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김재수 목사(총회성경연구소 객원연구원, 남아공 선교사)

십일조 교리는 신약 성경이 기록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논란이 되어오고 있는 주제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 교회도 이 주제에 대해서 일치된 교리를 교인들에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십일조를 할 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십일조는 폐지 되었다. 23:23 의 말씀도 율법의 완성이란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실천신학적인 면에서 즉 교회의 관점에서 십일조는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적인 면에서 십일조를 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많은 글들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 23:23 을 헬라어 문법적 관점에서 살펴보면서 십일조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과연 십일조가 폐지되었을까 아니면 영원한 계명의 하나로서 오늘날에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23:23 구조

23;23 은 다음과 같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구절에서 십일조에 대해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후반부이다.

 

한글역: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헬라어: τατα [δὲ] ἔδει ποισαι κκενα μὴ ἀφιναι.

음역: 타우타 []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아피에나이

문자역 이것들, 그러나, 당연하다, 행하는 것, 그리고 저것들, 아니, 무시하는 것

 

위 한글 역은 이것도 (정의와, 긍휼과 믿음) 행하고라는 하나의 완전한 문장과 저것도 (십일조하는 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또 다른 하나의 완전한 문장으로 구성되었다고 이해되어 질 수 있다. 이렇게 구성된 한글역은 전자의 문장은 전자대로, 후자의 문장은 후자대로, 이 두 문장이 서로 독립적으로 이해되어 질 수 있도록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번역에 근거한 성경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마 23;23 을 말씀하실 때에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십일조를 하는 것은 하나의 계명이 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돌아가신 후에 십일조는 완성되어졌고 특히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는 십일조는 더 이상 계명이 아니지만 교회적인 관점에서 전임 목회자에게 생계를 지원하고 전도 선교라는 지상과제를 수행하고,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등등의 이유로 오늘날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이들은 결론을 짓는다. 이들의 주장이 과연 옳은가?

우선 이 문장에 대해서 헬라어 구조를 설명하자. 헬라어 문장은 한글역과는 달리 두 개의 부정사 (행하는 것과 무시하지 않는 것 혹은 취소하지 않는 것) 와 하나의 동사 (에데이) 로 구성되었다. 이 동사는 헬라어 미완료 동사 에데이 δει (그것은 당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비인칭동사) 인데 이 동사를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 따라서 십일조 교리가 구약에만 적용되어지는 계명인가 아니면 영원한 계명인가가 결정되어진다.

 

동사 에데이

성경 헬라어 사전은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단어들의 의미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성경의 의미는 고전적으로 사전에 나타난 단어의 의미를 원칙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해석에서는 문장론, 문의론, 화용론 등을 포함하는 기호학 이론을 적용해야 한다. 이는 사전에 나타난 의미를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 문법적인 관점에서는 동사의 의미는 aktionsart 액션샷이라고 불리우는 동작의 종류, aspect 상등을 고려해서 발견되어져야 한다. 문장에서 사용된 동사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사전을 살펴보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문맥에 맞는 단어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문맥이란 가장 근접한 문맥도 있고 성경전체라고 하는 문맥도 있다. 여기서는 가장 가까운 문맥이 일차적으로 단어의 의미를 정하는데 적용되어져야 한다. 이런 이론은 쉬운 것 같지만 이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1989년도 이후부터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져 오고 있다.

이제 마 23:23 의 후반부로 되돌아 가자. 이 문장속에서 에데이 란 동사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문맥을 살펴야 한다. 이 문맥은 이것들을 행하는 것이란 부정사 구문이다. 이것들이란 율법의 중요한 것들 정의, 긍휼 그리고 믿음- 이다. 이들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주제이지만 그러나 신약서신에서도 이들은 성도들이 지켜야 할 주제로 표기 되었다. 그렇다면 에데이 동사는 시간과는 무관하게 영원히 지켜져야 하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마 23:23 의 후반부는 율법의 중요한 것을 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번역되어지며 여기서 당연하다라는 의미는 영원한 계명이란 의미이다. 멕케이에 의하면 이 경우에 에데이는 의무 미완료에 속한다. 포터는 비과거 미완료라고 표현한다.

이런 개념을 가진 에데이가 십일조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란 부정사 주어의 동사로 사용되었다. 이를 고려하면 십일조를 취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번역되어진다.

23:223 의 후반부는 하나의 동사와 두 개정의 부정사 구문들로 구성되었다고 위에서 언급 하였다. 율법의 중한 것 (정의, 긍휼, 믿음) 과 십일조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패키지로 되었다. 이 둘은 분리되어질 수 없다. 따라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영원히 지켜야 할 계명이라면 이들과 함께 십일조도 영원한 계명으로 지켜져야 한다.

참고로 율법의 중한 것을 행하는 것이란 부정사 구문에서 행하는 것은 부정과거로 그리고 십일조를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것부정사 구문에서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현재 부정사로 표현되었는데, 부정사의 시제는 시간을 표현하지 않고 문법적으로 상이란 것을 표현한다. 이 상의 개념에 대해서 추후 기회가 되면 설명하겠다.

 

요약과 결론

이 글은 십일조는 영원한 계명인가?” 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는 십일조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과 함께 성도가 지켜야 할 영원한 계명이다라고 답한다. 계명이란 자원 혹은 자발적이란 개념과는 다르다. 이는 의무이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처럼 십일조는 하는 것은 성도가 지켜야 할 하나의 의무이다. 교회적인 관점에서도 십일조가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이 글은 신약은 성도들이 지켜야 할 계명의 하나로서 십일조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구약의 십일조를 통합하면 약 소득의 23% 에 해당한다. 구약시대의 십일조는 농경시대의 산물이며, 이들의 용도는 구약에 분명하게 기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십일조와는 모든 면에서 완전이 같은 개념은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토론과 연구가 필요하지만 마태복음 23:23 은 십일조를 행하는 것은 영원한 계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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