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박사 3인중 마지막별이 2016년 6월 8일 떨어지다

오병세 박사님께서 동방박사 3인 중 마지막으로 201668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거처를 본향으로 옮기셨다. 무덤에서 영면(eternal sleep)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 홍반식 박사 이근삼 박사 오병세 박사

이를 계기로 고려파 역사에서 중요한 업적과 역사의 한 장(chapter)을 남기신 세분의 박사님을 추모해 보고자 한다. 교회사적 역사 분류 측면에서 보면, 1946년 고려신학교가 개교된 이래부터 1950년대 말까지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친 교수들을 제1세대로 분류할 수도 있으나, 일찍이 유학이후 1961년부터 교수한 세 박사는 1.5세대라도 하기 보다는 워낙 일찍부터 교수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제1세대에 합류한 인물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 1946년 이래 1952년 초기의 고려신학교 교수는 한상동, 박윤선, 한부선, 박손혁, 오종덕, 이상근, 한명동, 장석인, 최의손, 마두원, 함일돈 등 11명으로 타 신학교와 비교하면 최고 수준의 강사진이었다.

   
▲ 1952년 고려신학교 교수와 학생 일동
   
▲ 1952년 고려신학교 교수일동 갈부이트 목사(미 정통장로교 선교부 총무 내한)뒷줄 좌로 함일돈, 갈부이트, 오종덕, 한명동 앞줄 좌로 한부선, 박손혁, 이상근, 박윤선, 장석인, 한상동
▲ 1952년 고려신학교 교수 강사 11명좌로- 한명동(성경신학) 장석인(교양과정) 이상근(신학)한상동(신학) 최의손(선교사 의사 자연과학) 오종덕(성경신학) 한부선(신학) 박손현(신학) 박윤선(신학) 마두원(선교사 음악담당 베토벤의 6대손) 함일돈(자연과학)

우리 고려파 교회는 홍반식 박사, 이근삼 박사, 오병세 박사 세분 교수를 가리켜 별칭(애칭)으로 동방박사라고 부른다. 이 애칭은 너무 빡시게 공부를 가르치는 스승들을 신학생들이 은유적으로 부르던 별명이 정착된 것이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 나타난 박사들은 우리가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고 하므로 써, 온 유다가 소동하였다. 그리스도 탄생은 미가 선지자를 비롯 예언된 대로 유다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라고 한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찾아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리고, 아기 예수께 경배했다. 그들은 꿈에 지시를 받아, 헤롯을 피해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렇듯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박사 세분의 박사님들은 동방박사와 같은 소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신 분들이다. 그것도 고려파 교회에 보내심을 받은 선각자로서, 우리시대에 주님께서 고려파 교회에 출현시킨 귀한 종들이셨다. 1961년부터 세분의 박사님들은 학위를 수여받고 금의환향 귀국하셨다. 예전에는 농촌, 도시할 것 없이 주일마다 고려신학교 소식을 광고로 전하였고, 세분의 박사님을 위해 온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를 드렸다. 우리 고려파교회와 성도들은 이분들을 진주와 같은 귀한 보배로 여겼다.

하나님은 이 세분을 사용하기 위해 13, 14년간 고등학문을 수학하도록 준비시키셨다.

세분의 박사님들은 1946년 고려신학교가 개교되자 바로 입학한 동기생들이며, 1951년 제5회로 고려신학교를 졸업했다. 홍반식 박사는 미국의 칼빈신학교에서 수학한 이후, 유태인이 운영하는 드랍시 대학교에서 셈족 문학에 관한 논문으로 구약학 전공 철학박사(Ph. D.)학위를 받았다. 이근삼 박사는 보스톤 골든칼리지에서 수학한 후, 카버난터 신학교를 거쳐,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신학박사(Th. D.)학위를 받았다. 오병세 박사는 카버난트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컨콜디아 신학교에서 신학박사(Th. D.)학위를 받았다. 세분의 박사님들이 고려신학교에서 수학한 기간 5년을 빼어도, 외국의 유수한 신학교에서 수학한 기간이 무려 7, 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세 박사의 교수사역 기간

홍반식 박사는 1961년부터 1988년까지 27년간 고려신학교와 고신대학 학제 하에서 교수 사역을 중심으로 봉직하셨다. 이근삼 박사는 1962년부터 1994년까지 32년간 교수 사역과 만 70세까지 고신대학교 제1대 총장으로 은퇴를 하셨다. 오병세 박사는 1961년부터 1996년까지 35년간 재직하셨으며, 고신대학교 제2대 총장으로 70세에 은퇴하셨다.

