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길 목사의 이탈리아 여행 기행문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 만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2)

 

-이 글은 필자의 이탈리아 여행 기행문

중세 천년의 역사 궤적을 찾아서에서 발췌, 정리한 것이다-

 

글 순서

사보나롤라가 살았던 시대

사보나롤라가 찾은 도미니코 수도원

사보나롤라의 신앙과 사상

사보나롤라의 삶과 설교

사보나롤라의 개혁 이상

사보나롤라의 최후

마무리 글

 

사보나롤라의 신앙과 사상

사보나롤라는 어릴 때 할아버지 미켈레로부터 배운 성경 얘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교황이나 주교나 어떤 누구도 성경 말씀에 위배된 것을 가르칠 권리는 없다.’라고 한 할아버지의 교훈은 사보나롤라를 움직인 동력이라 말할 수 있다. 사보나롤라의 명성이 뜨게 된 것은 1490년 이후다. 그때까지 사보나롤라는 도미니코 수도회 설교가로서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었다. 1490년 사보나롤라는 당대 기독교 최고 지성인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1494)의 막후 영향에 힘입어 피렌체에 다시 입성했다. 피코는 볼로냐에서 교회법, 페라라에서 철학을 전공한 고매한 학자였다. 14916, 사보나롤라는 성 마르코 수도원 원장에 부임했다. 사보나롤라가 수도원에 들어간지 16년만의 경사였다. 그곳에서 약10년 동안 사보나롤라는 인간의 허영과 성직자의 사악함을 통분히 여기며 개혁 투쟁을 시작했다. 이 시기 사보나롤라의 개혁 표적은 알렉산더 6세 교황과 메디치 가문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들을 향한 사보나롤라의 비판의 혀에 재갈을 물리거나 끓는 용광로 같은 그의 입을 틀어막을 사람은 없었다. 그즈음 그의 설교는 종말에 맞춰졌다. 때는 피렌체공화국의 메디치 가문의 당대 최고 정치가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43세의 이른 나이에 죽고, 막강한 정치적 공백 기간에 사보나롤라가 피렌체 마르코 수도원 원장이 된 것이다. 혹자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당시 수도원 대부분의 경향이 그랬듯이 사보나롤라는 영성에 있어서 신비주의성향을 띄고 있었다. 사보나롤라는 로마 천주교의 교회관, 베드로의 교회 대표권을 제도적 권위로 인정했다. 동시에 성경의 하나님의 권위와 믿음으로 구원 얻는 구원관을 가졌다. 다만 스콜라철학의 범주에 갇힌 성경해석과 설교 방법은 후대 역사가들의 비판적 지적이 되고 있다. 사보나롤라의 내세관 역시 확실했다. 형장에서 형집행관 주교가 사보나롤라의 사제복을 벗기고 교수대 앞에서, ‘나는 그대를 전투적 지상의 교회와 승리의 천상교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노라.’는 임종선언을 할 때, 사보나롤라는 나는 전투적인 지상교회를 떠나갑니다. 그러나 승리의 천상교회로부터 격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그 교회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당신들이 지상 교회로부터는 나를 격리시킬 수 있으나 승리의 천상교회로부터는 나를 격리시킬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That is beyond your Power)라는 내세 확신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고백했다. 이런 사보나롤라의 내세 신앙이 결국 그 자신을 화형의 장작더미 불속으로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사보나롤라의 삶과 설교

