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위원 기획기사: 칭의에 대한 이해의 현 주소와 성경적인 칭의론

. 들어가는 말

▲ 박광서 목사 (큰사랑교회 담임/ 코닷 연구위원)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있는 한국교회는 급격한 침체와 함께 사회적 신뢰 실추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그 원인으로 세속화라는 외적 요인과 더불어 성경적인 칭의론의 실종이라는 내적 요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루터의 말처럼 칭의는 교회를 일어서게 하고 무너지는 하는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율법주의무율법주의라는 양극단의 폐해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것도 칭의에 대한 무지 혹은 무책임에 기인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적인 칭의론을 분명히 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시점에 매력적인 대안으로 떠올라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바울에 대한 신학 사상이 새 관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개혁 칭의론을 거부하는 이 학파의 특징으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 새 관점의 칭의론의 문제를 진단하고 성경적 칭의론을 밝힌 탁월한 저서가 박영돈 교수의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이다. 필자는 이 저서를 간략히 살펴보면서 우리의 칭의에 대한 이해의 현 주소와 성경적인 칭의론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자 한다.

 

.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의 구성과 개요

1. 구성

박영돈 교수의 이 저서는 톰 라이트가 존 파이퍼를 반박하기 위해 저술했던 Justification: God's Plan and Paul's Vision에 대한 재반박 연구서다.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 바, 새 관점 학파의 개관, 톰 라이트의 칭의론 성경주해, 그리고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바울의 칭의론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장은 새 관점 학파와 라이트의 칭의론 해석의 틀이 무엇인지를 개관하고, 2-3장은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책의 2/3를 할애하면서 라이트의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주해에 나타난 모순과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4장에서는 라이트의 해석의 전제인 언약적 율법주의, 연장된 유배기,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에 대한 기여와 허점이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5장에서는 라이트의 문제로 비판받는 구원의 개인적 차원의 약화, 전가교리의 부인, 이중 칭의의 위험성, 그리고 구원의 확신 문제 등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 저자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칭의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뿐이며, 성화는 칭의의 열매이고,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져 가는 구원은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지향하는 목표임을 강조하며 마무리 하고 있다.

2. 개요

(1) 새 관점 학파와 톰 라이트의 주장

새 관점 내에도 다양한 형태의 목소리가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그들의 지향 점은 유사하다. 특히 종교개혁 혹은 루터파 신학에서 이해하는 바울신학을 옛 관점으로 상정하여 대비한다는 점에서는 뜻을 같이 한다. 새 관점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샌더스(E.F. Sanders), 제임스 던(James Dunn), 그리고 톰 라이트는 동일한 해석의 전제 혹은 틀로 바울의 칭의론을 해석한다. 1장에서 박영돈 교수는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 제임스 던의 율법의 행위, 톰 라이트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해석의 틀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샌더스는 1세기 문헌 연구를 통해 바울과 유대교는 율법주의종교가 아니라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로 연속성 상에 있다고 재해석했다. 그가 말하는 언약적 신율주의란 하나님이 자신의 자비로운 계획과 은혜 안에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셔서 언약을 맺으셨고, 그 언약에 대한 인간의 합당한 반응으로 혹은 그 언약에 계속 머무르게 하기 위해 계명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샌더스에게 유대인의 율법 준수 행위는 언약 백성이 되기 위한 것’(getting in)이 아니라, 단지 언약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staying in) 수단일 뿐이다. 바울이 반대한 것은 행위-의를 추구하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유대인의 민족적 배타주의라는 것이다. 이런 샌더스의 입장은 그동안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인간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의 정당성을 잃게 만들기에 신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제임스 던은 샌더스의 입장을 적극 수용하면서, 율법의 행위에 대해 재해석했다. 전통적으로 율법의 행위는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던은 율법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구분시키는 신분표식들’(identity markers) 혹은 경계표지들’(boundary markers)로써, 대표적인 것이 할례, 안식일, 음식법 같은 것이라고 한다. 던이 율법의 행위를 언약 회원권의 표지로 해석한 이유는 구원은 언약 회원권을 가진 유대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이방인들의 것도 된다는 보편주의 구원론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던의 이 같은 주장은 이신칭의에 근거한 개인구원론이 약화되는 문제가 노출되어 주객이 전도되고 말았다. 던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율법의 정죄에서 구원을 받느냐에 있지 않고 어떤 근거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느냐다. 그런 점에서 그가 볼 때 종교개혁의 전통은 바울의 핵심 의도와 맥락을 완전히 곡해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샌더스와 던의 관점의 기초 위에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이라는 틀을 세워 바울의 칭의론을 해석했다. 바울의 칭의론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인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단일한 계획, 즉 언약을 끝내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라는 거대담론(meta-narrative)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이라는 거시적 틀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무리수를 두다보니 많은 문제를 노출했다. 박영돈 교수는 라이트의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주해를 살피면서 라이트가 새 관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질 때마다 옛 관점을 슬그머니 끌어들였다가 다시 새 관점으로 돌아가는 모순을 보인다며 비판한다. 라이트가 바울의 이신칭의를 언약, 종말, 법정, 성령론이라는 다중적 신학 구조 안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도전을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교회론에 집중하다 보니 하나님과의 수직관계 속에서 한 개인이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구원론의 약화를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옛 관점의 전가 교리를 거부하고, 이중 칭의를 주장하는 라이트의 칭의론은 나름 성령론을 통해 비판을 피해 보려하지만 반펠라기우스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2) 톰 라이트 칭의론의 비판 요소들

