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잘 나가는 가난한 목사아내입니다.

기독교 NGO! ‘교회 없고’ ‘교인 없고’ ‘헌금 없는곳입니다. 모든 일을 자급자족해야 합니다. 봉사자도 없어 알바 써야만 합니다.

남편과 저의 책 판매와 강의수익 전액, 집까지 연구소 운영비로 바쳐집니다. 6남매의 장남인 송길원과 결혼해 시동생 5명을 모시고(?) 신혼을 보냈습니다. 다들 시집가고 장가보내니 고생했다며 시부모님이 집한 채 장만해주셨습니다. 시골학교 교장선생님이셨던 두 분이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평생 모은 돈으로 말입니다. 그 집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한평생 집 없이 살고 있습니다. 연구소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며 사찰이자 관리인으로 지내다 지금은 곰팡이 냄새 풍기는 임시숙소 판넬 집에 산 지 1년이 넘어섰습니다. 작년 겨울에 수도가 터져 며칠 물 없이 살았습니다. 가끔 전기도 나가 원시시대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주일날, 교회 강의하러 가면 묻습니다. ‘혼자 오세요?’ ‘수행하는 사람 없어요?’ 없습니다. 혼자 갑니다. 스포티지가 있을 땐 그나마 다행입니다. 남편은 12년 째 쓰고 있는 스타렉스(봉고)몰고 갑니다. 책 판매 도와주려 나도 따라 나서면 영락없는 계란장사 부부입니다.

계란 사세요, 계란! 싱싱한 계란이 왔어요!’ 해놓곤 농담합니다. ‘책 사세요. ! 막 나온 따끈따끈한 책 사세요.’ 마주보며 웃습니다. 그 서글픈 웃음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도네이션 받으려다 거절당하는 일은 예사 일. 수치와 수모까지 당하는 일은 일상입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나를 위해서는 이 짓 안 해! 그러나 하이패밀리를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다리 사이를 지나가라 해도 할 수 있어. 모욕이 모욕으로 존재하려면 모욕당하는 사람이 있어야 해. 나는 한 번도 모욕당했다고 느낀 적이 없어!”

지금도 이 말을 기억하면 눈물이 납니다.

양평 건축 시작하면서부터는 단 한 푼도 자신을 위해, 우리를 위해 쓰지 않습니다. 다 떨어진 양복에, 가방에, 신발에, 강의차 가는 여행도 몇 번이고 갈아타며 병원입원도 8인실이었습니다. 피똥을 싸고는 대장 내시경을 하는데 7만 원 아끼겠다고 비수면을 하다가 아파 죽을 뻔 했다는 소리에 그냥 울었습니다.

그렇게 잘 나가는남편과 살아온 지 32, 하이패밀리는 내년이면 25주년을 맞이합니다.

마음 아픈 한 영혼, 무너져가는 한 가정위해 한 길 달려왔습니다. 숙박이 안 되니 매번 적자가 납니다. 자주 할 수도 없습니다. 러빙유 스텝들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걸 지켜보던 남편이 결단했습니다. ‘해 보자그렇게 한 푼도 없으면서 시작된 건축입니다. 방해꾼 권사(C교회)가 얼마나 악독하게 굴던지 끝내 재판까지 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남편이랑 청란교회에서 6개월을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건축입니다.

▲ 원장님 가발 값입니다. 러빙유 센터 건립에 사용해 주세요. 진작 헌금하고 싶었는데... 건축중인데다 어머니 암 투병에 나까지 이러니 도통 여유가 없어서... 라는 사연과 함께 후원금을 보내온 배태성 사모

며칠 전에는 윤신애 사모가 40만원을 도네이션했습니다. 개척교회라 전화비를 못내 전화가 끊어진지 오래입니다.

원장님, 하혈이 계속 되어 검사해야 하는데 검사안하고 그 돈 보낼게요. 받은 은혜 생각하면..” 며칠 후 또 문자가 왔습니다. “원장님, 검사 안 해도 되요. 하혈이 멈췄어요.”

그 돈을 받아들고 통곡했습니다.

, 하나님이 일하시는구나!”

부자였다면 절대 경험하지 못할 기적의 감동 스토리를 매번 목도합니다. 돈은 없지만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 주며 사랑 나누는 사랑하는 사람들!!!

이제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 나는 잘나가는 부자 목사 아내다!”

그래도 지폐에 자기 얼굴 새겨 넣고 돈 찍어대는 꿈꾸는 남편 보면 돈에도 부자면 더 좋겠다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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