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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21절의 바른 의미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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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태
등록일
2021-01-07 21:46:44
조회수
5875
마태복음 7장 21절의 바른 의미는 무엇인가?

혹자들은 이 말씀이 성화의 구원 혹은 행위의 강조를 뒷받침하는 말씀이라고 주장 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그런가?.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은 성경본문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 문단전체의 맥락을 살피고 그 맥락속에서 의미를 살피는 것이다. 이는 성경 해석의 기본이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문단의 배경이나 의미와 달리 일부분이나 일부 구절만을 인용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바른 방법이 아니다. 한 구절을 따로 떼어서 문장의 의미를 말하면 성경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 만약에 어떤 목적을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것은 이단들이 성경의 일부구절을 이용하는 것과 같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7장 21절을 인용하여 행위를 강조하거나 혹은 성화가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같다.
그래서 과연 마태복음 7장 21절이 말씀하는 바른 진리가 무엇인지 밝혀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생각되어 부족하나마 연구하여 분석해서 해석해 보기로 했다.

먼저 21절이 속한 문단을 15절에서 23절까지로 할 것인지, 더 넓혀서 27절까지로 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성경마다 상이하게 나눈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되도록 넓게 잡는 것이 오해를 줄이겠다 싶어서 7장 15-27절까지를 전체 문단에 속한 부분으로 하기로 했다.

먼저 이 본문이 거짓선지자라는 대상을 배경으로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심을 기억하면서 본문을 대해야 한다.

마태복음 7장 15-27절의 개요
말씀의 대상은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보면 제자들이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교훈하시고 가르치시는 상황인 것이다.
이 말씀의 위치는 5장부터 시작되는 일명 산상수훈의 끝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사실 그래서 24-27절을 분리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게 말씀 하셨다라고 하기 보다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삶에 전반에 대한 중요하고 필요한 말씀들을 전체적으로 또 핵심이 되는 부분들을 조목조목 말씀하셨다고 볼 때 굳이 같은 문단에 붙여도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아서 같이 하기로 했다. 번역본들도 이 부분을 같은 묶음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체문단은 15-27절이지만, 내용을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5-20절
21-23절
24-27절

각 문단의 요지
15-20절의 요지
핵심문장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16절, 20절)이다. 반복해서 강조하신다.
‘그’ 혹은 ‘그들은’은 거짓선지자를 말한다. ‘열매’는 그들의 행위를 의미한다. ‘알리라’는 그들이 좋은 선지자인지, 악한 선지자인지, 말씀속의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그들의 행위로 분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알리라는 분별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님이 여기서 그들의 열매를 언급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열매는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이다. 나무가 없는 열매는 있을 수 없다. 즉 나무와 깊은 관계성을 암시하고 있고 이를 바탕에 깔고 있음을 기억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핵심중의 하나는 나무와 열매는 불가분리관계라는 것이다. 연결되어 있고 하나라는 것이다.
16절, 17절, 18절, 19절은 나무와 열매의 깊은 연관성을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다.
이 문단은 제자들에게 거짓선지자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과 분별의 필요성을 교훈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선지자의 행위를 보면 그들이 좋은 선지자인지 못된 선지자인지를 알 수 있으니 분별하라는 말씀이다. 좋은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못된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다. 바른 선지자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진리의 열매를 맺으며, 거짓 선지자가 이리같이 거짓과 탐욕의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19절은 21절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예수님은 산상수훈 가르침의 끝자락에 거짓선지자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과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거짓선지자들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왜곡되고 변질되는 것을 경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도 항상 거짓선지자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르침을 잘 받은 제자들도 거짓선지자로 말미암아 자신 뿐 아니라 신앙공동체에 심한 손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 때문에 얼마나 피흘리며 싸웠는지를 서신들에서 확인 할 수 있다.


