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6년 참빛교회 중직자 세미나에서 발표한 소논문이다.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어서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알고 게재한다. -편집부-

 

들어가는 말

▲ 권경호 목사(Ph.D, 부평교회 원로)

우리는 수도 없이 역사(歷史, history)라는 말과 정체성(正體性, identity)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정체성은 어떤 존재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기 내부에서 일관된 동질성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본질적 특성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다 의미한다. 한 존재가 형성된 역사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왜 중요하며 어떤 관계가 있는가?

 

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歷史)는 한자로 (지낼 역) (역사 사)가 된다. 역사는 인간이 지내온 세월 또는 그 지내온 세월에 대한 기록을 의미한다. 대부분 역사는 과거의 사실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의 사실이라는 의미에서 끝내지 않는다. 역사는 인간이 지내온 세월을 의미한다. 역사는 일반적으로 첫째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 둘째 과거 사건에 대한 기록, 셋째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첫째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은 과거의 인물, 사건과 사실들이 관계되어 있다. 하지만 과거의 모든 인간과 사실을 역사로 삼지 않는다. 과거의 인간, 사실 가운데 사회에 영향을 끼친 인물, 사건을 역사로 삼는다. 개인적인 경험이 아닌 집단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역사적과거로 택한다.

무엇이 역사가 되는가?: 에드워드 카(E. H Carr)는 과거의 사건들이 역사가 되는 열쇠는 역사가들이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매 순간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역사가들이 의견을 제시하지만 결국 그것은 파헤쳐 검증이 되고 그것을 지지하는 보증인이 필요하다. 역사가는 사료(史料)를 통하여 역사를 연구한다. 역사학에서 사료는 근본적인 자료가 된다. 만일 사료가 없다면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료를 통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관련된 사료들을 수집한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다른 자료들을 통해 연구하고 검증된 후에 역사가 된다. 야사가 역사가 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많은 사건들이 역사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증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야(伽耶)국을 불교와 기독교 연합 국가(는 석가, 耶蘇, 즉 예수)였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재야 사학자들이 있지만 그것은 증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로 인정받지 못한다. 오늘 고신에 대한 많은 설익은 연구들이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연구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증명되지 못한 이론을 섣불리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역사는 개관적인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도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觀點)”일 수 있다. 이것을 역사관(歷史觀)이라고 한다. 영국의 역사가 배러 클러프는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비록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엄격히 말하면 결코 사실이 그것이 아니라 널리 승인된 일련의 판단들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역시 정답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관점이 역사적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의 사실에 대해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록하고 연구하는 사람의 역사관(歷史觀)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가들도 사람이기에 역사적 발전 과정의 틀을 벗어날 수 없으며 사회집단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사고와 관심이 과거에 반영이 된다. 또한 현재의 요구와 기준에 따라서 가치와 인식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오늘 한국 근현대사 이론이 극과 극을 달리는 것은 역사관의 문제이다. 오늘의 한국사학계는 진보주의 학자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민중사관(民衆史觀)적 입장, 이것은 결국 주체(主體) 역사관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좌파적인 입장이 강할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에게는 민중사관이나 민족사관(대륙사관 포함)이 굉장히 매력적일 수 있지만 우리 신자들은 기독교 역사관, 성경적 역사관(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나라, 구속사적 역사)을 가지고 역사를 보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사건들을 그 당시의 맥락에서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후일의 관점에만 집착하면 그 당시의 삶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가 오가는 다리역할을 한다. 역사가가 역사를 기록하기 위하여 과거와 소통을 할 줄 알아야한다. 즉 자신이 과거의 사람이 되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가가 과거와의 소통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신의 역사를 살피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에드워드 카는 역사는 현재가 과거와 소통하는 것이라고 했다. 역사는 인간이 지내온 세월을 의미한다. 그러나 과거-현재-미래 모두 역사가 된다. 만일 현재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면 과거를 알 수 없다. 그리고 미래에 어떻게 되는지 예측 불가능하다. 과거를 통해 현재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수 있으며, 현재를 앎으로써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아이들은 성장하며 항상 부모와 의견이 부딪힌다. 어른들은 이미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식들에게는 항상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정답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쉽게 듣지 않는다. 역사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행하는 것은 또 다르다. 역사에서 배울 것이 있지만 옳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언제나 옳게 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역사에서 배우면서도 배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역사에 그 답이 나와 있음에도 그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2. 역사와 정체성

