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한주 목사 /푸른숲교회

신학자인 루터가 평생 성경 강해자로 설교했던 교회는 비텐베르그시 중심부에 있는 성 마리아 교회다. 이곳에서 1514년부터 154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말씀 선포자로 사명을 다했다. 루터는 이교회에서 주일 오전에는 복음서를, 오후에는 서신서와 다른 성경을 본문으로 설교했고, 종교개혁 정신에 입각한 교리문답 가르치기를 잊지 않았다. 1533년부터는 비텐베르그대 동료 교수인 요한네스 부겐하겐과 함께 설교사역을 감당했다. 현재 그의 설교는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돼 있다.

중세에는 철학적이며 논리적인 스콜라주의의 난해함이 설교 내용의 주류였고 성경은 일종의 참고문헌 수준으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설교를 성경 해석으로, 설교자는 성경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자로 여겼다. 종교개혁은 설교에 있어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성경을 일종의 참고문헌 정도로 여긴 중세교회가 성경적 교회가 될 수 없었고 교회는 로마 교황청의 뜻대로 움직이는 로마 교회로 존재하였다.

이에 반해 루터는 오직 성경을 외쳤다. 로마 교회가 성경과 동일한 위치에 두었던 모든 것을 거부하고 성경만이 진리의 척도라고 선언했다. 성 마리아 교회는 그런 면에서 종교개혁의 어머니 교회와 같다. 루터는 일반 성도들이 알지 못하는 라틴으로 진행되는 설교를 독일어로 전했다. 성직자의 전유물이던 성찬식을 처음으로 일반 성도들에게도 배분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화상(예배당 안에 있는 마리아와 성인들의 그림과 각종 제단) 문제가 일어났다. 루터가 보름스 회의에 소환되어 목숨을 건 오직 성경을 선언한 이후 작센 성주 프리드리히 현공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그 성에 피신하여 성경을 번역하고 있을 때, 1522124일 칼슈타트 주도 하에 종교개혁을 어떻게 구체화 할 것인가를 규정하는 비텐베르그 규례를 반포했다. 그 규례는 총 17항으로 그 중 13항이 예배당 안에 있는 모든 화상들을 제거한다는 내용이었다. 미신을 멀리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비텐베르그 시는 예배당과 강단에 걸려 있는 화상들이 제거되면서 일대 혼란과 충격에 빠졌다. 칼슈타트는 성화제거에 관하여라는 글을 써서 교인들을 설득하였지만 충분하지 못했다. 이 때 루터의 태도가 중요하였다. 비텐베르그 시민들이 루터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칼슈타트의 글에 동의하지 않았다. 개혁의 당위성에 대하여는 긍정했지만 개혁의 방법에서 칼슈타트와 의견을 달리했다. 루터는 먼저 마음에서 화상을 제거하고 다음 상황에 따라 천천히 예배당의 화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칼슈타트는 루터와 합할 수가 없었다. 결국 스위스로 피신하여 자신과 뜻이 맞는 재세례파와 함께 바젤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개혁은 지지하지만 방법에서 일치하지 못하므로 하나가 되지 못했다. 그 때 루터가 예배당 안에서 완전히 화성을 제거하는 칼슈타트 편에 섰더라면 오늘날 독일교회가 달라졌지 않았을까? 루터의 타협적인 중간 길을 걷는 개혁으로 로마 교회에서 반쯤 개혁된 오늘날 독일 교회가 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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