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자리에 올라 돌변하는 사람들

▲ 서동수 목사(SEQ 기독교 세계관 큐티 발행인)

윤홍길의 소설 완장은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극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땅 투기로 졸부가 된 최 사장이 저수지 사용권을 얻는다. 그리고 저수지 감시하는 일을 밑바닥 인생을 살던 임종술에게 맡긴다. 완장을 두른 종술은 하루아침에 변하여 마을의 독재자가 된다. 초등학교 친구와 마을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다가 자신에게 완장을 채워준 최 사장 일행에게까지 행패를 부린다. 더나가 수리 조합 직원은 물론 경찰에까지 행패를 부리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 돌변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권력은 인간을 중독 시키는 강력한 약물

왜 그럴까? 중독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권력 중독 때문이다. 아일랜드 뇌 과학자 이안 로버트슨 교수는 권력은 인간을 중독 시키는 강력한 약물이라고 말한다. 권력은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담배를 잘 못 끊는 이유도 이 도파민 때문이다. 니코틴이 도파민을 활성화 시켜서 쾌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마약도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하거나 활성화 시켜서 환각이나 쾌락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권력 중독자의 뇌를 스캔해 보면 마약 중독자의 뇌와 비슷하다. 권력에 중독되면 이 도파민이 과도하게 분비되는 것이다.

아주 평범하던 사람도 권력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을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고 복종시키는 자리에 오르면 변한다고 한다. 그들이 권력을 누리면 누릴수록 도파민이 과도하게 활성화된다. 그 결과 판단력이 흐려지고 모든 상황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교만에 빠지고 무모한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된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교만하여 비상식적인 일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래서 UC 버클리대 켈트너 교수는 권력에 빠진 사람은 안와 전두 피질이 손상된 환자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러면 충동적 행동을 일삼고 남에 대해 배려할 능력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권력 중독자들은 독단적이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독재한다. 다른 이를 무시하고 겸손을 모른다. 결국, 과도한 도파민 분비로 인하여 조울증이나 조현병(정신 분열증)이 생긴다. 이것이 권력 중독자의 끝이다.

물론 적당한 도파민 분비는 우리를 활력 있게 한다. 목표를 달성할 때 성취감, 만족감, 행복감은 다 이 도파민 때문이다. 목표한 직장에 들어가고, 사업을 따내고, 원하던 사람의 사랑을 얻었을 때의 행복감과 만족감은 다 이 도파민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당한 도파민 분비는 우리를 자신 있게 하고 도전하게 하며 목표에 집중하게 한다. 그러나 과하면 감정의 평형을 깨뜨린다. 시간이 지나면 마약처럼 오히려 도파민 양이 급격히 줄어들게 하여 다시 더 강한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이다.

권력중독에 빠진 사람들

북한을 공포로 몰아넣는 독재자 김정은도 이전에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스위스 유학 시절 학업 성적은 떨어졌지만, NBA 농구를 좋아했고, 여학생들에게는 말도 못 걸 정도로 수줍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권좌에 오르자 원로는 물론 일가친척 어른들도 벌벌 떠는 독재자가 된 것을 본다. 권력에 중독된 것이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베냐민 지파 기스라는 유력한 사람의 아들이다(삼상 9:1,10:21). 집안이 좋았다. 그는 잘 생기고 키가 큰 몸 짱이다(삼상 9:1,10:23). 이스라엘 장로들의 부탁으로 사무엘이 왕이 될 사람을 찾았다. 사울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는 순종적인 사람이었다(삼상 9:3). 그는 왕이 된 그를 면전에서 모욕하는 사람들도 용납할 정도로 온순한 사람이었다(삼상 10:26,27, 11:12,13).

그러나 야베스를 치는 암몬 사람 나하스와 싸워 대승을 거둔 사울은 권력의 맛을 보기 시작한다. 상비군 3천을 편성하여 나라를 통솔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무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삼상 10:8,13:8-15). 이때가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고자 시도하는 권력 중독 1기 정도가 될 것이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요나단의 호투로 승기를 잡자 사울은 흥분해서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삼상 14:24) 선언한다. 전쟁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먹지 말고 싸우라는 것은 비상식적이고 무모한 명령이다. 이때가 권력 중독 2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그는 그에게 충성하는 힘 있는 병사들을 모으게 된다(삼상 14:31-52).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그는 아말렉 사람들과 전쟁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고 그의 우양 중 좋은 것을 살려 둔다(24:20,25:17-19). 이때가 권력 중독 말기가 될 것이다. 결국, 이 일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간다(삼상 15). 그다음은 자신의 권력을 조금이라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평생 다윗을 쫓으며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권력중독자의 영향력 아래서 그 권력에 중독되는 사람들

