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이 그 의미를 결정하도록 노력한 흔적이 많다.

▲ 김형렬 목사 (호주 울릉공한인장로교회 담임, 코닷 연구위원)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최근 바울 신학 논쟁의 핵심 주제가 되고 있는 칭의와 관련한 내용으로 존 파이퍼의 비판에 대한 톰 라이트의 답변이다. E.P. Sanders를 비롯한 새 관점 학파는 1세기의 유대교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의 칭의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종교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법정적 칭의를 소유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유대인들이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질 최종적 칭의를 소망하면서 율법을 그 최종적 구원의 표지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존 파이퍼는 이러한 새 관점이 전통적 가르침과는 다르며 그로 인해 복음의 위대한 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 점을 지적 했다. 이에 대하여 톰 라이트는 본 서를 통해 칭의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다 차원적으로 소개하면서 옛 관점이 간과하고 있는 성경 이해의 다양한 면들을 밝힌다. 또한 자신의 새 관점이 옛 관점과 차이가 있으나 두 관점 모두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상호 보완적이기를 기대하고, 나아가 새 관점이 가진 측면을 통해 성경의 본질이 더욱 더 잘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본 서는 크게 1부 개관과 2부 주해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네 개의 장으로 구성하여 1장은 칭의의 정의와 중요성, 2장은 본문 주해의 우선성, 3장은 2성전 시대의 중요 개념인 언약, 율법, 그리고 법정 개념에 대하여, 마지막 4장은 칭의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소개하고 있다. 2부 주해는 3개의 장으로 구성하여 5장 갈라디아서, 6장 빌립보서, 고린도서, 에베소서, 그리고 7장 로마서 주해를 다룬다. 지면의 한계성으로 인해 모든 주해는 칭의와 관련된 주요한 개념이 있는 부분에만 집중하고 있다.

 

▲ 톰 라이트 (Nicholas Thomas Wright)

1부 개관

1장에서 톰 라이트는 자신의 칭의 개념 이해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서 그동안 옛 관점을 중심으로 한 개인과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온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 종교 개혁 이후 지금까지 성경을 개인의 구원이라는 협소한 관점에서 읽어오던 데서 벗어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큰 주제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칭의에 대한 많은 논문들이 사실은 바울의 핵심 사상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그와 맺으신 언약, 그리스도와의 연합, 부활과 새 창조,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 역사를 통해 지속된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계획이라는 의미에서 종말론, 그리고 성령과 기독교적 인격의 형성 등이 무시되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p.41). 특히 바울의 구약 인용이 단순한 구절 인용이 아니라 그 구절이 속한 전체 문맥 안에서의 인용임이 간과되었다. 또한 바울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단일한 연속된 내러티브로서 이스라엘과 전 세계에 대한 이해가 존재한다는 점이 무시되어 왔다는 것이다. 바울에게서 칭의란 전 세계를 위한-아브라함을 통한-단일한 구원 계획이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메시아 안에서 열매 맺는 모습인 것이다(p.46).

 

2 교전 수칙에서 그는 바울 신학에 대한 모든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 주해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라이트에게 그동안 강조한 전가의 의16, 17세기 종교 개혁의 시대가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이지만 성경 그 자체에 대한 질문과 답변은 아니다. 라이트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 그 자체의 맥락과 주장들이다. 그는 바울에게서 전가의 의의 개념을 찾을 수는 있으나 본문의 구절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으며(마이클 버드), 바울은 전가의 의를 노골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제임스 패커)는 주장을 인용한다. , ‘전가의 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 본문이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경 본문이 말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이트에게 그것은 바로 주해로서, 이는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성경 본문 안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성경이 기록된 당시인 1세기의 자료들을 활용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아가 본문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본문의 저자 자신이어야 한다. 모든 역사적 도구를 총 동원하여 단어의 의미를 찾고 본문의 그 자체의 맥락을 찾아 본문이 대답하게 하는 주해야 말로 진정한 교전 수칙이 되는 것이다.

 

