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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Can the Received salvation be Cancell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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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등록일
2022-09-22 05:31:00
조회수
410
펌글과 평가

✝️✝️✝️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Can the Received salvation be Cancelled?) ✝️✝️✝️

아래의 글은 어느 성경공부 강사 되시는 분의 구원론을 다룬 책에 대하여 어느 교수님이 서평을 해주신 내용과 성경연구 방법론에 관하여 필자가 개혁주의 입장에서 평가한 내용입니다. 신간 [틀을 깨고 보니 한눈에 보이는 구원]이라는 책의 내용 중, 신자가 '구원받은 후에도' 불순종하여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받은 구원에서 탈락된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즉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 펌글 ] (REPRODUCTION)

"만약 우리가 육신을 따라 불순종하면서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아래 말씀처럼 영적으로 죽게(구원의 탈락) 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그러므로 은혜가 구원을 받은 이후의 모든 삶을 덮어주기 때문에 구원은 보장된다고 하는 것은, 은혜에 대한 오해(誤解)이며 오용(誤用)이다. 이것은 바른 복음이 아니다. 구원의 과정에서 순종이 면제된다는 언급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저자의 견해)

[ 서평 ] (BOOK REVIEW)

집사님! 안녕하십니까?
책 출판하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내용도, 구성도, 추천자도 모두 좋습니다. 독자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양면성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하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봅니다.

제가 보기에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신학자들을 포함하여) 성경을 마치 백과사전이나 수학책처럼 생각하여 성경으로부터 통일된 교리나 원리를 찾으려고 하는데, 다양한 저자와 독자들을 갖고 있는 성경은 일차적으로 교리를 위한 책이라기보다도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살았던 각 저자들이 또한 특정한 시대나 문화와 상황에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특정한 문학적 장르를 통해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각 성경은 기본적으로 역사성, 시대성, 문학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각권, 각장, 각 본문은 그들이 갖고 있는 역사성, 시대성, 문학성을 통해 접근되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통일성을 가진 메시지를 찾아야 합니다.

왜 로마서는 이렇게 말하고, 왜 야고보서는저렇게 말하는가, 왜 마태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왜 바울서신은 저렇게 말하는가하는 성경의 다양성은 각 성경이 갖고 있는 역사성, 문학성 등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의 서평)

[ 평가 ] (EVALUATION)