21-23절 요지
이 부분에서 말씀의 배경이 달라진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의 눈을 마지막 심판대 앞으로 옮기게 하신다. 이 문단의 요지는 거짓되고 위선된 불법을 행한 거짓 선지자들을 예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21절의 주여, 주여와 22절의 주여, 주여는 거짓선지자를 향한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 말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서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22절의 주의 이름으로 행한 이 사람들의 일들이 그냥 보기에 불법적인 일들이 아닌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 노릇한 것, 귀신을 쫓아 낸 것, 많은 권능을 행한 일들이 그냥 보면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사역들이 아닌가?라고 생각 될 수 있는 사역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23절의 평가는 완전히 정반대다. 그들의 그 사역들을 불법을 행했다고 정죄하셨다. 이유가 무엇인가?.
본문 가운데서 두 가지를 찾을 수 있다.
첫째는 15절의 거짓선지자들의 태도를 말씀하시면서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온다’라고 말씀하셨음이다. 즉 겉으로 외양으로 양처럼 행동하며 치장하며 다가온다는 말씀이다. 이는 이들이 행했던 선지자노릇, 귀신쫒음, 많은 권능행함이 진정한 믿음가운데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양의 탈을 쓴 것 같은 겉으로는 선한 행위 인척을 하면서 속은 노략질의 악한 마음을 가지고 행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둘째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알지 못하니의 알지 못하니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다는 말씀이다. 구절의 원어단어를 찾아보면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에그논’ 즉 기노스코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께서 더구나 심판대앞에서 심판주로 서신 예수님께서 이들 거짓선지자들을 인지하고 파악하지 못해서 알지 못한다는 말은 절대 아님을 우리는 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는 말씀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이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었다는 말씀이다.
즉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로서 예수님이 보내지 않은 거짓선지자였다는 말이다. 입으로만 주여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예수님도 믿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즉 거짓 선지자, 못된 나무였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예수님의 소명도 받지 않고, 진정 예수님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만 예수님을 위해 일하는 행위를 하면서 뒤로는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일을 했다는 말씀이다.
이 문단의 말씀이, 주님께서 심판의 날에 행하시는 상황임을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열매의 분별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쉽게 분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음도 있다. 때문에 그날에 주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을 명백히 드러내고 밝히 심판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은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4-27절의 요지
‘그러므로’는 앞의 말씀들의 결론으로 하시는 말씀이라는 느낌을 준다. 바로 앞의 문단의 결론인지 전체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하시는 말씀인지는 더 연구해 보아야 알 것 같다.
핵심 구절은 25절이다. ‘이는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연고요’이다. 주초를 반석 위 곧 예수 그리스도에 세운 이유(원인)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세웠기에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볼 내용은 ‘나의 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그 집을 반석위에 세운 지혜로운 자’를 같은 대상으로 말씀하셨다’라는 것이다.
생각해 볼 부분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를 왜 그 집을 반석위에 세운 사람과 비유하였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반석위에 우리의 믿음의 삶을 세우라는 의미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하게 볼 단어는 세운이다. 세운은 아오리스트이다. 말씀을 행하는는 현재형인데 왜 세운은 아오리스트일까?. 더구나 예수님이 말씀을 덧붙여 설명하는 25절에서는 놓은을 아예 과거완료형으로 말씀하셨다. 또한 26절의 지은도 아오리스트이다.
의미를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을 세운 자라는 말씀이다. 세우고 있는 자가 아니라고 함을 유념해야 한다. 이미 세워진 자임을 아오리스트와 과거완료는 강조하고 있음이다. 즉 예수님의 관계안에 들어와 있는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측면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좋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자라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 21절의 의미를 살펴보고 해석해 보자.
중요한 것은 전체 문단의 맥락가운데서 21절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며 주님을 부르는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진실된 제자가 들어간다는 말씀이다. 이는 말씀을 행함을 통해 즉 현재 불신자인데 성화나 행위를 통해서 좋은 성도가 된다든지, 혹은 좋은 성도인데 행하지 못하여 나쁜 성도?( 다시 불신자)가 된다든지의 의미로 보면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행하는 자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면 전체 문단의 뜻과 왜곡되어짐을 알아야 한다.
성화구원이나 행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이 행위를 강조하고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근거구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본 구절이 정말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 분석해 보겠다.

21절을 좀 더 심도 있게 분석해 들어가 보겠다.
21절에서 주님의 말씀의 초점이 행하는 일일까? 행하는 자일까?
먼저 말하지만 원어는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명확하게 말씀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의 전반부는 해석에 어려움이 없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한다는 의미이다. 즉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후반부가 문제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의 성경이 말하는 바른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가 핵심이다.
첫째 의미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 들어가리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둘째 의미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리라고 해석할 수 있다. 행하는 사람(존재) 즉 좋은 나무라야,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셋째 의미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의 뜻으로도 해석가능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로 둘 다로 보는 견해이다.