라이트가 이해하는 바울의 칭의관에서 비판받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그가 전통적인 전가’(imputation)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전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움이 죄인에게 전가되어 재판장이 죄인을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지 않고 의인으로 여기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에 의한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죄인에게 전가되어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트는 전가라는 용어 사용을 거부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법정에서 의인이라 선언하시는 것으로 본다. 그의 관심은 개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어 구원받을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언약 백성의 구성원이며 그가 언약 백성인지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다. 라이트에게 칭의는 전가에 의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참여된 의’(incorporated righteousness)이다.

라이트가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한 개인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사건인 칭의가 먼저 경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칭의의 법정적 측면이 참여적 측면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 물론 동시적으로 사건이지만, 먼저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하고, 이어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며, 의롭게 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구원의 서정에서 각 단계가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논리의 문제인 것과 같다. 라이트의 전통적 칭의 교리에 대한 도전은 법정적 칭의와 참여적 칭의 개념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그가 의의 전가 개념을 의도적으로 축소시켰다는 것을 보여 준다.

라이트가 비판받는 두 번째는 이중 칭의의 문제다. 라이트에 따르면 의롭다는 선언은 기독론적 바탕 위에서 종말론적으로 판결이 선취되는 것이다. 그는 현재적 칭의의 방편은 믿음이고, 최종 칭의의 판결은 우리의 전 생애의 행위에 근거하여 마지막 날에 내려질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님이라는 구도로 설명한다. 그러나 믿음에 근거한현재 칭의와 전체 삶에 근거한최종 칭의라는 주장은 반펠라기우스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는 이런 비판을 의식하고 성령의 역사가 최종 칭의를 보증한다고 말하지만 궁색할 뿐이다. 이유는 칭의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신실함과 거룩함에 근거하여 심판대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인간의 선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칭의의 열매요 증거이다. 라이트의 최종 칭의 방식은 하나님 주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한다.

세 번째는 새 관점의 칭의론이 2천년 기독교사의 정통 칭의론을 능가하는 혁명 같은 사상인가라는 점이다. 그동안 옛 관점이 개인구원론 중심의 안일함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구약과 신약을 언약, 교회, 구원, 성령, 종말 등을 체계적으로 엮어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1세기의 유대교 맥락에서 신선하게 재구성한 새 관점은 상당히 매력적이고 도전적이다. 그럼에도 기독교 2천년의 전통을 전복시키는 행위는 매우 위험한 처사다. 신조나 신앙고백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성경에 기초하여 숙성시킨 신앙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 자체의 증언보다 1세기의 랍비 문헌들에 경도되어 유대교를 언약적 신율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큰 오류라 하겠다. 라이트의 경우도 모든 것을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라는 틀로 적용하다보니 개인 구원론의 약화, 칭의의 법정적 측면의 재구성, 최종 칭의의 반펠라기우스적 비판을 야기했다.