위의 서평에서 언급한 성경해석 방법(Hermeneutical approach)은 개혁주의(Reformed) 성경해석 방법(Biblical approach)이 아니라고 봅니다.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의 본문비평(the textual criticism)인 하등비평(lower criticism)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문서비평(the documentation criticism)인 고등비평 방법(the methods of higher criticism)입니다. 고등비평 방법은 불트만(Rudolf Bultmann) 해석학의 주장과 같이, 성경도 일반 책들과 똑같은 접근방식으로 들여다보며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문화적 배경(상황)을 고려해서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작업을 통해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출발점(starting point)과 결론(conclusion)이 잘 못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영감 된(딤후 3:16), 정확무오한 책(the infallible Book inspired by the Holy Spirit)의 절대개념(권위)이 아니라, 문화적 상황(cultural context), 즉 상기와 같이 역사성, 시대성, 문학성과 같은 시대적 상황에 따른 상대개념으로 접근하여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마치 불트만이 양식사비평(formgeschichte/form criticism) 방법을 통하여 교훈(kerygma)을 찾는 것과 같이, 문화적 다양성에서 통일성(coherency)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의 다양성(contingency)을 통해 그 안에서 통일성(coherency)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들의 주장과 같이 하나님도 후회하신 것(삼상 15:11)을 보면 절대자가 아니라 상대자라는 것인데, 이는 절대자 하나님께서 상대자인 인간과의 교통(communication)을 위한 접촉 방식인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이라는 성경의 특수한 표형방식을 이해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리고 성경도 절대적인 책이 아니라 상대적인 책인 이유는 인간이 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도 역시 성경의 특수성인 하나님의 성령으로 영감되어 무오하다는 원리를 도외시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영감으로 된 책으로(딤후 3:16)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기 때문에 절대로 오류가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사 34:16; 벧후 1:20~21)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의 영향을 받은 핫숀(C. Hartshorne)의 과정신학(process theology)과 같은 자유주의신학(Liberal theology)에 관한 글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이런 방법으로 성경의 상대적 다양성(relative diversity)을 통해 성경의 절대적 통일성(absolute unity)을 찾을 수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주장하는 “성경을 마치 백과사전이나 수학책처럼 생각하여 성경으로부터 통일된 교리나 원리를 찾으려고 하는데, 다양한 저자와 독자들을 갖고 있는 성경은 일차적으로 교리를 위한 책이라기보다도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살았던 각 저자들이 또한 특정한 시대나 문화와 상황에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특정한 문학적 장르를 통해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언급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교리(doctrine)나 신학의 원리(principle)를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원천(absolute source)입니다. 오히려 대부분 교리나 신학이 성경 소스(source)로부터 이탈하기 때문에 신학적 이설이나 이단(heresy)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영원불변의 통일된 원리를 기초로 하고 있고, 역사적으로 비본질적인 다양한 문화를 수용(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제1차적으로 ‘적용된 진리’(the Truth applied)이기 때문에, 그 당시 문화적 배경(cultural settings)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본질적인 통일성(원리)을 벗어나서 문화적 상황(cultural contexts)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말씀의 본질적 원리를 찾으려 할 때 상대적 진리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성경에는 본질적 원리(essential principle)인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God's sovereignty and grace)를 전제로 문화적 상황(역사성, 시대성, 문학성)을 통하여 말씀하신 "계시"(Revelation)이므로, 문화적 상황에서 잘못 출발하여 대전제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훼손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등비평방법은 물론 심지어 하등비평방법까지도 주의하지 않으면 성경 말씀이 변질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라는 제2차적으로 ‘재적용된 진리’(the Truth reapplied)를 찾는 과정에서, 성경의 각권, 각장, 각 본문이 그들이 갖고 있는 역사성, 시대성, 문학성을 통해 접근되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백번 양보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성경의 절대적 원리가 전제(presupposition)되어야 합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말씀의 다양성 면에서 그 당시 콘텍스트(context)에 따른 강조점의 문제일뿐 원리적으로는 똑같은 복음의 원리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또 야고보서(James)를 지푸라기 서신(straw Epistle)이라고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던 루터(Luther)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여기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도하면서 “믿음”을 강조하다가 야고보서에서 “행위”에 발목이 잡혀 의로운 신앙생활을 강조했다면,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루터와 야고보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그들의 복음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복음”이라는 불변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당시 가톨릭교회의 '행위 구원'이 개혁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믿음을 강조했던 것이고, 야고보는 행위를 무시한 '죽은 믿음'을 질책하기 위해서 행위를 강조했지만, 알고 보면 믿음에 따른 행위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촉구했던 것입니다. “내가 보건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이는 디지털 방식으로 언급한 내용이고, 아날로그 방식으로 말할 때는 언제나 믿음이 원인(씨앗)이고 행함이 결과(열매)가 되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며, 그렇다고 거꾸로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갈 2:16). 이는 마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해서 꺼꾸로 “사랑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으로의 “칭의”는 완전한 구원으로 단번에 끝나지만(유 1:3), 행위로의 “성화”는 죽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으므로 믿음의 행위라 해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만일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어느 정도의 행위가 필요합니까? 100%? 100점을 맞아야 탈락이 안되는 겁니까? 율법중에 한 조항만 범해도 율법의 모두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약 2:11). 이런 상황에서 행위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율법에 의하면 이성을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죄요 사람을 미워만 해도 살인죄라고 했는데 이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더구나 자신도 모르게 범하는 죄는 어찌해야 합니까?

비록 성령의 도우심으로 행한다 해도 육신을 가진 인간은 항상 성령을 따라 행하지 못하고 실족하여 범죄하곤 합니다. 만일 죄가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 1:8~9). 그렇다면 평생 범죄와 회개를 반복하게 되어 죽을 때까지 정죄와 용서를 반복하며 지옥과 천국을 왔다 갔다하다가 죽을 때 마지막 한방에 지옥행과 천국행이 결정된다는 결론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실존주의 신앙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는 '원죄와 자범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물론 성령을 따라 행하야 하지만 그러나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완벽한 행위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행함은 인간의 협력을 요하는 관계로, 행함으로 구원은 불가능한 것입니다(롬 3:20; 갈 2:16).

