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길 목사의 이탈리아 여행 기행문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 만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이 글은 필자의 이탈리아 여행 기행문

중세 천년의 역사 궤적을 찾아서에서 발췌, 정리한 것이다-

 

글 순서

 

사보나롤라가 살았던 시대

사보나롤라가 찾은 도미니코 수도원

사보나롤라의 신앙과 사상

사보나롤라의 삶과 설교

사보나롤라의 개혁 이상

사보나롤라의 최후

마무리 글

 

사보나롤라의 개혁 이상

 

개혁자로 알려진 사보나롤라는 전형적인 중세 로마 천주교의 신앙과 신학체계에서 변한 것이 없다. 로마 천주교 기준에서 볼 때 사보나롤라는 정통 로마 천주교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1493년 이후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한층 공격적이었다. 그는 설교에서 교회 생활의 남용, 성직자들의 부도덕, 교황청 원로와 교황관을 쓴 알렉산더 6, 왕자와 주변 가신들과 메디치가의 부패를 표적으로 그들의 교회의 악사회의 악을 싸잡아 공격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적 경고를 보냈다. 그의 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정치적으로 피렌체에 신정’(神政)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정치와 사회적 기초로 삼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깨끗한 정부’, ‘개인보다 공익 복지를 우선하는 사회’, ‘정치범 특사’, ‘베네치아공화국의 의회제를 모델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교회 개혁에서 시작된 개혁이 정치 혁명에 경도된 결과로서, 그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그의 개혁 이상은 사실상 1494-1498년까지, 4년 간 피렌체의 신정’(神政) 체제의 실권자(국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로 정점을 찍었다. 사보나롤라는 당대의 교회와 사회가 도덕적 부패의 한계를 넘었다고 보고, 교회와 사회의 도덕적 개혁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래서 사보나롤라를 예언적 설교가, 도덕적 개혁가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당시 교회와 사회가 부패한 근본 원인을 지적하지 못했다. 당시 교회가 부패한 것은 근원적으로 교리적 오류였기 때문이고,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은 가치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로마 천주교의 교리적 오류와 비성경적인 제도를 지적하지 않았고, 다만 도덕적 부패에 대해서만 개혁을 외쳤다. 그래서 14세기 중세 유럽에서 개혁의 샛별로 빛난 영국의 위클리프(Wycliffe, c.1320-1384), 체코 프라하대학을 중심으로 보헤미아에서 개혁을 시도한 존 후스(John Hus, c.1369-1415), 그리고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당 정문에 95개조를 내건 개혁과는 차이가 있다는 일부의 견해도 있다. 사보나롤라는 로마 천주교와 피렌체 시민들의 도덕적 개혁을 외쳤다. 다만 피렌체 시민들은 개혁을 주도하면서도 직접 국정에 참여하거나 관여하지는 않은 사보나롤라의 절제된 인격을 더 존경하고 신뢰했을 것이다.

 

사보나롤라의 최후

피렌체의 시뇨리아광장에 서면다비드의 미켈란젤로, 밀라노 대성당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군주론의 마키아벨리,데카메론의 보카치오,천국의 문기베르티, 아테네 학당의 라파엘로 산치오 등 르네상스의 대표적 이탈리아 작가들과 그들의 걸작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시뇨리아 광장에서 사보나롤라의 흔적은 이들 르네상스 예술품 정글 속에 깊숙이 묻혀있다. 교황의 설교 금지령이 하명된 어느 날 교황의 밀사가 사보나롤라를 찾았다. 밀사는 추기경 자리를 가지고 사보나롤라를 회유하면서, 더 이상 교황 비난을 자제할 것을 제의했다. 이 제의에 대한 사보나롤라의 반응은 단호했다. 1496820일 사보나놀라는 설교 중에서 내가 쓰고 싶은 유일한 붉은 모자는 순교자의 피가 묻은 모자입니다. 나는 모자도 주교관도, 그 어느 것도 원치 않습니다. (생략)순교의 붉은색 모자, 피의 모자 그것만을 원합니다.’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고 한다. 교황은 더 이상 사보나롤라에게 기대할 것이 없음을 확인하고, 149755일 교황은 사보나롤라를 파문(破門)했다. 파문은 로마 천주교 공동체에서 제외시키는, 교회가 시행하는 가장 무거운 벌이다. 이에 앞서 사보나롤라는 1495625일과 또 한 차례의 로마 교황의 소환 통첩을 받고 두 번 다 거절했다. 교황의 파문이 있은 후, 619일 사보나롤라는 파문에 대하여라는 공개 서한을 통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의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1498522, 사보나롤라는 다른 두 지지자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다음 날 23, 시뇨리아 광장 교수대에서 공개 처형이 예정돼 있었다.

