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데반 황 목사(그리스도보혈교회 담임)

1) 거짓 선지자

마지막 때의 가장 악한 현상 중에 하나는 거짓 선지자의 등장이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의 주된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감하거나 빼는 것이다. 이는 사탄의 전형적인 역사이다(3:1-4).

거짓 선지자에게서 한결같이 나타나는 뚜렷한 현상은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남용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셨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24:11),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24:24).

이 구절을 보면 거짓 선지자가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큰 표적과 기사이다. 심지어 택하신 자들까지도 큰 표적과 기사로 미혹할 것이다. 그러므로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한다고 해서 진리를 가르치는 선지자라고 믿으면 속게 된다. 큰 표적과 기사로 주의 참된 선지자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주의 말씀을 감하거나 더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순전하게 전하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거짓과 참을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지침이다.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는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예언을 제멋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참조, ??14:14; 27:15; 28:15; 13:9; 22:28).

특히 예레미야 239-39절을 보면 거짓 선지자의 특징들이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다.

거짓 선지자는 바알을 의지하고 예언한다. 거짓 선지자가 말하는 계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른적이 없는데도 예언을 한다. 이들은 지난 밤 꿈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의 간교함을 이루기 위하여 예언이라는 것으로 속인다. 몽사를 말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여호와께서 지난 밤에 나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라고 거짓말하는 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이들은 나의 이름을, 나의 권위를, 자신들의 거짓을 권위 있게 하기 위해 망녕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거짓 선지자들은 간교한 거짓말을 하면서 하나님께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 누구든지 직통 계시를 받거나 또는 꿈이든 환상이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자들은 전부 거짓 선지자이다.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성경66권을 통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 할 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18-9절에서 두 번이나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린도후서 1114절을 보면 사탄은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속여 사람을 유혹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탄의 역사는 사람의 지식이나 능력으로는 분간할 수 없다. 따라서 철저하게 성경으로 바르게 알고 있어야 성경을 왜곡하는 사탄의 음성을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의 등장은 말세의 가장 뚜렷한 현상이 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한국에만도 수천 수만의 거짓 선지자와 선생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한결 같은 공통점이 있다면 특별 직통 계시, 또는 예언의 은사를 받는다는 점이다. 점쟁이들처럼 매사에 예언을 받아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경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며 멸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언을 한다는 거짓 설교자들을 멀리하고 항상 성경으로 돌아와 하루에 한 장이라도 성경을 읽어야 할 것이다.

2) 거짓 설교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사사로이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는 거짓 설교이다. 사사로운 해석의 거짓 설교를 필자는 여섯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1)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인간의 의를 부추기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의 의를 부추기는 설교는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며 의지하게 하기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선행을 이루도록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교는 알미니안 사상에 기초한 설교로서 복음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인본주의적인 설교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야곱은 에서보다 세상에서 말하는 의로운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야곱은 살아계신 주 하나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살았고 에서는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나 주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순종으로 나타나는 바른 삶은 내 힘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함으로 가능하다. 이때 우리의 순종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서 나오는 순종으로서 순종 후에는 언제나 평강과 기쁨이 넘치도록 되어 있다, 인간의 의가 설 자리가 없다.

(2) 영원한 것이 아닌 없어지는 것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안녕과 부귀와 출세와 권력과 인기를 추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도록 하는 설교는 거짓 설교이다. 오히려 바른 설교는 모세처럼 세상의 것을 다 잃어도 영원한 것을 잡도록 격려하는 설교가 바른 믿음을 세우는 설교이다. 세례 요한은 인생의 안일을 구하기보다 영원한 것을 붙잡기 위하여 목 베임을 당하였다. 아벨은 믿음으로 인하여 가인에게 돌로 맞아 죽었다. 이들은 세상에서 보면 실패자요 모든 것을 잃은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영원한 것들을 얻은 자들이다.

(3)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의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힘이나, 자신의 정신력 또는 세뇌잠재 의식, 주문 등을 신앙이라고 오해시키는 가르침은 거짓 가르침이다. 적극적인 말을 많이 하면 복이 된다는 "믿음 신학," "형통 신학"등은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찬 가르침이다.

(4) 하나님이라는 막연한 존재에 대한 가르침, 순종하면 이 땅에서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 받는다는 인과응보적인 가르침은 결국 기독교를 타종교와 구별시키지 못하고 복음의 차원까지 이르지 못한 종교 다원화적인 도덕적 수준의 교훈으로서 초등학문과 율법주의에 속한 가르침이다. 이러한 교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으로 살아가게 하는 복음적인 가르침과 전혀 관계가 없다. 불행하게도 이 땅의 대부분의 교회가 어린아이에게 도덕을 가르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때 도덕적인 삶을 위해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보통 이 땅에서의 형통과 축복을 미끼로 삼는다. 이러한 가르침은 십자가의 도와 거리가 먼 설교로서 고난의 의미를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는 천박한 차원의 거짓 설교이다.

(5) 하나님의 주권 및 사탄의 역사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무한한 지혜 가운데 사탄의 역사를 허락하신다. 특히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뜻이 참으로 깊다. 그러나 싸구려 거짓 가르침들은 어려운 일이나 싫은 일, 아픔, , 실패 등이 임하면 전부 사탄의 역사로 치부한다. 그리고 성령을 부르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 자신이 싫어하는 모든 대상, 모든 액운, 불행한 사건 등을 제거하려고 한다.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찾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내가 잘되고 내가 안녕해야 한다는 이기적인 심보에서 사탄을 내어 쫓아야 한다는 거짓 가르침과 신속하게 연결된다. 이러한 가르침에 빠지면 너무나 쉽게 모든 문제의 주범을 자신의 죄성이 아닌 사탄에게 뒤집어 씌운다. 그래서 자신의 죄성을 수술 받으려고는 하지 않고 언제나 사탄을 제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광적으로 기도한다. 이러한 거짓 신앙은 온유함과 넉넉함이 없는 주술적, 마술적, 신비적 신앙의 삶을 살게 한다. 대부분의 이단 신학이 이러한 신비주의 계통에 빠져 있다.

(6) 초림과 재림의 불균형을 외치는 가르침들이 있다. 초림에 치우친 불균형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한 사건들이 이미 다 이루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재림에 대한 징조를 방관한다.

반면에 재림에 치우친 불균형한 가르침은 시대 징조에 얽매인 나머지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엄청난 의미를 망각하게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사랑이 식어지고 그 대신 장래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보려고 한다. 이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구실 하에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보다 도리어 스스로 율법을 지키려는 반 복음적인 자세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그 결국은 실패와 낙망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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