세분의 동방박사가 남긴 업적

세분은 공히 연번제로 고려신학교 교장을 역임하셨으며, 이근삼 박사와 오병세 박사는 학장을 두 번 역임하셨고, 각각 제1대 총장, 2대 총장을 역임하셨다.

홍반식 박사 홍반식 박사는 출생지가 경남 진해이다. 생존당시 한국 유일의 구약신학 학자이셨다. 또한 동양인 최고의 히브리어 학자였다. 구약학 과목을 담당하셨다. 로만 가톨릭시즘을 비판하였고 강의하셨다. 교수사역에만 전념하셨고, 정치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강단에 서시면, 조용하고 잔잔한 음성으로 시작하여 점점 옥타브가 올라가는 폭발적인 감동 있는 우렁찬 음성의 메시지는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가슴이 뭉클하게 하는 말씀을 전달했다. 낙심과 좌절감에 빠진 방황하고 있는 젊은 학도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부산지역의 초교파 부활절 행사 등에는 항상 강사로 초청되어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홍반식 박사의 설교는 한국 정상이었다. 소탈하며 낭만적이나 철학적 사고로서 문학적 접근을 접목한 사고를 함께 지녔다. 경건회 시간의 홍반식 박사 메시지는 젊은 청년학도들과 재학생 전도사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한기태 교수와 이성호 교수가 명문 칼빈신학교 출신이다. 세분의 박사님들 가운데서 나이가 가장 많은 형님이다. 은퇴 후 미국에서 조깅 달리기 운동을 하시다가 심장마비로 일찍 돌아가셨다. 지금의 신학대학원을 송도에서 신학연구과 학제로 운영하던 시절 은퇴를 하셨다. 백석대학교 김진섭 부총장은 드랍시대학교가 마지막 배출한 졸업생이다. 유대인들은 까다로운 학사운영과 학위를 남발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자존심을 앞세운 절제된 학사운영으로 인해, 드랍시 대학교는 지금은 문을 닫았다. 퇴임을 앞두고 영도에서 송도 암남동 신대원에 작별인사 편지를 보냈는데, 사랑하는 마음과 격려가 담긴 글을 보내주셨다. 미스터 김을 신뢰한다고 하셨다.

이근삼 박사 이근삼 박사의 어머니는 한상동 목사와 친 형제이다. 조직신학자로서 그의 논리와 신학 이론은 아주 깊고 체계적인 이론을 잘 풀어 설명한다. 체계화된 신학이론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셨다. 칼빈주의 신학자로 통한다. S.F.C.창설과 칼빈대학 설립자 한명동 목사(명예박사)의 뒤를 이어 고신 크리스챤 유니벌시티 건설을 위해 전념하셨다. 1981년 교명을 바꾸고 의과대학을 설립하였는데, 여기에는 초기 S.F.C. 출신이며 제1영도교회 주일학교 교사였던 박영훈 원장과 친구 이원홍 장관의 노력으로 의과대학이 설립되었다. 이근삼 박사는 네덜란드 캄펜, 남아공 포쳅, 미주, 유렵 등지에 쫓아다니면서 교단과 대학을 연결시켰으며, 국제화를 도모하였다. 외국의 개혁주의 신학교와의 유대 관계를 중요시하였고, 제자들의 유학을 알선했다. 1970년대 초 독일의 도우마 목사후원을 주선하여, 목요일 점심은 신학교에서 소고기 국을 배식하도록 하였는데, 시내 목사님들이 몰려와서 함께 소고기국을 헐값에 나눠 먹었다. 항상 모금으로 교비를 충당하는 성과를 올렸다. 외부에서 받은 사례금은 늘 경리과에 입금시켰다. 은퇴 이후는 미국 복음대학교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박재영 목사, 신현국 목사, 김만우 목사 등과 미주 고려파 출신들의 연합과 후진 양성 사명을 감당하셨다. 이환봉, 이상규 강용원을 교회문제 연구소 연구원으로 등용시켜, 석사출신을 신학과, 기독교육과 전임강사로 각각 파격적으로 채용하여 교수요원으로 등용시켜 성장토록 배려했다. 고신대 석좌 교수 손봉호 박사와, 고려학원 이사장 강영안 박사가 화란 자유대학 졸업생이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일으킨 김현장을 따르던 재학생 신학과 문부식, 기독교교육과 김은숙, 의학과 여학생 등으로 인해 문교부가 학장 사임 압력을 넣어 기관장직을 사퇴하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정권이 대학을 폐교 조치하려고 하였으나, 선수촌장 브니엘의 박성기 목사가 고려파잘못 건드리면 혼쭐난다고 설득을 했다는 후문이다. 퇴임하시기 마지막 전날 호출 받아 갔더니, 어떤 정신으로 대학을 섬기고 직무를 감당하라고 당부하셨다.