(3) 성경이 증거하는 바울의 칭의론

성경이 증거하는 바울의 칭의론은 무엇인가? 박영돈 교수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언약적 신실성이라는 개념으로 축소시킬 수 없고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 의는 어떤 조건이나 차별 없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근거하고 부활로 완성한 의다. 바울도 칭의를 이중적으로 이해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화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전 과정에 걸쳐 펼쳐지는 칭의의 당연한 귀결이자 산물이다. 따라서 신자의 거룩한 삶과 행실은 최종 칭의의 근거나 공로가 아니라 이미 내려진 칭의의 믿음이 참되다는 증거인 것이다. 바울이 전한 칭의의 복음은 개인 구원에만 국한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상을 당신과 회복시키고 죄로 오염된 온 우주를 갱신하여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포괄하는 것이다.

 

. 나가는 말

주밀하게 독자층을 확보해가며 전통적 칭의론에 적지 않은 혼란을 준 새 관점의 바울의 칭의론에 대해 박영돈 교수의 저서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는 시의적절한 비평서라 할 수 있다. 두껍지 않은 분량임에도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 하에서 폭넓고 날카로우며 깊이 있게 다루는 저자의 능력에 찬사를 보낸다. 저자는 라이트의 문제를 철저히 분석하면서도 그의 공헌 역시 잊지 않는다. 더불어 한국교회와 신학계가 반성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새 관점에 대한 비평서가 그리 많지 않은 때에 이 책은 새 관점을 이해하고 분별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필자는 톰 라이트를 포함한 새 관점 학파의 논점을 살피면서 몇 가지 의문이 생겨 적어본다.

(1) 성경 주해에 애착을 가지는 톰 라이트가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을 제대로 이해했을까?”라는 의문이다. 그가 옛 관점으로 상정하여 비판한 루터의 경우 갈라디아서, 시편, 로마서 등을 오랫동안 교수한 성경 주해가다. 칼빈 역시 탁월한 성경주해가다. 그럼에도 만일 라이트가 교의학자 취급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주해서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또 하나의 유추의 함정에 빠지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된다. 그 예로 라이트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무게를 두는데, 만일 아담과의 언약을 간과한다면 거시적 언약체계는 균형을 잃게 된다.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언약체계는 아담의 행위언약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라이트는 16세기의 루터가 자신의 실존을 바울에 투사하여 칭의론을 왜곡시켰다고 비판했는데, 그 지적은 라이트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라이트가 왜 주해의 허점을 자주 노출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라는 틀을 고집하는지 그 실존적 이유가 궁금하다. 라이트는 1세기의 문헌을 통해 문맥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정작 바울의 소리는 자신의 주관적 틀에 경도된 실존적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3) 최근 새 관점에 대한 비평은 주로 교의학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 교의학계의 비평에 대해 새 관점을 따르는 성경신학자들의 반론이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교리문제와 관련되어 있어 쉽게 반박하지 않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학자로서의 바른 자세는 아니다. 성경신학자로서 반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 통합적 신학을 위한 겸손한 학자적 자세가 필요하다. 신학에는 여러 제분야가 있다. 구별되나 나뉘지 않는 양면성이 있다. 결국 신학은 서로의 협력과 긴장이 필요하다. 신학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하기에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개념이나 용어의 통일이 필요하다. 또한 모르면 배우는 자세 역시 필요하다. 그런데 학자의 자존심을 내세워 나 홀로 신학을 고집하며 서로 대화하지 않음으로 교회에 혼란과 분열을 조장한다면 그 역시 큰 잘못이다.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가 그 단적인 예다. 필요하다면 성경신학자라 해도 교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학자들 간에 대화하지 않는다면 그가 아무리 신약신학계에서 새 관점과는 노선을 달리 한다 해도 그 우산의 영향 아래 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