말까지의 통계이기 때문에 정확도가 비교적 낮다고 봐야할 것이다. 사업보고에 의하면, 지난 5년 간 중국기독교 인구는 240만 명이 세례를 받았고, 새로 건축되었거나 증축된 교회당 5,195개소, ()와 현()에 새로 각각 조직된 양회(兩會)94, 새로 장립된 목사는 1,057, 교사와 부목사 482, 장로 1,443명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내 각 지역에서 신학교와 전문 인력이 계속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전직 교수 292, 그 중 박사와 석사 약130명으로 보고되었다. 지난 5년 간 각 신학교에서 졸업한 학생 수는 총4,369, 현재 재학생 3,702, 신학교는 21개소, 그중 과거 5년 동안 새로 신설된 신학교가 3개 포함되어 있다. 지난 5년 간 양회(兩會)가 출판한 성경은 1,780만권, 이는 삼자회가 2012년 말까지 출판한 누적 성경 6,217만권에 포함된 숫자다. 보고에는 가정교회 현황이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지난 5년간의 사업보고는 한 마디로 중국 교회가 계속 성장 발전한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중국교회의 방향 ‘2030 선교중국

2013625~28,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에서 ‘21세기 아시아기독교의 새로운 지평News Horizons: Asian Christianity in the 21 Century 이라는 주제하에 아시아교회지도자포럼((首爾會議, Asia Church Leaders Forum, ACLF)이 열렸다. 이 포럼에는 중국교회 대표자 100여명, 동남아를 비롯한 전 세계 기독교 지도자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포럼에 참석한 중국지도자 100여명은 향후 2030년까지 2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서울서약’(Seoul Commitment)을 가졌다. 이는 1807년 개신교의 중국 첫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Lobert Morrison, 1782-1834)이 영국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중국 마카오에 파송된 때부터 중국이 공산화된 1949년까지, 142년 간 중국에 파송된 기독교 모든 선교사의 수가 2만 명이라는 가정하에서 발상된 것이다. 중국 교회의 선교사 파송은 현재 중국의 종교정책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대표들의 서울서약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서울서약과 관련하여 리성풍(李聖風)은 그의2030宣敎中國에서 그 가능성을 제시했다(大使命, 雙月刊, 110) 그는 1949년대 중국 교회의 신도수가 100만 명에 미달한 것을 먼저 상기시키고, 그로부터 반세기 후 중국교회 신도 수는 그 10배를 넘어섰다고 기술했다. 현재 중국의 기독교 인구를 1억으로 가정할 때, 5천 명당 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한다면 2만 명 파송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2015928~101일까지, 홍콩에서 거행된 제1선교중국 2030동원 대회-손에 손잡고 시온으로 돌아가자’(宣教中國2030動員大會, 携手萬民回歸錫安)라는 주제로 모였다. 이 대회에는 중국 내지의 가정교회 목사와 사역자들 90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회는宣敎中國 2030을 재확인했다. 이 대회에 참석한 기독교 세계선교 전략가 루이스 부시 박사(Dr. Luis Bush)는 이 대회는 중국 교회의 명확한 방향을 제시했다고 높이 평가했다(基督日報, HK). 이런 중국 교회의 선교 동력을 볼 때 2030년까지의 2만 명 선교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미국 인디애나 주 퍼듀대학(Purdue Univ.) 사회학 양펑깡(楊鳳崗, Fenggang Yang) 교수는 중국 교회의 현재 증가 속도에 미뤄볼 때 2030년에 중국교회 신도 수가 24,700만에 이를 것으로 예상, 중국이 조만간 기독교 대국이 될 것을 확신했다. 중국 기독교 경제학자 짜오시아오(趙曉) 박사 역시 ‘2030년 중국 기독교 인구가 30% 를 돌파할 것을 예상했다. 현재 중국에서 기독교 인구가 집중된 곳은 동·남부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祂的子民)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중국은 비록 무신론, 공산 국가이지만, 기독교 대국으로 전환될 것이라 입을 모으고 있다. 중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있으며, 그래서 중국이 기독교 대국이 될 것에 대한 낙관론을 펴는 것이다.장미중국(玫瑰中國)은 워싱턴의 자료를 인용하여 중국에는 매일 1만 명이 기독교인이 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디사이플 올 네이션(Disciple All Nations, Aug. 25, 2013)기독교가 가장 빨리 성장하는 탑20개국에 의하면, 네팔, 중국, 아랍에미레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오만 순으로 나타났다. 이런 정황들을 고려할 때 ‘2030 선교중국은 어렵지 않게 달성하리라 예상된다.