3에서는 1세기 유대교 이해를 제안한다. 1세기 유대인들은 오늘날 서구 교회의 전통 안에 있는 문제를 고민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자기 방식으로 이해했다. 이런 맥락에서 라이트는 1세기 유대교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 째 1세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시초로부터 예언자들의 시대를 거쳐 앞으로 올 구원의 절정의 순간까지를 이어가는 연속되는 내러티브 안에서 살고 있다고 인식했다. 또한 1세기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다니엘 9장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내러티브가 유배상태를 가로지르는 긴 통로 안에 있다고 간주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유배시대를 주신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여전히 유배를 사는 자신들은 악하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역사 이해 안에서는 중요한 것들이 있다. 먼저 다니엘 9장의 기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다. 이 기도 안에서 다니엘은 거룩한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그 분의 의로우심을 선언하고, 그 의의 실현을 요청하고 있다. 이는 분명 법정개념이다. 더하여 다니엘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덕스러운 행동이라기보다는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행동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이전부터 행동해 오셨고, 지금도 그렇게 행동하셔야 한다(이 지점이 법정언약이 만나는 지점이다). 의로우신 재판관 앞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의 의’, , 언약적 약속의 성취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또한 바울 신학의 특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고리이다. ,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자신의 언약을 성취하시기를 간구하는 바울 신학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하나님의 의와 언약의 관계에 기초하여 라이트는 1세기 당시의 율법의 위치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그의 언약의 말씀을 구원받은 백성에게 주셨다는 카슨의 언급이 샌더스의 결론과 유사함을 강조한다. , 2성전 시대의 유대교인들은 그동안 해석해왔던 대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한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자신들이 이미 의를 얻은 백성임을 표현하고 나타내려고 했던 사람들이라는 주장이 율법의 참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1세기 유대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자신들의 유배를 종식시킴으로 과거로부터 진행되어 오던 구원의 언약이 자신들을 통해 완성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율법은 언약 백성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종말적 구원의 백성의 표지였던 것이다.

 

4장에서 라이트는 칭의의 정의들과 난제들을 소개한다. 우선 그는 맥그라스의 칭의에 대한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맥그라스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설명하는 많은 개념 가운데 하나인 칭의 교리가 교회사 속에서 성경적 기원과는 아주 동떨어진 의미를 발달시켰으며, 나아가 현재의 칭의 교리는 바울이 말한 내용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그와 함께 라이트는 칭의라는 단어가 너무 많고 복잡한 성경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점도 지적한다. 칭의 이해의 복잡성을 언급한 것이다.

그래서 라이트는 바울의 방식을 따라 에 대한 설명을 통해 칭의를 이해한다. 우선 그는 라는 단어가 모두가 다 법정적인 용어였음을 강조한다. 이는 법정에서 누군가 손을 들어 주었을 때 가지는 상태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에 의해 의롭게 만들다로 이해되면서 인격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을 포함하여 의의 이식을 의미하는 것처럼 사용되었음을 지적하면서 라이트는 칭의라는 행위는 상태의 변화일 뿐 인격의 변화는 아님을 역설한다(p. 119).

동시에 라이트는 언약적 언어임을 강조한다. 로마서가 인용하는 창세기 15장은 아브라함과의 언약 체결 장면이며, 신명기 30장은 유배기 이후의 언약 갱신을 약속하는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의 가족을 통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계획, 즉 언약과 관련이 된다. 이는 구약시대나 제 2성전 시대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브라함 안에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부름을 받은 자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비록 실패하여 깨어졌지만 아브라함을 통한 이 언약이 신명기를 통해 다시 자신들에게 갱신될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또한 라이트는 종말적 차원을 강조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단일 목적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고, 그것이 메시아 예수님 안에서 이미 개시되었다고 믿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라이트는 바울은 쿰란 종파들과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파악한다. , ‘지금-그리고 아직은 아닌시기가 이미 도래 되었고, 예수님의 교회는 옛 시대와 새 시대, 양쪽 모두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은 잠정적인 시기를 사는 교회가 마지막 날에 임할 심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혹은 행위들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바울의 반복되는 언급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타난다. 라이트는 이 질문을 공정하게 풀어가기 위해 칭의에 이 모든 설명을 다 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칭의를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미래의 판결을 현재에 어떻게 선취하게 되는 지를 보기 위해 언약이 지닌 또 하나의 차원인 기독론에 그것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라이트는 의 마지막 차원으로 7중의 메시아론을 언급한다. 먼저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장구한 역사를 정해진 목적으로 이루어 가는 인물로 예수님 안에서 그의 모든 역할은 새롭게 재 정의된다. 따라서 메시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집결되는 인물이다(2-4장 이해의 핵심 열쇠). 셋째로 메시아는 하나님의 단일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충실하지 못했던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순종하신 분이시다(3:21-22, 피스티스 크리스투메시아의 신실함으로 번역). 넷째로 메시아는 자기 백성을 대신하며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을 직접 감당하심으로 우리의 대표가 되심으로 우리의 대속이 되실 수 있었다(고후 5:21, 8:3). 다섯째로 메시아는 부활을 통하여 그 자신이 죄인으로 선고받은 법정에서 칭의를 획득하신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전 인류와 창조의 회복의 시작 시대를 말한다. 여섯째로 메시아는 아들의 영, 메시아의 영을 그 자손에게 부어주셔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이 땅에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메시야는 심판의 주인이시다. 바로 이 메시아의 7중의 사역 안에서 종말의 백성들은 행위들에 따라 의롭게 심판 받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2부 주해