우리는 역사를 배워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내가, 그리고 우리가, 동시에 이 시대가 왜 있는지를 안다. 역사가 만들어 온 그 과정이 오늘의 정체성이며 동시에 그 정체성이 역사를 계속 이끌어 간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이 시대를 살피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하며 좋은 것은 계승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지금의 나와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이다. 정체성은 한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감의 원천이다. 정체성이 확실한 사람은 눈에 빛이 있으며, 자신감이 있고, 각종 유혹을 이겨낼 수 있으며 매력에 넘친다. 아이덴티티라고 하는 이 정체성은 바로 역사와 직결된다. 프랑스 미떼랑 대통령은자신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국민은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국민이다.”라고 말한다.

 

3. 정체성과 신앙

그렇게 형성된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이 중요한가?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정체성이다. 우리는 흔히 삶의 부유함이나 교단의 크기를 중요하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정체성이다. 자기가 어디에 속한 것을 아는 것이다. 동시에 중요한 것은 동질성이다. 그리고 그 동질성을 찾는 근본적인 이유는 신앙생활을 잘하자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가 재미있고 즐겁고 기쁘다는 것만은 아니다. 이단들을 보라. 그들 중에는 우리보다도 더 재미있고 즐겁고 기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대로 살아가자는 의미이다. 과연 우리가 성경에 가깝게 사는 사람들인가? 이것은 교회가 형성하는 과정에서 역사를 보면 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따라 형성된 교회는 그 정체성을 따라 앞으로 나간다.

 

4. 교단이 필요한가?

노회와 총회가 왜 필요한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이 특히 대형교회일수록 교단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회의한다. 이것은 지도자들의 잘못도 한 몫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노회와 총회는 그 바른 정체성을 지키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배우고 격려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하며 동시에 개체 교회가 바른 신앙 정체성의 길로 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감독하는 일을 하며 그 길로 바로 나가도록 진로를 항상 바르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노회의 의의는 그리스도의 몸 된 여러 개체 교회가 서로 협력함으로 교리의 순결과 온전함을 보존하여 신앙을 증진시키고 교회 행정과 권징을 동일하게 하며 배교와 부도덕을 방지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총회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인간이며 죄인들이므로 함께하며 동시에 감독하는 교단이 필요하다.

 

5. 고신(高神)의 역사

한국 선교와 발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H. N. Alen 의사가 입국하여 의료선교로 복음전도의 길을 열고 1885.4. 5 H. G Underwood 선교사의 입국으로 한국의 장로교 선교는 활발히 시작되었다. 1893. 1.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되고 1901. 5. 15 평양 장로회 신학교 개교, 1907. 9. 17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네비우스(Nevius) 선교정책과 의료사업과 교육을 통한 선교들이 어우러지면서 장로교 교회 확장은 잘 되어갔다.

신사참배(神社參拜, Shrine worship)의 강요: 한국 교회의 어려움은 당시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에 있었다는 것이다. 1910년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일본은 대동아 전쟁을 계기로 한국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내선일체라는 슬로건을 걸고 황민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황거요배, 황국 신민의 서사 낭독, 일본어 사용 강요, 그리고 신도(神道) 사상을 주입하여 결국 일본 천황을 절대 신으로 여기는 통칭 원리로서 1932년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기독교 학교가 제일 먼저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일본은 신사 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호도하는 가운데 대부분의 기독교 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하였다. 다음으로 교회을 압박하여 1935년부터, 안식교, 성결교, 감리교, 구세군, 성공회, 로마 천주교는 모두 굴복하고 신사참배를 실시하였다. 장로교는 193829일 가장 교세가 강한 평북 노회가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였고 1938. 9. 10. 평양 서문밖(西門外) 교회당에서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 모인 제27회 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였고 결의 후 총회 임원들이 신사에 가서 참배하므로 한국 교회는 배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 대부분의 교회들이 신사 참배를 하고 부일 협력하는 가운데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지키기 원하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많은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평양 장로회 신학교는 문을 닫고 반대 운동을 주도하던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은 검속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주기철 목사는 평양노회에서 면직되었고 1944년 순교하였다. 많은 분들이 순교하는 가운데 한상동, 주남선 목사, 손명복, 조수옥 전도사등은 평양형무소에서, 손양원 목사는 청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고 그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국 교회는 일본에 예속되어 그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194581일 모든 교회는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이란 이름으로 통합되어 그 초대 통리에 장로교 김관식 목사(후일 고신을 축출할 때 총회 정치부장)가 취임하였다. 한국교회사의 가장 치욕스러운 시기가 이때였다.