이 셋 중에서 이 본문의 바른 의미는 어떤 것일까?.
좀 더 풀어서 해석을 해보자.
첫째 해석은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기가 있어야 (혹은 행하기가 되어야, 행하기가 나타나야, 행함이 있어야 등등)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풀어 볼 수 있다.
둘째 해석은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곧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라야,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종하는 자라야 등등 천국에 들어가리라로 풀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21절의 의미가 행함에 초점이 아니라, 행하는 존재에 초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1절의 바른 해석은?
본문에서의 1차 대상은. 거짓 선지자이다.
그러므로, 주여 주여 입으로만 부르는 사역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행하는 사역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의미를 확장하여 일반 성도에게로 확장해서 적용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본다. 하지만 1차적인 상대는 사역자들임이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일반으로 확대해도 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행위에 초점을 맟추면 안된다. 열매는 나무에서 열리는 법이다. 본문은 나무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열매로 그들 곧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를 알리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역자들이 하는 행위를 통해서 그들이 참 선지자인지 혹은 거짓선지자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21절의 의미를 확대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곧 좋은 나무에 초점을 먼저 맞춘 말씀임을 명심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21절의 의미는,
다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좋은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좋은 나무)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즉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역자(성도)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이다.

본문의 말씀이 단순하게 열매와 행위에 초점을 둔 말씀이 아니라 좋은 나무 즉 좋은 참 사역자와 거짓 사역자에 초점을 맞춘 말씀임을 증거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같은 상황의 말씀을 기록한 누가복음 6장 43-45절말씀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이 본문도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임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분별에 대한 참고 말씀은, 마23장 3절에서 거짓선생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저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거짓선지자들의 관건은 말이 아니라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의 분별 기준은 행위이고, 그들이 참인지 거짓 인지를 판별하는 기준도 행위라는 말씀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저들을 보실 때 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지를 중요하게 보시고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


마 7장 21절이 행함으로를 말씀하는가?. 이 구절이 지금 행위의 doing을 말하는가?. 이것이 지금 업적을 말하는가?. 이것이 행위 성화로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가?.
이 구절은 존재를 말하고 있다. 순종하는 자, 행하는 자를 말씀하고 있음이다.
행함은 업적을 말하지만, 본문은 예수를 믿는 존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와 행함은 같다고 말할 수 없다. 본문의 앞뒤로 존재를 말하고 24-27절도 존재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본문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분별하는 것이 요지라고 할 수 있다.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하셨다. 다시 말하지만 열매는 혼자 열리지 않는다. 언제나 나무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참된 신앙을 가진 사역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속 즉 마음으로 노략질하는 이리의 본성을 가진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1절은 거짓선지자나 그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그들을 주님께서 그날에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사실 사람은 거짓선지자인지 참 선지자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그 심판의 날에 명확히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덧붙이는 말
21절의 의미가 왜곡되게 된 이유는, 한국교회 특히 목사님들이 잘못된 씨를 뿌림이 1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이때까지의 목사님들의 메시지를 보면, 이 본문의 말씀을 문단의 정확한 의미를 반영하여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한 메시지가 많지 않은 것을 본다.
한국교회의 유명하다는 선배목사들의 메시지도 비슷했다. 이 본문에서 문단전체의 의미를 무시한체 21절을 주제로 삼아서 바른 신앙의 행위와 올바른 순종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많았다는 점이다. 본 문단의 요지인 좋은 나무라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에 초점을 맟추기보다는 좋은 순종에 초점을 맞춘 설교가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의 대상은 거짓 선지자 즉 잘못된 영적 지도자에 대한 말씀임에도 일반 성도에 대한 메시지로 일반화한 면도 문제라고 본다. 1차적으로 잘못된 영적 지도자에 대한 말씀임을 먼저 명시하고 일반으로 넘어가는 수순이어야 하지 않을 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 메시지를 전해도 내용이 틀린 것이 아니고, 의미가 성경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듣는 성도도 메시지의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핵심 포인트는 정작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 포인트가 이것이냐는 것이다.
이때까지 분석해 보았지만, 본문과 21절은 행위에 초점을 맞춘 말씀이 아니라, 나무 즉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 혹은 영적 지도자에 초점을 맞추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이렇게 1차적으로 이 말씀의 바른 의미를 잘 전하지 못하고 왜곡되게 전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씨앗을 배경으로 현대에는 일종의 행위 혹은 성화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이 구절을 자신들의 메시지를 뒷받침하는 말씀으로 인용하고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상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확인되듯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거듭난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산상수훈을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지침서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심이다. 그러면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하셨다(마5:13-24).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그러면서 거짓선지자들을 분별하고 그들의 메시지를 주의하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며 귀신을 좇아내며 천국의 능력을 경험하고 경이로 보고하는 제자들에게 가장 큰 기쁨은 ‘너희 이름이 천국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고 말씀하셨음은 이미 제자들이 천국백성이요 구원받은 성도들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21절을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리라’로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의 해석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1절의 성경의 바른 의미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은 아니요.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진실한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라는 말씀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작성일:2021-01-07 21:46:44 211.216.2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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