5장 갈라디아서 주해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식탁을 피하는 것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시작한 갈라디아서의 내용은 교회의 의로움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신실함을 통해 얻는 것임을 강조한다. 라이트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진정한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신실하심 안에서, 믿음을 통해 그 신실함에 포함된 교회가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되는 것이라고 주해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다고 하신 것과 같이 믿는 자는 메시아 안에서 그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의 신분을 얻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율법으로 돌아가 이방인 식사를 거절하게 된다면 메시아를 믿는 믿음을 거절한 것이며, 결국 메시아에게서 끊어지게 되고, 구원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지막 날에 다시 얻게 될 영광된 의를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믿음을 통해 의의 소망을 가지고 메시아 안에서 이미 선취된 의를 붙들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주해에서 라이트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의의 전가를 얻게 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부정하고,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신실성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 안에서 믿음을 통해 새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라이트에게 있어 바울은 유대교를 율법을 통해 구원 얻는 길을 찾는 종교로 이해하는 이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을 특징짓는 율법의 표지들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실성 안에 포함되기 위한 믿음을 표지로 붙들 것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6

1) 빌립보서 3장 주해/ 갈라디아서 219, 20절의 진술과 밀접함

: 바울은 율법 아래에서 자신의 삶이 지향했었지만 결코 그 안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진정한 정체성을 메시아 안에서 발견하고는 빌립보 교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빌립보서 3장 주해에서 라이트는 세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첫째는 바울 당시에 유대교 안에는 다양한 율법의 표지가 있었다는 점이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의 자신의 표지들을 배설물로 버린다고 했는데, 이것들은 당시 바리새파가 가진 의의 백성으로서의 표지들에 해당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유대주의 안에 있는 율법은 도덕적 완전성이라기보다는 이러한 구원받은 자로서의 표지들을 의미한다.

이어서 라이트는 바울이 이러한 율법적 표지들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한다. , 바울은 이전 바리새인 시절의 표지를 버리고, 새 시대의 표지인 메시아 안에 소망을 둔다는 것이다. 교회는 메시아와의 새로운 관계 안에서 의의 신분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바울이 이미 얻었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최종적 완성을 기대하는 긴장이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둔다. 이미 얻은 칭의에 분명한 확신을 가지지만 최종적 승리는 여전히 투쟁의 상태로 남아 있어 212절에서 언급한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야할 일이 남아 있다고 보고 있음에 주목한다.

2) 고린도 후서 521절 이해

: 전가의 의와 관련하여 거룩한 교환으로 해석하는 본문이지만 사실 이 부분은 바울의 사도적 사역을 언급하는 내용으로 라이트는 이해한다.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에서 다룰 것이지만, 이 절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메시아 예수 안에서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바울을 그 언약의 일꾼, 새 창조의 일꾼으로 삼으셨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긴 주장의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바울 자신의 사도권을 다루는 본문이지 개인의 의의 전가를 다루는 부분이 아니라고 주해한다.

3) 에베소서 주석

에베소서는 메시아 예수님이 중심이심을 설명하는 서신이다. 비록 옛 관점(2:1-10)과 새 관점(2:11-22)이 같이 존재하고 있으나, 3장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이라는 새 관점이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그들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신호임을 강조한다. 라이트의 구원론은 결국 메시아 안에서 세워진 새 공동체와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7장 로마서 주해

로마서에서 바울은 먼저 1:3-5에서 복음을 설명하고 1:6, 17절에서는 복음의 효력을 서술한다. 이 과정에서 하박국 2:4절을 인용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에 의해 구분되고, 믿음을 통해 생명을 찾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어지는 1:18-3:20 (1:17, 3:21절의 하나님의 의가 감싸는 부분)은 로마서의 서론으로서 최후의 심판의 그림을 보여준다. 2:1-16절은 자만에 찬 이교도나 자신감에 쌓인 방관적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의 본문이다. 이 최후 심판의 그림에서는 최종적 심판과 현재의 판결이 메시아 안에서 동일한 결과를 맺을 것임을 보여주며, 특별히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음에 대한 강조가 나타난다. 유대인들의 경우는 스스로 자신들 안에 주어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었으나(2:17-20), 당시 유대인들은 여전히 유배 생활의 연장 속에 있는 실패자들이었으며(2:21-24), 에스겔 36, 이사야 52장의 희망 안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었다(2:25-29). 율법을 맡은 자들로서 유익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결국 그 의무에 실패한 자들이 되고 말았다(3:1-8). 그러므로 결국 모든 인간은 구원에 실패하였으며 다시 한 번 그들을 향한 기소가 진행이 된다(3:9-20/1:16-2:16절까지의 반복).

