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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종교수의 로마서 7장의 “나”는 누구인가? 글에 대한 몇 가지 분석과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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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태
등록일
2020-09-22 00:07:42
조회수
1492
최갑종교수의 로마서 7장의 “나”는 누구인가? 글에 대한 몇 가지 분석과 문제점

글의 내용을 볼 때 최교수의 주장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1.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절, 20절)의 해석 문제
바울은 분명하게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라고 했다. 두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했다. 최 교수는 구절의 전반부를 제외하고 언급하지 않는다. 후반부만을 가지고 설명한다. 하지만 후반부를 언급할려면 분명하게 전반부도 함께 언급함이 마땅하다. 최소한 설명이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최교수의 주장대로 이 부분이 구원전의 상황이라고 하면 신학적인 문제가 생긴다. 왜? 이 구절의 해석은 ‘내 속의 육신이 죄를 짓는데 육신이 짓는 죄는 내가 짓는 죄가 아니다’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물어보자. 바울이 이런 말을 불신자에게 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공히 죄인을 죄인이라고 밝히 언명한다. 육신이 죄를 지어도 그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이다. 이는 명백하다.
그리고 이 구절을 구원전의 상황이라고 한다면. 또 다른 신학적인 문제가 생긴다. 첫째 구원파 이단의 주장. 둘째 이원론의 문제다.
만약에 본문이 구원 후의 상황이라고 하면 설명이 가능하다. 신자속의 육신의 죄가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14절,17-18절,20절).
요한 일서에서 요한은 비슷한 말씀을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씀이다(요일3:6,9). 같은 맥락으로 설명가능하다.

2. 7:7-13와 7;14-25의 주제 문제
7장은 최교수의 설명처럼 ‘율법의 무능력’을 말하지 않는다.
7:7-13은 ‘율법의 기능’을 말하고, 7;14-25은 육신속에 거하는 죄로 인한 ‘행함에 있어서 내 자신의 무능력함’을 말하고 있다. 7장 14-25절을 정확히 파악해보면 율법의 무능력이 아니라 신자의 육신속에 있는 죄를 말하고 있다. 즉 신자의 이원성이다. 율법은 이 신자속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내는 기능을 정확하게 해 낸다. 때문에 율법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세 번(12,14,16절)이나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최교수가 7장을 ‘율법의 무능력’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성화를 주장할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내가 보기에 최교수의 가장 심각한 문제중의 하나가 7:7-13와 7:14-25의 주제를 잘못이해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3. 7:14-25이 성화라는 주장에 대해서
최교수는 이 본문이 성화를 말한다고 한다. 행함을 말하기에 가능성은 있으나 문제가 있다. 최교수는 본문이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성화를 이룰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주장은 틀렸다. 왜? 2번과 4번의 이유 때문이다.
또 최교수는 7장이 구원전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만약 이 주장이 맞다고 한다면, 바울의 말씀 전개방식을 생각해 볼 때 본문의 내용에는 칭의나 믿음, 구원에 대한 언급이 나옴이 타당하다. 하지만 본문에는 믿음의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 본문에는 성화를 말하는 내용이 나와서는 안된다. 주장대로 라면, 본문의 화자는 칭의나 최소한 구원을 지향하고 있다고 설명해야 한다.
최교수는 자가 당착을 범하고 있다. 불신자라고 하면서 성화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구원도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화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고 있다고?. 난 상상도 할 수 없다.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깊은 열정을 가지고 할례의 행함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와 싸움도 불사했다. 그런 바울이 이 문단에서 구원과 성화의 구별도 안될 만큼 흐리멍텅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인데, 나는 동의할 수 없다.

4. 7장의 ‘나’는 절대로 유대/이스라엘이라 할 수 없다.
최교수는
‘자기 당대 유대인들을 “나”라는 1인칭을 사용하여 그들의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창세기에 나타나는 아담의 문제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자기 당대 유대인의 문제를 말한다.’
‘그가 현재 시제를 사용하는 주된 이유는 ‘나’의 비극적인 투쟁이 회심 이후 바울의 현재 경험이기보다도 오히려 크리스천 신앙의 현재적인 전망을 통하여 본 회심 전의 바울을 포함하여, 전 유대인들에 관한(혹은 유대인을 모델로 하는 크리스천 이전 사람에 관한) 현재적 통찰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덧댐은 말이 안된다.
먼저 7장에서 바울이 유대/이스라엘을 생각하면서 말한다는 구체적인 언급이나 구체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리고 성경신학적인 견해로 보더라도 절대로 아담이나 구원전의 이스라엘이라 말할 수 없다.
왜?. 7장 본문의 인간상태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다’로 표현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원전의 구약이나 신약이나 오순절이후에라도 유대/이스라엘의 상태를 대표할 수 있는 언어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형식과 외양은 그럴듯하지만 내면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싫어하는 불순종과 거부로 특징할 수 있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제사드릴려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아담과 불신자도 마찬가지이다. 개혁신학은 불신자의 마음상태를 하나님을 가까이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한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반대로 말한다.
이런 것을 너무나 잘 아는 바울이 자신을 빗대면서 유대/이스라엘을 연대해서 말한다고 하는 주장은 어불 성설이다. 바울은 성격이 정확하고 세밀한 사람이다. 거기다 성령의 감동이 더해져서 기록한 말씀을 이렇게 허술하게 말도 안되게 성경을 기록했다라고 할 수 없다.



* 로마서의 복음에 관심이 있어서 몇 년 전부터 연구와 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글을 보고 한편으로 반가웠지만, 지난번의 글도 있어서 드는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잠잠하기 어려워서, 평가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지만 내용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신학적인 부분이나 다른 부분은 제가 감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로마서 7장은 정말 많이 연구하고 묵상하고 분석했던 본문입니다.

분석한 다른 내용도 있지만 유난 떠는 것 같아, 이것만을 올립니다.
그리고
만약, 더한 자료를 원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 교수님께
무례를 무릅쓰고 글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교수님과 김세윤교수님이 주장하는 ‘믿음으로의 구원의 확증은 성화를 통한 심판대앞에서 확증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는 바울이 그토록 주의하고 엄중해 경계하고 싸웠던 행함을 통한 구원에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두 분 교수님의 탁월한 신학적인 식견과 성경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누가 쉽게 견줄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빛이요 소금인 우리교회가 이 모양이 됨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어느누구보다 많으셨을 것이라 추측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수님,
빈대가 싫다고 초가집을 태울 수는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것 고칠려고 교회의 기둥과 터같은 개혁신앙의 기본을 흔드는 것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저번의 글과 이번의 글을 보면서 혹 교수님이 주장하는 것을 뒷받침 할려는 의도가 있지는 않는지 강한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분석해서 올렸습니다.
작성일:2020-09-22 00:07:42 183.107.23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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