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세 박사 장례 예배 거제교회당에서 거행

고신대학교 제2대 총장을 역임한 오병세 박사 장례식 발인 예배가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교회당(옥수석 목사 시무)에서 엄숙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 조문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발인 예배는 부총회장 배굉호 목사(남천교회 담임)의 집례로 진행되었는데 사회자가 고신 교회와 한국교회의 스승이신 오병세 목사님의 발인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부름으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 총회장으로 엄수된 장례예배는 부총회장 배굉호 목사가 집례하였다.

주악에 맞춰 고신권사 성가대가 481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가사 찬양이 은은히 울러 퍼지면서 묵상기도를 드렸다.

이어 총회 서기 박영호 목사의 대표기도가 있었다. 박 목사는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병세 목사님은 사도 바울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마치고 이제 주님께서 예비하신 본향으로 가셨음을 감사드립니다. 남아있는 우리들이 스승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아서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간구 하였다.

▲ 고신권사 찬양대가 찬양을 드리고 있다.

부총회장이 디모데후서 4:6~8 말씀을 봉독하고 고신권사 성가찬양단의 찬양이 사직동교회 정진희 권사의 지휘로 나 가나안땅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내 무거운 짐 벗어버렸네.”가사가 은혜롭게 합창되었다.

▲ 총회장 신상현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다.

총회장 신상현 목사는 설교에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가르침을 받은 오병세 목사님은 천사들의 받들림을 받으면서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고인의 가르침을 본 받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스승님께서 보여주신 인품과 삶은 군자의 도와, 칼빈주의 신학 사상을 우리 후학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해방이후 출옥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1946년 설립된,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고려파가 총회로부터 쫓겨나 수난을 당할 시쯤 1952년으로 오병세 목사는 대한예수교 장로회(고려파) 총로회 발원 당시 총회 서기로서 귀한 직분을 잘 감당하신 분으로 역사의 현장에 계셨음을 회고 하였다. 오 박사님은 일생동안 학자로 행정가로 교수 사역으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의 전수를 위해 일생을 바치신 분임을 강조하였다.

총회 부서기 권오헌 목사가 고인의 육성을 영상 녹음 한 것을 시청할 수 있도록 상영하였다. 이 자료는 2015년 명절 가정 예배 시에 고인께서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을 자녀들에게 교훈하신 것이다.

조사는 고신대학교 전광식 총장이 고인의 일생을 기리는 의미있고, 뜻있는 내용을 담은 일화들을 소개하면서 생생하게 전하였다.다음은 전광식 총장의 조사전문이다.

 

오병세박사님을 추모하며           고신대학교 총장 전광식

   
▲ 전광식 총장이 조사를 하고 있다.

이 시간 우리는 정학분 사모님의 부군, 다섯명 자녀 및 그 반려자들의 아버지, 12명 손주와 그 반려자들의 할아버지, 두 증손주의 왕할아버지, 그리고 고신의 대표적 목사, 고신신학의 거두, 고신대학교 교수 및 전 총장, 우리 모두의 존경하는 스승님, 무엇보다 주를 위해 일생을 바치신 하나님의 종, 고 오병세 박사님의 장례식에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편으로는 그 분의 생애동안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시고 인도하셨다가 고통 없이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 주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더불어 이 땅에서의 그 분의 부재를 안타까와하면서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사흘 전인 68일 저녁 815. 사위이신 정현기 장로님께서 전화주셔서 대뜸 어르신 돌아가셨습니다. 20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했을 때, 저는 가슴이 덜컹하면서도 말은 태연을 가장했습니다. 말이라도 태연을 가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저는 이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언젠가 들릴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늘 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비잔틴 수도자들이 늘상 읊조려왔던 melethe thanatou(죽음에 대한 연습)를 저도 읊조리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저의 은사님 오병세 교수님은 1학년에서 7학년까지 같이 있던 고려신학대학시절 그 많은 학생들 가운데, 별 볼품없는 학부생인 저를 알아보시고(용서하십시오) 오늘날까지 정말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이 스승으로 계셨습니다. 대학 4학년시절 섬기던 교회의 당회가 전도사였던 저를 떠나라고 하여 큰 슬픔을 안은채 숙소로 돌아올 때였습니다. 바로 그날 저녁, 이런 내용을 전혀 모르셨던 오병세학장님이 전화하셔서 대구 서문로교회에서 교육전도사를 구하는데, 미스터 전이 그곳으로 가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저는 교회에서 쫓겨난 지 한주간도 쉬지 않고 바로 더 좋은 교회에서 새로운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아, 하나님은 어머님을 통해서만 아니라 은사님을 통해서도 내게 자기의 뜻을 알려주시고 은혜도 베푸시는 구나라고 확신했었습니다.

