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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 십일조 ]는 감사의 시작
강종수 2015-04-11 20:52:57 | 조회: 2713
《십일조》는 감사의 시작 /강종수<마태복음 주해. 특주>


십일조는 근본적으로 모든 만물의 기원적 인식에서 하나님께 대한 최소한의 감사 표식입니다. 신앙고백에서 보여주듯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삶의 모든 요소에 대한 근원적인 시작과 그 가운데 문화들을 취급하게 됨에 대한 주종관계의 인식을 고하는 것입니다.

시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창조주와 만물을 취급하게 된 피조물인 인간으로서의 관계의식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게 된 심적 동기를 찾아보면 십일조는 그 시작부터가 율법적 강요성에서 발상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고 구원 받은 자들이 감사하는 기본적인 예표였음을 알게 됩니다.


1. 십일조의 기원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겨 돌아와 살렘 왕 멜기세덱을 영접하면서 그 전리품(戰利品)에서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창세기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그리고 야곱이 형을 속여 죄를 짓고 도망하여 밧단아람으로 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서원을 합니다. 아마 조부 아브라함의 영향으로 이어진 감사의 정신에서 우러난 듯합니다.
창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이렇게 자원하는 심령으로 감사의 예표가 십일조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십일조라는 단어조차 없습니다. 어떤 구전(口傳)이나 하나님의 특수 계시조차도 없는 가운데서 이러한 감사의 예표로 십일조를 서원했다는 것은 오늘의 십일조나 감사의 정신에 결코 강요성이나 율법적 의도가 개입할 수 없는 행위가 되어야 함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2. 행위 규약으로서의 십일조 제정

모든 일에는 법으로 제도화하기 전에 상식과 도덕적 양심이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비록 십일조가 법으로 제정되었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 십일조를 받으시는 마음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처음 십일조를 드리려고 한 그 중심으로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어떤 형식으로든 감사하는 행위가 지당하지만 십일조는 인간 편에서 스스로 자원한 일이었으나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좋게 보시고(?) 축복해주실 규정으로 법제화하신 것 같습니다.

레27:30-32 ‘30.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31.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32.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이렇게 곡물부터 짐승까지 십일조로 복을 주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십일조나 일반 헌금생활에도 감사의 마음이 없는 자들은 어쩌면 제정된 법의 선포를 듣고 부담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신앙은 여러 면에서 그러한데 믿음으로 받으려는 자에게는 쉬울 수도 있으나 아직 감동이 되지 않은 자는 부당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12지파로 나뉠 때 레위 지파는 백성들의 십일조로 살게 하셨습니다. 11지파에서 내는 십일조가 쓰이는 용도는 하나님의 집에서 일하는 백성들을 위함에 있고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내어서 제사장들의 분깃이 되게 명하셨습니다. 또한 가난한 백성들을 도우려는 복지적 자산으로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의 십일조와 헌금의 용도는 오직 하나님의 일과 그 일에 종사하는 사역자와 구제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느12:44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때문이라’(민18:26), 신14: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십일조의 명목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백성들에게 부요를 주시기 위한 언약이기도 했습니다.
잠3:9-10 ‘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축복의 언약을 하셨습니다.

줄곧 잘 해오던 십일조를 때론 내지 않는 공백 기간도 발생하거나 말라기 시절만 해도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진정성이 사라지고 외식적인 행위만 남았던 것을 봅니다. 제사의식이 형식화 된 상태에서 성전 출입을 하는 것마저 하나님은 싫으셨습니다.

말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제사로 드리는 제물에 관심도 없으시고 십일조를 내라고 태초부터 언약을 정하신 바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지당한 인간의 감사 정신을 의롭게 여기사 모든 이들이 그렇게 잘하면 복을 주시기롤 작정해주신 은혜로운 법이 되었던 것인데 백성들의 신앙양심이 변질되어 하나님을 오해하고 형식 뿐 감사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 주시고자 십일조를 통한 물질 축복의 언약을 다시 확인하셨습니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 뜻은 시험 삼아 해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대한 확신을 심으려는 의도입니다.