문화적 환경으로 접근하는 것은 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선호하는 구조론적 방법(structural method)으로, 이는 철학적 방법(philosophical approach)인 가설방법(hypothetical methodology)입니다. 어떤 주제에 대하여 확실한 전제가 아니라 가정해놓고 문화적 상황에서부터 출발하는 과학적 방법(scientific methodology)입니다. 이러한 접근방법을 사용해서 성경을 연구할 경우 마지막에 가서는 엉뚱한 결론이 나올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접근방법(ontological approach)인 하나님의 존재(being)와 속성(attribute)의 절대성(absoluteness)을 전제(presupposition)하는 고정된 전제적 방법이 아니라, 그 가능성(probability/possibility)을 가정(hypothesis)하고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여 결론을 내리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문화적 상황의 고려로 인하여 신론(theology)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성(absoluteness)이 상대성(relativity)으로 변질하여, 리처드 도킨스와 같이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by Richard Dawkins)을 그려내거나, 무신론이나 사신 신학(Atheism or God death theology by Friedrich W. Nietzsche, Thomas J. J. Altizer)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구원론에 있어서 칭의(중생)에 의하여 즉각적으로 단번에 얻은 구원을 다른 말로 영생인 “유업의 상”(골 3:24)이라고 하며, 평생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구원을 다른 말로 성화 즉 행함에 따른 “보상의 상”(고전 3:8)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믿음으로 단번에 얻은 “유업의 상”(영생)은 영원한 것이며, 점진적으로 얻는 “보상의 상”(성화)은 행함에 비례하여 가중되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으시고(마 16:27) 행한대로 보응하신다(롬 2:6)는 뜻입니다. 아날로그(analogue) 방식으로만 보면 이 두 가지 구원이 분리된 것으로 보이지만, 디지털(digital) 방식으로 보면 연결된 하나로 보입니다.

그래서 개혁신학에서는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는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뗄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약 2:20-26). 이 부분에서 “유업”(영생)은 칭의(중생)로 이미(already) 단번(즉각성)에 얻은 완성된 구원으로 불변적인(unchangeable) 반면에, “보상”(상급)은 성숙(성화)의 과정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아직(not yet) 미완성(점진성)된 구원으로 가변적(changeable)입니다. 영생은 자범죄를 포함하여 원죄해결 시 단번에 얻어지는 것으로 영원한 것이며, 상급은 일생에 계속되는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잃을 수도 있고 더 얻을 수도 있습니다(고전 3:12-15).

중생으로 얻은 구원(영생, 요 5:24)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썩지 않을 씨로 거듭났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요일 3:9; 5:18; 벧전 1:23). 이는 첫 아담이 실패한 언약은 행위언약(옛 언약)이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성취하신 언약은 은혜 언약(새 언약)으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인간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믿음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딤전 1:14; 3:13 딤후 1:13; 3: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는다”라고 했습니다(행 13:48). 만일 첫 아담과 같이 여기서 또 실패한다면 예수로 인한 하나님의 재창조(구속) 마져 또 실패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은 첫 아담과 같이 영생에서 탈락할 수 있는 원죄와 같은 죄를 범할 자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원죄와 같은 죄는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욕보이고 성령을 욕되게(거역)하고 짐짓 범하는 죄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맹렬한 불심판만 기다린다는데 이는 가룟 유다와 같이 하늘의 은사와 성령에 참여했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지(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죄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의미합니다(히 6:6; 10:26-28; 요일 5:16-17).

물론, 중생한 사람도 죄를 범할 수 있으나 그것은 원죄와 같은 ‘주를 부인하는 죄’가 아닌 자범죄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자범죄)까지도 사해주셨다는 보증으로 성령의 인을 치셨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탈락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생하여 구원받은 사람의 범죄(자범죄)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회개와 징계(채찍)라는 방식으로 보응을 받습니다(히 12:4-13). 때로는 그 징계가 성군인 다윗이 왕좌에서 쫓겨나 아들 압살롬을 피해 광야를 떠돌며 원수의 위협과 질병에 시달렸던 것과 같이 무척이나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만일 중생한 사람(구원얻은 사람)이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을 가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그에게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시작하여, 사업의 실패, 가정파탄, 일신상의 질병에도 계속해서 범죄행위를 중단하지 못하면(육성을 이기지 못해) 육신은 사단에게 내어주어 멸하시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신다고 했습니다(고전 5:1~5).