1498523일 아침, 피렌체 시민들이 시뇨리아 광장에 속속 모여들었다. 광장에는 미리 준비된 교수대가 단위에 설치되었고, 육중한 빔에는 세 가닥의 밧줄이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이윽고 사보나롤라와 다른 두 지지자가 먼저 발과 손이 묶인 채로 교수대에 섰다. 그 때 한 사제가 사보나롤라에게 다가서면서 다가오는 순교에 대한 생각이 어떠냐라고 물었고, 사보나롤라는 주님은 나를 위해 더 많은 고초를 당하셨습니다’(The Lord has suffered as much for me)라고 대답했다. 이 한 마디 말이 사보나롤라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최후로 기도했다. ‘오 나의 주님, 나의 죄악을 수천 번 용서하셨습니다. 나는 자신의 의로움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당신의 자비를 의지합니다.’(O Lord, a thousand times have you wiped out my iniquity. I do not rely on my own justification, but on thy mercy). 사보나롤라는 믿음의 구원을 믿었다. 그리고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보나롤라는 형집행에 앞서 모진 고문을 당할 때 다윗이 밧세바에게 범한 죄를 용서받은 후의 시편 제32편과 제51편을 명상했다고 한다. 이 시편은 참회록을 쓴 어거스틴과 개혁자 마틴 루터가 좋아한 시로 알려지고 있다. 이어서 사보나롤라는 두 지지자 사이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자기의 밧줄에 다가섰다. 집행관이 사형을 집행하자 사보나롤라는 그날 오전 10시경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마흔 다섯. 이렇게 사보나롤라는 다른 두 사람의 도미니코 사제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다시 화형당한 후 그들의 분골은 아르노 강에 뿌려졌다. 16세기 독일의 개혁자 루터는 사보나롤라를 개혁의 선구자’(forerunner of the Reformation)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사보나롤라가 시뇨리아 광장에서 처형된지 384년 후, 1882년 피렌체 시는 시 창설 500주년을 맞아 사보나롤라가 처형된 장소 가까운 곳에 그의 동상을 세워 그를 기념했다. 동상은 도미니코 수도사 제복에 두건을 쓴 모습, 왼손은 사자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오른손은 십자가를 잡고 위를 쳐다보는 모습이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1901522일 피렌체 시는 사보나롤라가 처형당한 그 자리에 다시 금메달을 상징하는 청동기념 메달을 광장 바닥에 보도블록처럼 제작 헌정하여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1498523, 이곳에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수도사가 도미니코 수도사 및 실베스트로 수도사와 함께, 부당한 판결로 교수형을 받은 뒤 화형에 처해졌다. 4세기 후 추모의 뜻을 담아 이 기념비를 세운다.

현재 그곳은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베키오 궁전 좌측넵튠 분수대(Fountain of Neptune) 앞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필자는 그곳에 서서 사보나롤라의 개혁 용기와 피맺힌 절규의 설교를 더듬어보았다.

 

마무리 글

이탈리아반도는 다시 한 번 여행하고 싶은 곳이다.

밀라노, 아시시, 개혁자 루터가 로마 순례 중 무릎으로 기어오르다가 오직 믿음이라는 말을 외치며 계단을 뛰어내려왔던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앞의 스칼라산타(Scala Santa) 계단,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마지막 생애(AD 67)를 앞두고 수감되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마메트리노’(Mametrino) 감옥, 그곳은 포로로마노(Foro Romano)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한다. ‘마메트리노감옥의 옛날 이름은 툴리아눔’(Tullianum) 감옥, 혹자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이 감옥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어쨌든 이 중요한 곳들을 미처 닿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보나롤라가 마지막 섰던 시뇨리아 광장에서 그의 흔적을 마주한 것은 소득중의 소득이다.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필자와 가족들에게 남긴 교훈 역시 값진 선물이라고 생각된다. 1521417, 보름스회의(the Diet of Worms)에 참석한 마틴 루터의 의연하고도 확신에 찬 개혁자의 모습을 이 땅에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동료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보름스 지붕위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마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곳에 가겠다.’라고 하면서 참석을 강행한 루터의 개혁 의지를 이 땅에서 다시 만나보고 싶다. 회의는 루터가 성경에 근거하여 기록한 문서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고, 루터는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라는 말로 철회를 거부했다. 이 장면을 영국의 역사 평론가 토마스 칼라일(1791-1881)유럽 역사상 최대의 장면이며, ‘인류의 근대 역사에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위대한 장면과 순간을 이땅에서, 이 시대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사보나롤라가 살았던 그 시대의 교회의 악과 사회의 악이 이 땅 곳곳에 팽대해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오늘 이 땅의 시뇨리아 광장을 생각해 본다. 광화문일까? 서울광장일까? 누가 순교자의 피 묻은 모자를 쓰려고 저 광장에 나설까? 르네상스의 화려한 옷을 입고 세속에 취했던 중세 말기의 현상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재연(再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끝)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