해방과 출옥, 그리고 고려신학교 개교: 1945. 8. 15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이들은 한국교회 재건의 주역이 되었고, 신사참배하에서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인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후 자유주의 계통의 조선신학교가 장로교의 유일한 직영 신학교로 인정받는 사태 하에서 출옥 성도들은 순수한 개혁주의 보수신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946. 6. 23 진해에서 하기신학강좌를 개최하고 9. 20에 한상동, 주남선 목사가 주동이 되어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다. 한국 신학계의 거두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가 교장을 역임하였고 한 때 손양원 목사가 총무를 맡는 등 고려신학교는 당시 보수 신학의 산실이었다.

총회와의 갈등: 그러나 대부분의 산사참배를 했던 교권주의자들은 계속 교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교회를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했다는 해괴한 논리로 계속 교권을 행사하였다. 1948. 4. 34회 총회는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문제를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노회가 천서를 줄 수 없다하여 문제가 제기되고 이때부터 총회 내엔 출옥성도들이 중심된 고려신학교를 거세하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장로교 분열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자숙 운동과 총회로 부터의 추방: 1948.12 손양원 목사 고려신학교 총무로 취임하였고 출옥 성도들이 교역자들의 자숙 운동(1. 목사와 장로는 신사참배를 한 목사와 장로는 권징의 길을 택하여 자숙한 후 교역에 복귀 2.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 2개월간 휴직, 통회 자복 3.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복구 등 5개항)을 주장하였으나 당시 경남노회는 출옥성도들을 거북스럽게 여기는 친일목사들의 세력이 점차 확산되면서 특히 노회가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추천하는(薦書)) 문제를 반대하여 오다가 경남노회는 5개가 되었다. 장로회 제36회 총회는 경남노회 총대문제로 개회벽두부터 소란이 일다가 급기야는 경찰이 동원되어 진압이 되고 총회는 유회가 되었다. 그리고 2개월 후 6. 25전쟁이 터졌다. 36회 총회시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법통)노회 총대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와 관계없는 것으로 공포가 되었다. 총회 측에서는 한상동목사에게 그가 시무하던 부산초량교회의 명도를 요구하였고, 한상동목사는 10. 14 초량교회를 떠나니 90% 이상의 교인들이 따르게 되어 초량에 있는 주영문장로 뜰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고 교회가 시작되니 이것이 고신의 모체인 삼일교회(三一敎會)였다.

고신의 출범: 1952.9.22 37회 총회는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자들(경남(법통)노회)은 총회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총회 측의 재언명과 경남(법통)노회의 엄주신 장로의 고별선언을 최후로 고려학교를 중심한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와 결별이 되었다. 경남 진주 성남교회당에서 제1회 총노회가 조직되고 총노회 조직의 취지와 목적을 발표하였다.

취지 : 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본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교파적으로 흐르므로 이를 바로 잡아 참된 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계승하기 위하여 총노회를 조직한다. (이후 총회는 총노회는 총회조직으로 인정하여 이 총노회 발회를 고신 제1회 총회로 인정했다.)

목적 : 정통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정신을 지지하는 전국교회를 규합하여 통합하며 개혁주의 신앙 운동을 하며, 법통총회를 장차 계승키로 한다.