만일, 유업의 상(골 3:24)인 영생이라는, 이미(already) 얻은 구원(요 5:24)을 잃을 수 있다면(Arminianism), 구원을 다시 얻기 위하여 다시 거듭나야 하는데(요 3:5), 그렇다면, 계속해서 영생(구원)을 얻었다, 잃었다를 반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생을 수없이 반복하다 못해 마지막에 취소된(잃은) 중생을 회복하지 못하면 최종 구원에서 탈락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는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의문대로 육신이 모태에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으로(in the Spirit) 나는 것도, 다시 두 번 세 번 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과 출생은 한번(단번)으로 끝나는 것이지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바울이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한 것은 최종적인 죽음이 아니라 성화를 위하여 "매일 같이 자기(육성)를 처서 복종시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출생이란 육으로든 영으로든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지 윤회설과 같이 반복해서 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회적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증거한 대로,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사람을 기록한 "생명책"(The Book of Life)과 행위들을 기록한 "책들"(the books)에 의하여 "영생"과 "상벌"에 관해 심판을 하신다고 했습니다(계 21:11~15). 생명책에 따라 영생이 결정되고 책들에 기록된 대로 상급과 형벌이 결정됩니다. 하기야 어떤이들은 행위에 따른 상급마져 부인하기도 하지만 이는 비성서적입니다.

칼빈은 시종일관 성도의 견인(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은혜(God's absolute sovereign grace)를 강조했으나, 웨슬레이(Wesley)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결론에 가서는 선행적 은혜(prevenient grace)라는 자기 자신의 언어(his own words)로 인간이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the will of man)의 행위(works)에 따라 이미(already)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포기하고 만 결과가 된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구원을 받은 사람도 그의 행위에 따라 결국에 가서는 받은 구원이 취소되어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반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즉 반 알미니우스주의(semi˗Arminianism)로 칼빈주의(Calvinism)와 배치되는, 소위 신인협동설(Synergism)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이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사역(synergism)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독자적인 사역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하나님은 창조역사와 같이 구속역사도 독자적으로 하십니다.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 입장에서 아날로그(analogue) 방식으로 간단히 요약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1) 자범죄를 포함하여 아담으로부터 유전 받은 원죄(peccatum originale)는 하나님의 은혜(사랑)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음으로(엡 2:8) 사함받아 "중생"(칭의)하여 '단번에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고, 이후로

(2)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자신이 범하는 자범죄(peccatum actuale)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처벌은 받되,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영원한 멸망이 아니라, 점진적인 "성화"(고침, healing)를 위하여 징계(채찍)를 받게 되고(히 12:5~13;), 의로운 행위(righteous works)에 대해서는 상급(reward)을 받게 됩니다(계 22:11~12). 이는 행한대로 보응하신다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섭리(Providence)에 의한 것입니다(눅 23:42; 롬 2:6).

[결론] (CONCCLUSION)

저자의 주장: "만약 우리가 육신을 따라 불순종하면서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아래 말씀처럼 영적으로 죽게(구원의 탈락) 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그러므로 은혜가 구원을 받은 이후의 모든 삶을 덮어주기 때문에 구원은 보장된다고 하는 것은, 은혜에 대한 오해(誤解)이며 오용(誤用)이다. 이것은 바른 복음이 아니다. 구원의 과정에서 순종이 면제된다는 언급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저자의 견해)

[정리] (ARRANGEMENT)

이 말씀은 구원론의 "원론적인 말씀"으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서 중생한 사람은 육신이 연약함으로 잠시 실족해서 (일곱번)넘어질 수는 있으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계속해서 범죄하는 것과 달리, 다시 (여덟번)일어나서 성령을 순종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의도적인 불순종으로 범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로 났고,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입니다(요일 3:9; 5:18). 구원을 디지털 방식으로 드려다보면, 중생한 사람은 이미(already) 주님께서 단번에 주신 구원의 은혜로 자범죄(peccatum actuale)를 비롯하여 원죄(peccatum originale)가 영원히 사하여졌기 때문에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여기서 잘못 구원파와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이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드려다 보면, 완성된 구원이 시공의 역사적 타임라인(timeline)에서 성숙해감으로 부활의 영광을 향하여 진행하는 과정(process)으로 아직(not yet) 종말론적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죄의 뿌리가 되는 원죄가 주님의 단번의 속죄로 완전해결 되었기 때문에 구원이 완전하며, 이후에 우리가 범하는 자범죄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완전히 사죄하셨다는 것을 선고(sentence)해주셔서 영원한 의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범죄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성령의 권고로 깨닫고 회개하게 되며 그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심판은 받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책망과 징계로 보응을 받게 됩니다(히 12:5~13).

만일 중생인이 계속해서 범죄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불가운데서 건져내듯(고전 3:15), 육신은 사단에게 내주는 한이 있더라고 주예수의 날에 그의 영혼은 구원하십니다(고전 5:5). 이와 같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 반면에,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이미 경고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엄하신 책망과 채찍으로 무서운 매(징계)를 맞지 말기를 바라며, 오히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의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이생에서도 잘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막 10:30; 눅 18:30)
작성일:2022-09-22 05:31:00 45.49.16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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