산 마르코수도원 원장을 계기로 사보나롤라는 먼저 수도원 내부 개혁에 착수했다. 그의 개혁은 자신의 삶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청빈한 삶, 경건한 삶, 종말적 삶이 곧 그 시대를 향한 강한 메시지가 되었다. 사보나롤라는 검소한 삶을 넘어서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는 수도원에서 비교적 작은 방에 판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잤고, 옷은 거친 천으로 만든 것으로 입었고, 음식은 소량을 섭취했다. 이런 청빈의 삶은 볼로냐의 도미니코 수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공적 장소가 아닌 곳에서는 여성과의 만남을 자제했다.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호화로운 예복을 입고 금으로 된 성배’(聖杯, 성만찬에서 사용하는 잔)를 마신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이런 금욕적 개혁의 실천은 결국 산마르코 수도원생을 50명에서 230명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사보나롤라의 경건은 볼로냐 수도원에서부터 기도 생활로 시작되었다. 딱딱한 널빤지위에서 부패한 교회와 타락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아픈 마음으로 기도했다. 성경 강의와 설교, 공적 일정 이외 시간은 대부분 금식과 기도에 집중했다. 그는 보통 하루 5~6시간씩, 때로는 온밤을 새우면서 기도했다고 한다. 피렌체 시민들이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감화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도 생활을 통한 영적 동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보나롤라에게 기도는 하나님과의 연합이었다.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그는 설교하는 용기와 개혁의 용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그의 청빈한 삶과 경건이 반영된 신뢰와 생동감이 넘쳤다. 그는 볼로냐 수도원 시절부터 구약성경을 많이 읽으면서, 선지자들의 종말적이고 예언적인 설교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심판’, 죄에 대한 징벌’, ‘회개등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주로 사용한 설교 용어들이다.

당시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하나님의 자비와 회개에 초점이 맞춰졌고, 그의 삶과 일치하는 설교에 대한 피렌체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사보나롤라는 달변은 아니었지만, 피렌체 시민들은 그의 솔직한 설교를 신뢰하게 되었고, 일부 열성 지지자들은 심지어 당대의 선지자로 여기기도 했다. 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워지자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하나님의 심판종말에 대한 설교 강도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그의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 채찍을 들 것인데, 교회는 개혁될 것이지만 이탈리아가 먼저 임박한 징계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바로 그때,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Charles , 1470-1498)가 이탈리아 영유권 주장을 빌미로 피렌체를 침공했고, 메디치가는 도망쳤다. 이에 앞서 알렉산더 6세는 반프랑스 동맹 결성에 피렌체의 협조를 바랐으나 사보나롤라는 거절했다. 이것이 사보나롤라와 교황과의 불편한 관계로 발전하여 결국 죽기살기식의 끝장에 이른다. 사보나롤라는 샤를 8세의 피렌체 침공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 심판을 경고하신 성경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6:17)라는 본문을 적용하여 설교했다. 이 설교의 반향은 사보나롤라의 명성을 신장시키는데 크게 작용했다. 그러면서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시민들이여, 죄악의 음란에서 떠나십시오. 육체에서 떠나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설교로 호소하면서 피렌체 시민의 회개를 촉구했다. 그의 설교는 대부분 부도덕에 대한 경계와 헛된 영광, 사치와 허영, 그리고 쾌락에서 자유롭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피렌체 시민들이 사보나롤라에게 박수와 지지를 보낸 것은 그의 단순한 생활과 도덕적 양심을 찌르는 설교의 호소력 때문이었다. 그 결과 시민들은 기독교의 미덕과 생활 가치관을 회복하는 변화를 조금씩 보이기도 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사치품과 이교적 서적과 세속적 미를 묘사하는 여성 사진들을 자발적으로 가지고 와서 공개적으로 소각하기도 했다. 분명히 개혁이 실현되고 있었다. 사보나롤라는 권력과 부에 대한 강도 높은 설교를 했으나 루터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 도리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에 대하여는 방점을 두지는 못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거의 혁명적 단호함으로 교황과 부패한 시대를 뒤집어엎는 데 초점을 두었고,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 강조했다. 그는 당시 교황 알렉산더 6세를 사탄의 대표라는 말로 독설을 퍼부었다. 이를 지켜보던 교황은 14951016일 교황령을 통하여 사보나롤라에게 설교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교황의 훈령에 개의치 않았다.(계속)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