그 이후, 그 어디에서도 지원받은 곳이 없이 홀로 유학을 갈 적에 독일에 가서는 절대 신학의 일반학과나 종교학을 하지말고, 철학이나 변증학같은 것을 공부하게라고 당부하셨고, 그 한마디의 말씀이 저의 학문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귀국후 함께 교수로 재직하면서 본인이 총장을 하시고, 사위도 총장을 하셨지만 저에 대한 기대를 늘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제가 총장이 되고나면, 은사님도 제자를 다 키워 할 일을 끝내셨다고 어쩌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으시는 게 아닌지 저 나름대로 해석을 하면서 총장이 된 이후 줄곧 은사님과의 이별이 제 맘에 불안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삼주전인가, 무척산기도원인수완료를 자랑삼아 보고 드리려고 전화를 드렸는데, 반시간, 심지어 한시간도 넘게 통화하던 평상시와 달리 십분도 채 안되어 끊으시려 하여 사실 걱정을 많이 했더랬습니다. 저는 전화 때 마다 제발 식사를 거르시지 말고 꼭 드십시오. 기력이 있으셔야 합니다. 안드시면 또 제가 <외식 1번가>로 모시기 위해 연제로 가야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육류식당에 너무 여러 번 모시고가서 지난 2월에는 일식을 합시다. 라고 동래의 허룸한 일식집을 모시고 갔던 게 같이 나눈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이렇게 어쩌면 가족 외에 은사님을 가장 가까이 했던 저의 기억에 남는 은사님은 이런 분이셨습니다.

첫째, 오박사님은 고신역사의 산증인이셨습니다. 오박사님은 1946년 신학교의 출발시부터 교단 및 학교와 같이 하셨고 그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고려파의 모든 역사를 함께 오셨습니다. 긴 세월동안 총회의 거의 중요한 일에 핵심적으로 참여하셨고, 특히 교단헌법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70년의 고신역사를 가장 많이 겪고 가장 많이 아는 분을 단 한분만 꼽으라면 오병세박사라는 데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자신이 바로 고려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이 얼마나 좋은지 중세 신학자들에게서처럼 별호를 하나 붙인다면 doctor memoriae(기억박사)라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둘째, 오박사님은 탁월한 성경신학자이시며, 무엇보다 고신신학의 뼈대를 세운 고신의 대표적 신학자이셨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역사적 문헌적 비평주의를 단호히 배격하시면서 신구약을 아우르는 성경신학의 기초를 놓은 신학자였고, 여러 가지 신학적 및 제도적 연구를 통하여 고신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고수해왔고 국내적, 국제적으로 교단을 대표한 고신의 대표신학자이셨습니다. 특히 교단의 환원시 여건이 더 낫고 큰 서울의 신학교를 떠나 고신으로 귀환하시어 진정한 고신신학자로 남으신 것은 역사가 평가해야할 대단한 결단이셨습니다.

셋째, 오박사님은 특출한 리더십을 지니신 지도자이셨습니다. 이미 미국 유학생 시절 미주한인유학생회 회장도 역임하실 정도로 리더십에는 탁월한 분이셨습니다. 교단창립총회에 약관 26살의 나이로 서기를 역임하셨고, 나아가 교단초기역사를 예외로 하곤 고신총회역사상 교수로서 총회장을 역임한 분이 전혀 없는데, 18대 한상동, 19대 오병세, 20대 송상석 등, 그 때 자신보다 스무살 이상이 많은 교단설립자들이 번갈아가며 총회장을 할 그 당시 43살의 나이로 총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오늘날은 물론 앞으로도 그 권위와 리더십을 누구도 흉내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1966년 세계 베를린 선교대회에 한경직, 김활란, 김준곤 등과 함께 참가하시는 등 국제회의에서 명실공히 교단 및 한국기독교의 대표자였습니다.

넷째, 오박사님은 고신에서의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대표적 선구자이셨습니다. 우리 교단은 생래적으로 연합운동에 대해서도 매우 주의해왔는데, 오박사님은 신앙고백이 일치하고 복음과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면 교단신학의 정체성을 전혀 희석시키거나 훼손함이 없이 진리를 위한 연합운동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고 보시고, 여러 가지 연합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신학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한국복음주의 신학회도 1972년 한철하, 조종남, 김의환 박사 등과 함께 처음 조직하고 주도했고, 개혁주의신학의 보급과 확산을 위해 합동측이나 합신측 신학자들과 같이 한 개혁주의신행협회도 20여년동안 거의 주도적으로 이끌어 오셨다.