이 권력 중독이 개인 중독으로 멈추면 얼마나 다행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권력 중독은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 권력에 중독되게 만든다. 미국의 노예해방 이후 모든 흑인이 자유를 찾아 떠났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백인은 우월하고 흑인은 열등하다. 원래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고 배웠다.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렇게 배웠다. 그래서 깨어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람은 인종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노예에서 해방되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유를 찾아 떠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다시 백인농장주에게 돌아가 그 밑에서 낮은 임금을 받는 농업 노동자로 살게 된다. 그들은 어렵고 힘든 일은 당연히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로 알고 산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나서야 그런 의식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1세대들은 애굽의 권력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들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이 선민이라는 것을 그렇게 가르쳤어도 기회만 되면 다시 애굽의 노예 굴로 돌아가자고 했다. 중독된 권력에 중독된 백성들의 비참함은 말할 수 없이 깊고 무섭다. , 이단들이 그 권력을 유지해 가는가? 뭔가 잘못된 줄 알지만, 그 지도자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는 중독성 때문이다.

목회자의 권력중독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개척기, 성장기에는 이런 독단적인 리더십이 어느 정도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과감하고 긍정적이며 스트레스를 이기고 과중한 업무 중에도 집중력을 높여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독까지 가서는 안 되었다. 사무엘은 좌우 여러 민족에게 억압받던 어려운 시기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평생 권력중독을 경험하지 않고 늘 겸손한 지도자로 하나님 앞에 살았다. 한국교회가 성숙 단계에 들어선 지금은 더더욱 리더인 목회자가 권력에 중독되면 안 된다.

그런데 사울처럼 미성숙한 목회자가 급성장한 대형 교회를 섬기면서 권력 중독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독재와 독선과 아집으로 회중을 이끌던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가? 그들은 거대 회중을 마음대로 이끌 수 있는 권력을 가지자 과도한 도파민 분비로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사울처럼 하나님 보다 자기 생각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 비상식적이고 무모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설교는 자신이라도 내어 주고 아픈 성도들의 마음을 다 받아 줄 것같이 하지만 막상 강단을 내려와서는 딴사람이 되었다. 성도들의 아픔을 품고 안아 줄 수 있는 공감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안와 전두 피질이 손상된 환자처럼 충동적 행동을 일삼고 독단적이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독재하게 되었다. 결국, 과도한 도파민 분비로 인하여 조울증이나 조현병 환자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버럭 목사가 많아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여러 행적은 반기독교 세력에게 비판거리를 제공했다.

권력중독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인을 이끌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권력 중독에 빠지지 않았던 사무엘처럼 다니엘처럼 요셉처럼 살아야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절대 의지했다는 것이다. 요셉은 종살이하면서도, 감옥에서도, 총리 관저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만 의지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포로기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든든한 울타리로 평생 총리직을 수행했지만,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산 사람이었다. 사무엘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이끄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묻고 의지하고 따랐던 사람이다. 그러기에 다윗을 택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순종하고 기름 부어 위대한 왕으로 세워간 것을 본다.

둘째는 개혁 교회의 본 모습을 찾아야 한다. 특히 장로교회의 정치 제도는 견제와 균형이다. 독단적이지 않도록 견제하는 동시에 목회 사역을 돕고 섬기 것이 장로의 역할이다. 그러나 지금은 당회가 투쟁하는 야당이 되거나 목회자를 지배하는 이사회가 되어 버렸다. 본래 장로교 정치 제도의 근본 취지를 이해해야 한다. 목회자가 권력 중독자가 되지 않도록 섬길 뿐 아니라 함께 동역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의 권력중독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당회의 권력중독이다.

세 번째는 공동체가 건강하고 성숙해져야 한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역할 뿐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성숙한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때 지도자가 권력중독에 빠진다 할지라도 그 권력에 중독되지 않고 건강한 교회를 지켜나갈 수 있게 된다. 공동체가 중독된 권력자에게 중독되면 구성들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교회 밖에서나 하늘 위에서 볼 때 병든 공동체가 되어 썩어 가는 것이다.

네 번째는 목회자가 스스로 자신을 중독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내려놓고 떠나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사역해야 한다. 성직은 개인적인 야망과 비전을 위한 권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성도들을 더 나은 신앙으로 이끌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헌신해야 한다. 사람 앞에서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늘 겸손과 눈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더는 성장하지 못하고 기형적으로 변질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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