가령 자식이 부모를 잘 공경하다가 어느 날부터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을 그치고 잘못되면 부모님이 자식 더러 이러 이러한 일로 나를 기쁘게 해보라 그러면 너를 사랑하고 너에게 사업 자금도 주지 않겠느냐? 는 식입니다. 그것을 잘 못 알아듣고 시험 삼아 부모를 부모같이 여기지 않고 행위의 모양만 내면서 복주시기를 기다린다면 그게 어찌 효(孝)가 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사로 주님께 드려야 함이 지당하지만 그래도 십일조로 감사의 기본적 표현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적과 다름없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말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3. 오늘의 십일조 이해

신약에서 십일조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신학적 논란이 많은데, 가령 십계명의 본질적인 내용은 신약에서도 그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면 십일조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편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정신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규율에 대한 종교적 의무와 가르침을 넘어서 자원하는 심령으로 감사의 표시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율법적 해석보다 앞서는 창조자에 대한 태곳적 경외심이 아니겠습니까?
율법무용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메시아 예수께서 오심으로 모든 언약들이 폐지된 것처럼 과도한 해석을 내리는데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먼저는, 짐승의 피 대신 대속하신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사함받게 하신 속죄의 방편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 언약입니다(히9:15).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 외 여러 절기나 유대인들의 문화생활에 대한 율법은 메시아께서 오심으로 재해석 내지는 폐지하게 된 것들입니다.

흔히 십일조와 함께 논제가 되는 안식일 문제도 마찬가지인데,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을 다 이루시겠다고 하심은 율법을 폐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즉 율법이 요구하는 인생의 심판, 사망을 대신 주께서 받으시고 이제는 율법의 그 선하신 목적을 내용 면에서 지켜나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다 이뤘다고 해서 이제는 계명에 매일 필요가 없어졌다고 한다면 제 1계명을 범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그러므로 계명의 정신적 연속성을 그대로 안고 있어야 하며 어떤 계명은 문자 그대로 또 다른 계명은 완화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의도로 재해석을 해서 따르는 것입니다. 그 중 4번째의 계명인 안식일은 그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마12:8) 따르는 것이 그 안식일의 날보다 더 귀중함은 상식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때가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이면(요20:1) 지금의 주일 아침이 됩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게 됨은 사도들로부터 시작되었고 구약 예언의 성취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원한 안식의 완성을 이루신 역사적 사건이며 그러한 날이 됩니다.

때문에 부활은 구원의 최종 목표이자(요6:40) 모든 계명과 모든 언약의 궁극적 완성입니다. 그래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서의 구약 어느 성경구절에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고 또한 신약 어느 구절에도 멈출 수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고 소망 가운데 진정한 감사의 시작과 신앙교리를 습득하는 영적 성숙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구약에나 신약의 문헌에 매여서 해석학적 논리로 숙고만 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의 사유(思惟)가 아닙니다.

신약에서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을 따로 적나라하게 가르치신 바는 없으나 당시 유대 종교인들의 외식된 종교 행위를 지적하실 때 십일조 문제를 가르쳐 주셨는데,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심에서 볼 수 있듯이 십일조의 폐지가 아니라 바른 십일조를 지속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혹 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로는 모든 율법과 함께 십일조도 폐지된 것으로 해석하나 앞서 십일조의 시원(始原)을 봤듯이 결코 폐지해야 잘 믿는 것이라 할 만한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활(死活)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있어 신구약 관계 성립과 그 공통된 하나님의 목표를 오해하기 때문이라 봅니다. 역시 성경을 교리와 철학적 변증의 토대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성경전서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목적을 깨닫지 못한다고 봅니다.

신약은 오히려 구원에 대한 감사로 재산을 통째로 내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이나 전답을 팔아 사도들 앞에 내 놓기도 했습니다(행4:32, 행5:1-). 십일조와 교회의 모든 헌금은 공적으로 쓰이되, 사역자들은 구약 제사장 격이 아니라 다른 경제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생활비를 지급해야 하고(고전9:13-14) 구약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십일조와 헌금으로 구제에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갈2:10).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연유에서든 감사함이 넘쳐야 합니다. 십일조는 모든 감사의 생활 중에 기본적 표식인 줄 깨달아 빠짐없는 십일조 생활로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하다고 내지 않으면 언제나 가난하게 살면서 잘 믿는 사람으로 변명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신앙은 물질로 판단할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과 육의 온전한 구원을 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경륜은 여전합니다.

많은 이들이 돈에 대한 욕심이 성경해석보다 앞서 심적으로 부담을 가지게 하므로 변명을 하고 나아가 율법 폐지를 논하기도 하지만 결코 모든 율법의 정신은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하며 선하다고 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롬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우리는 힘에 지날 만큼이나 감사하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고후8: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감사하는 자들을 이해하는 것은 신학적 논리가 아니라 신앙의 양심에서 우러나는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율법의 해석문제로 그들을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역사 중에 십일조를 제대로 내고 사업을 하거나 삶을 살아온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을 대조해본 일도 많은데 확실히 하나님은 십일조를 내고 동시에 물질에 절제력을 다하고 감사생활을 더 많이 하는 자들이 문화적으로 잘 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주석학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옳지 않고 오직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임을 알고 성수주일 문제도 마찬가지로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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