이에 총노회는 신사참배 한 일에 대하여 목사, 장로, 남녀 전도사의 자숙기간을 3주간 정하고 공인죄와 자인죄를 통회하고 자복하였다. 이로서 고신은 총회로부터 축출된 후 교단이 성립되었다. 이후 1960년 고신은 합동측과 일시 합동하였으나 여러 가지 문제로 1963년 다시 환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허순길 교수의 비평처럼 당시 합동의 졸속성, 환원과 고려신학교 복교 과정에서의 객관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법리성과 합리성이 결여된 것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합동과 합동하였으므로 고신은 없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지극히 형식논리적인 이론이다. 명분상 합동을 하지 않았음이 나을 수는 있었겠지만 인간이 항상 옳고 합리적이고 최상의 선택만을 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행위의 결과를 다 예측할 수도 없다. 그리고 실수를 인정할 때는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 사람은 결과를 본 후에야 그 판단이 잘못한 것이라고 깨닫는 경우가 많다. 합동 후에도 고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고 온 교단을 변혁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순진한 합동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고신은 환원했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지키는 고신이 된 것이다. 그것을 한상동목사 개인의 욕망 때문이라거나 분리주의적인 사고 때문이라고만 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이것은 합동=(), 환원(분리)=()이라는 도식적 논리의 잣대로만 재단한 것이며 당시의 정황을 왜곡한 반대 측의 이론에만 매몰된 것은 아닐까? 관점의 충돌이 생겼음에도 자기 관점만이 지극히 객관적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객관성의 객관성은 누가 담보하는가? 바른 역사관은 바른 성경관에서 나온다. 이론은 차치하고 정체성이나 원리적인 고려가 없이 무분별하게 합동한 교단들이 자기 정체성은커녕 기독교적인 가치마저 지키기 힘든 상황을 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 현실이 아닌가? 정체성을 지키기 힘들고 개혁하기도 어렵다고 판단되면 거기서 나오는 것이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길이 아닌가? 그러므로 고신의 환원을 분리주의라고 폄훼해서는 안된다.

 

6, 고신의 정체성

고신의 정체성: 고신의 정체성신앙의 정통과 하나님 앞(CORAMDEO, before God)에서의 생활의 순결이다. 고신의 역사는 이 것을 지키기 위한 순교신앙을 그 배경으로 한다. 즉 진리를 지키고 생활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순교도 불사한다는 것이며 실제로 신앙의 선조들은 이것을 위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옥고를 서슴치 않았으며 순교도 감내하였다. 순교가 방점이 아니라 정통 신앙의 파수와 생활의 순결을 위한 것이 방점이다. 이를 위하여는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소극적인 정체성이다. 순교 신앙의 의미도 잘 알아야 하지만 순교 신앙에만 매어서는 안 된다. 죽음이 필요할 때는 죽어야 하지만 죽는 것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다. 이것을 뛰어넘어 개혁주의(Reformed faith)의 한국 교회 건설과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 교회 건설 즉 개혁주의 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가 우리의 적극적 정체성이다. 소극적 정체성에 매어 적극적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신조: 신앙의 정통을 위해 우리는 성경은 물론이지만 자랑스러운 우리 신앙 선배들의 유산인 웨스트민스터 표준서들(Westminster Standards, 신도개요, 대소 교리문답, 교회정치, 예배지침)”을 우리의 표준으로 한다.

생활원리: 그리고 역시 생활의 순결을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활원리를 가진다.

1) 하나님 중심(God centered)

2) 성경 중심(Bible centered)

3) 교회 중심(Church centered)

 

나오는 말

우리는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배들이 남겨준 믿음의 유산들을 물려받았다. 그들 모두 완전한 사람들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과 성경 중심으로 살기를 원했고 교회를 세우고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한국 교회의 어두운 시기에 고신이라고 하는 그루터기를 남겨두셨다. 고신이 교단의 규모에 있어서 으뜸은 아니지만 한국 교회에 알게 모르게 끼친 영향은 크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의 터 위에 세워진 이 교단과 교회는 그 터 위에서 어떤 역사를 발전시켜 가고 있는가? 오늘 과연 자신들의 삶과 신앙에만 몰두하는 이기적인 신자들은 아닌가? 과연 우리가 오늘 진리를 위해 순교라도 감당할 믿음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 모두는 과연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자랑스러운 교신의 정체성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교단이나 교회나 개인이 얼마만큼의 힘을 쏟고 있는가? 오늘날 이상하게 교단에 대해 자학하고 몰교단, 몰신학을 주장하는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많은 현실에서 지난날을 살피면서 자랑스러운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우리의 바른 정체성을 지키며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이어가기를 소원하는 교회가 성도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필요 이상의 과장과 자만은 안 되지만 우리 고신은 자랑스러운 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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