다섯째, 오박사님은 그 모습과 삶이 반듯하신 마지막 선비이셨습니다. 그는 한국 대표적 선비고장인 경북봉화에서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나셔서 언제나 의관이 반듯하셨고, 말씀과 행동이 진중하시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삶에서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부터 얼마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시는지 저는 마치 한국의 칸트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산다는 것의 재주들로 때로는 추하게 또 지저분하게 사는 이들이 많은 이 시대에 정말 귀감이 되신 삶이다.

여섯째, 오박사님은 우리와 가장 가까이, 가장 오래계셨던 은사님이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대표적 은사님들인 세박사님들 가운데, 두분은 이런 사정, 저런 이유로 말년에는 타국으로 가셨고, 또 더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우리가 더 오래, 더 가까이 뵈올수가 없어서 정말 아쉬었습니다. 하지만 오박사님은 장수하셨을 뿐 아니라 이 땅에 줄곧 남으셔서 우리 가까이에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따라서 은사님은 많은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의지도 되고 든든한 신앙적, 정신적 후원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게다가 엄하기도 하셨지만 정말 속정은 깊고 따뜻한 스승이셨습니다.

마지막 일곱째, 오박사님은 영원한 주의 나라에 들어가신 하나님의 사람이십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처럼 세상재미에 별 관심이 없으셨고 평생 말씀연구와 말씀선포, 그리고 기도의 삶, 즉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사셨습니다. 그리고 퇴직금 전부를 드려 한석장학회를 만드시고 가난한 신학생들을 지원하시는 등, 자기살기에 정신없는 이 시대인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소자하나에게 냉수 한그릇 주는 것을 귀하게 보시는 우리 주님께서 오박사님을 얼마나 영광스럽게 맞이하셨는지 추정이 됩니다.

이러한 일곱가지의 특징들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은사님이 우리 모든 제자들과 자손들에게 남긴 귀한 유산입니다. 이 유산은 우리 모두가 듣고 배우고 그렇게 살아야할 금과옥조와 같은 교훈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도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우리역시 하나님 앞에 설 그날을 늘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동박박사 세 분은 우리곁을 다 떠나가셨습니다. 아니 그분들은 박사들이 아니라 그들이 따라간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우리는 신학을 공부한 목사교수로 치면 신대원에 열여섯, 대학은 스물한명이 있지만 부끄럽게도 우리 모두 그 은사님들의 별빛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합니다. 어쩌면 저부터 별이 아니라 작은 반딧불이요, 아니 방전된 손전등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이에 오늘 은사님의 장례에서 이제 우리는 다시 충전되어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볼 것을 엄숙히 다짐해 봅니다.

사랑하는 정학분 사모님, 저를 만날 적마다 늘상, ‘내가 몸이 너무 안 좋은데, 저 할아버지 두고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사실까?’ 하시며 우시던 사모님, 이제 우리의 주님께서 사모님의 그 마음의 소원, 기도의 제목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시지 마십시오. 이별은 잠시이고, 언젠가 우리의 주님께서 이 시간의 열차에서 하차하라고 명하시면 그렇게 평생을 섬기시던 오박사님을 뵈올 날이 있겠지요. 아니, 우리 모두 그 영광의 주님을 둘러싸고 다시 뵈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소망으로 우리의 남은 생애, 아니 한순간한순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 감사합니다.

 

▲ 정학분 사모님과 상주들에게 조위를 표하고 있다.

유가족을 대표하여 장남 오원섭 강원대학교 의대대학에 재직 중인 아들이 인사를 하였다. 아버님의 장례를 총회장으로 허락해 주신 총회장님과 전국교회에 감사를 표하면서 깊이 마음에 새기고 간직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버님의 하나님이 되셨고, 또한 자녀들인 저희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고 전하므로써 믿음의 후손다운 무게감이 실렸다.

구자우 사무총장의 광고가 있은 후 246장을 부른 후, 고인의 친구이며 평생 동지였던 경북노회 성산교회 원로 목사인 류윤욱 증경총회장의 축도로 발인예배를 마쳤다.

▲ 예배를 마치고 운구가 시작되었다.

운구는 거제교회 시무장로들이 수고를 하였으며, 장례 행렬은 곧바로 김해 낙원공원을 향했다. 하관예배는 거제교회 옥수석 목사의 사회로 예배를 드렸다. 경북노회 성동교회 김용구 원로목사의 축도로 하관예배를 마쳤다. 이날 장지에는 미국의 박재영 목사(고려신학교 박손혁 교수 자녀), 유환준 선교사, 원로 김해영 목사, 원로 김종석 목사, 김정남 장로, 부기총대표회장 이성구 목사(시온성교회), 고신대 전 사무장 최병희 장로, 글마당 최수경 사장 등 100 여명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함께 하였다.

▲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관예배가 진행되었다.

이번 장례 전반은 거제교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뤄졌으며, 옥수석 목사를 비롯한 당회원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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