오병세 박사오병세 박사님은 선지자적 사명을 가진 유능한 성경신학자이면서 탁월한 행정가이시다. 세 박사님 중에서 가장 많은 후손을 두셨다. 경북 봉화에서 어린나이 10세에 대구로 이주 하였으나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시면서 평생을 지냈다. 개혁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문서 출간을 사명으로 여기는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를 20년 동안 이끌어 오셨다. 1952년 대한예수교 장로회(고려파)총로회 발원 당시 26세의 젊은 목사로서 총회서기를 맡아 역사의 현장에 계셨던 분이기도 하다.43세에 1969925일 대한예수교 장로회(고려파) 19대 총회장을 역임하셨다.

가정, 사회, 국가는 물론, 특히 대학은 그 조직과 시스템에 있어서 학문을 겸비한 정책 수립과 예측 가능한 기획력을 필요로 하며, 탁월한 행정력이 수반되는데, 오병세 박사님은 그런 사명을 잘 감당하셨다. 교단과 대학에서의 오병세 박사님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고 대단했다. 가장 오랫동안 기관장으로 계셨으며, 대학 전반에 미친 오병세 박사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고 절대적이었다. 현재 대학에서 사용하는 모든 규정 제정은 오병세 -> 김용섭 시대를 거쳐 -> 행정 전문가 시대로 이어진다. 기관장으로서의 오병세 박사는 목회자를 꿈꾸는 학생 제군들에게 1) 학자가 되라. 2) 성자가 되라. 3) 진실한 인간이 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근검절약을 친히 실천하셨으며 본을 보이셨다. 바른 예절부터 배우라고 하시며, 엄한 면이 있으나 자상하고, 세밀하고, 정이 많으셨다. 특히 하도례 선교사와는 각별한 친분을 유지하셨다. 고려파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유지, 보존하기 위해 부절히 노력하셨다. 경북 노회의 최만술 목사, 김주오 목사, 류윤욱 목사와는 평생 동지로 여생을 살았다. 특별히 강용원, 전광식 교수를 총애하였으며, 봉화출신 권경호 목사가 오병세 박사를 잘 섬김으로 부평교회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2015년 총장님을 뵈올 때, 고려파의 산증인으로서 자서전을 정리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셨다. 이에 총장님!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잘 하셨습니다.”라고 정중히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역사의 현장에서 있었던 궁금증을 질문하였는데, 가감 없이 소견을 진실하게 가르쳐 주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력과 총명함이 뛰어난 총장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은 고려파 태동의 근원적인 이유, 박형룡의 상경, 박윤선의 이탈, 환원의 근본적인 이유 등에 대해 깊이 있는 진솔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말을 맺으면서

대학 당국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종의 소천 소식을 총회, 대학, 병원, 신대원, 선교사들과 전국의 각노회장, 국내외 주요 인사 일천여명에게 소식을 전했다

동방박사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학들은, 혼탁한 신학사상을 유의 유념하면서, 고려파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확립,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각별한 노력을 경주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특히 고려파를 형성하고 있는 기존의 역군들이나, 미래세대의 신학도 들은 자신이 걸어온 또 걸어갈 여정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된다. 미래 고신의 역사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개혁주의 신학과 정체성이 희미해지면, 선진들이 세운 고려파 신앙과 사상은 이 땅위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고신동산을 지키려면 포도원을 허는 암여우(vixen)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주의 깊게 잘 관찰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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