21세기는 중국인의 세기

‘19세기는 영국인의 세기’, ‘20세기는 미국인의 세기’, 그리고 ‘21세기는 중국인의 세기’, 이 말은 1970년대 영국의 사학자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 박사의 대담에서 언급된 말로 전해지고 있다. 토인비 박사는 중국이 아직 암울한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을 때, 21세기는 중국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미리 내다본 것이다. 그의 선견적 선언은 역사학자로서 세계의 이목을 다시 집중시켰다. 그래서였던지 BBC(2015. 3. 8)는 영국의 저널리스트 윌리엄 리스 모그(William Rees Mogg)의 말을 인용, ‘21세기가 중국의 세기가 될 것에 대한 경제적 낙관을 제시했다. 예를 들면 지난 해 초 중국의 방직제품은 미국 시장에서 17% 점유에서 50%, 유럽 시장에서는 18%에서 30%의 각각 증가 점유율을 보였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2004122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근해에서 발생한 지진해일로 인한 23만여 명의 재난 때는 중국이 최대 지원금을 출연, 중국의 외교· 정치적 입지를 과시했으며, 현재 중국은 전 세계 173개국(한국 190개국)과 수교를 맺고 있기도 하다. 수교국 중 170개국이 유엔 회원국이다. 중국의 지역별 수교국 분포를 보면 아프리카 55개국 중 51, 그 다음 미주 22, 서아시아 19, 서유럽 13, 동남아 11, 동구 11개국 등, 전 세계가 중국의 외교 독무대가 된 듯하다. 공식적 외교보다 더 강한 중국의 외교 수단은 전 세계 161개국 이상에 산재한 5천만 명(2012)화치아오’ (華僑)인구다. 이들 화교는 중국 개혁개방에 크게 이바지 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외교적 자산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부정적 시각도 있다. 중국 항일운동(12.9지식분자)의 대표 지식인 허쟈뚱(何家棟, 1923-2006)1999년 중국科技時報를 통하여 도약하는 중국, 그 미래에 대하여 고언을 서슴지 않았다. ‘21세기의 중국은 18세기 때의 세계지위를 회복하기 어렵다. ·건성세(康乾盛世, 즉 청조의 康熙, 雍正, 乾隆 3대 황제 134년간 청조 통치의 최고번영기) 시기 중국인은 당대 세계인구의 1/3 이상을 점유했으며, (경제)는 세계 전체 GDP3배였다. 변방의 중·10여 개국이 조공을 바쳤다. 21세기에서 중국 인구와 GDP는 전 세계의 1/5에 도달할 것이다.’라고 했다. 청조(淸朝)의 찬란한 역사에 대한 망청(望淸) 그리움이 녹아있는 문장인 것 같다. 청조 시대의 세계질서와 오늘의 세계 판도는 격세지감이라는 것을 잊었을까? 옌쟈치(嚴家祺) 전 중국사회과학원청치학소 소장은 ‘20세기 미국과 중국, 일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21세기는 역시 미국의 세기라고 보았다(BBC) 21세기는 분명 중국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다. 중국은 지금 비상(飛上)의 용트림을 하고 있다. 반세기 이상 공산당 감시 하에서도 교회의 부흥을 막을 수 없었던 것(28:31), 이것이 중국 현실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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