이런 형편의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라이트에게 하나님의 의는 정의라는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단일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이다(2:17-3:18).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은 메시아의 신실성(피스티스 크리스투)에 있다.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이 메시아 예수의 신실성으로 나타남으로 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함을 통해 를 얻게 되는 것이다(3:21-31). 물론 이 는 현재적 의로서 종말의 날에 선언될 판결을 예기하는 지금 현재의 판결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맺으신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를 얻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태에서 아들을 얻을 것을 믿는 믿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을 의인으로 부르실 것,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이 의 근원이 된다. 또한 그것은 단순한 아브라함 모델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맺으신 그 약속, 즉 아브라함을 통한 온 열방을 위한 단일 구원 계획의 성취이다. 유대인 메시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을 통한 온 열방 구원 계획이 마침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선언되지 않은 판결에 대한 진정한 선취로서 얻은 칭의는 어떻게 율법을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최종 판결과 연결이 되는가? 우선 5장에서 바울은 칭의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를 중요한 이유로 제시한다. 6장에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로 설명이 된다. 물론 그리스도의 순종은 도덕적 올바름을 얻기 위한 순종이 아니라 고난 받는 종의 순종이다. 결국 복음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8139은 하나의 궤를 그리며 피조물의 갱신과 성령의 거주를 강조하고 있다. 성령의 대리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갱신되고 재구성됨을 보인다. 또한 8:18-26은 우리의 구원은 창조세계로부터가 아니라 창조세계를 위한 것으로, 이 위대한 구출 작전은 만물의 갱신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개시되었고, 벌써 성령을 통하여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으로 최종적 칭의를 확고하게 하는 기반이 된다. 결론적으로 이신칭의는 현재에 대한 것이며 새로운 창조의 마지막 순간을 바라보고 찬양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라이트는 성령님의 사역을 강조함으로서 자신의 신학을 삼위일체 안에서 정리하고 있다.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는 9-11, 특히 9:30-10:13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이방인들이 의를 구하여 얻은 것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율법을 구하여 실패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는 유대인들이 율법의 특징을 민족적 정체성에서만 찾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두신 거치는 바위들이기도 했다(9:30-33). 이러한 실패의 결과로 유대인들은 여전히 종식되지 않은 유배기를 보내고 있으나 신명기 30장 안에서 이 유배기 이후에 올 언약 갱신에 대한 소망 속에서 살아간다. 유대인의 민족주의는 비록 거치는 바위로 그들을 실패하게 했지만, 이제 메시아 안에서 유배기는 종식을 고하게 된다(10:4). 그 결과 언약 갱신이 이루어지게 되고, 믿음의 의를 통해 믿음에 기초한 언약 갱신의 메시지 안에서 율법을 행하는 새로운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10:1-13). 또한 이러한 갱신의 삶에는 새로운 성령의 부어지심이 함께 연결되어 나타남으로 율법을 행함이 나타나게 된다(2).

 

평가

1. 성경 주해를 중요한 내용으로 다루었고, 1세기의 역사적 정황 인식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성경 본문의 맥락을 파악하고자 애썼고, 본문이 그 의미를 결정하도록 노력한 흔적이 많다. 신약 본문들을 이해하기 위해 인용한 구약의 구절들을 구약 본문의 문맥에서 이해한 것도 주해를 강화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2. 칭의를 현재의 사건으로, 최종적 판결은 미래에 완성될 일로 구분하여 성취된 종말의 구조를 잘 보이고 있으며, 행함을 통한 최종적 판결을 성령론의 관점에서, 신명기 언약 갱신의 소망 속에서 잘 드러내고 있어 성경 본문의 혼란스러운 부분들을 신구약 전체 문맥에서 잘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1세기 유대교의 정황 이해를 위해 많이 노력한 것으로 보이며 율법의 위치나 역할들을 잘 설정함으로써 율법의 의로운 기능들이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음을 잘 보이고 있다.

4. 개관과 주해가 동일 주제를 반복하여 다룸으로써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어 설명되어 있다. 이해를 위해서 필요하기도 하지만 혼란을 가져오는 부분이기도 하다.

5. ‘법정적 의전가의 의에 대한 이해에서 법정적 의로써 충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심도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메시아 이해 안에서 속량참여를 강조하는 것이 전가의 의가 담고 있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듯하지만, 여전히 반대 의견들도 적지 않음으로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좀 더 진행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6. 최종적 판결을 기다리며 언약 갱신의 예언 아래에서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해 행위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구원의 서정에서 성화의 내용과 관련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용어 정리는 전혀 언급되거나 시도되지 않는다. 조직신학과의 연계적 논의가 필요해 보이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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