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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 바르게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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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등록일
2009-02-25 11:15:17
조회수
5634
거듭남이란 부모를 통하여 어머니에 태속에서 자라고 태어난 것과는 달리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불신자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성령님으로 나는 것, 하늘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청종하게 하시는 역사가 바로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의 외형적인 표는 성령님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불신자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심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삶에 대한 돌이킴 곧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게 됩니다. 또한 성령님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우리는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성령님의 내주함으로나 내주한 이후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성령님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고전 12:3)는 말씀을 그와 같이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고백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사를 전제하는 것이지 성령님의 내주를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사람 속에 거하셔야만 그 사람에게 역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하늘에서도 선택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하도록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오순절 이전에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로서 확증되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에 거하며 성령세례를 기다렸던 제자들은 이미 성령님의 역사로 거듭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집 밖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하늘에서의 성령님의 역사로 인한 거듭남이 논리적으로 앞서 있습니다. 거듭남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 시간적인 간격은 없지만 논리적인 순서는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은 거듭남에 뒤따르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출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 영적 갓난아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출발입니다. 그 앞에 놓여진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라는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선물로 주어진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듭남으로 성령님을 선물로 받는 것은 당사자 내부적인 어떤 변화는 아닙니다. 당사자 내부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라고 이야기됩니다. 달리 본성의 변화라고도 합니다. 새 언약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겔 36:26). 새 마음을 주신다는 말씀이 불신자에서의 마음 자체가 바뀌는 것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선물로 주어짐으로 인해 마음에 미친 영향력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새 마음이라는 표현은 새 언약에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이 되는 사건이 많이 있었지만 새 마음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구원의 백성이 됨으로 마음의 변화 또는 본성의 변화가 있었다고 이야기되는 부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에서는 그 이전 언약과는 달리 성령님이 선물로 주어지고 마음의 변화도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전 언약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큰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마음이나 본성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음으로 인해 그분의 역사와 연관하여 마음의 변화를 말하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새 마음에 관한 말씀이 성령님을 선물로 받는 것과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겔 36:27상). 또한 성령님이 떠나가시는 경우에는 원래의 마음이 남는다고 여겨집니다. 만약 마음 자체가 바뀌었다면 성령님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변화된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이 되는데, 과연 그러한지 의문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거스리는 성령님의 역사(갈 5:17)가 있는 마음이 곧 변화된 마음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거듭남은 그 자체로 자람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자람은 거듭남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음으로 성숙할 수 있습니다. 선행된 하나님의 은혜 곧 성령님의 다스림에 대한 당사자의 바른 반응에 의하여 자람이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아야,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아야만 자랄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야만 자랄 수 있습니다.

그 방편의 중요한 하나가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교회로의 부르심입니다. 앞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에 속하여 돌봄과 양육을 받으며 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성경적인 모습을 세워져가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함께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오늘날의 거듭남 이해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넘어서서 강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출발, 영적인 갓난아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서서 강화시켜 놓았습니다. 거듭남은 그 자체로 자람을 절대적으로 보장하지 않음에도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절대적 견인론자들은 절대적 견인을 반대하는 주장에 대하여 하나같이 “당신은 거듭남이 무엇인지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배교나 실족, 결정적인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는 것,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었다고 판정되는 것은 처음부터 거듭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현재적으로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하여서도 거듭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거듭났으면 그렇게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님께서 행하신 일을 자신들의 생각을 앞세워 무시하며 멸시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성령님의 역사이시고 위에 언급된 경우도 거듭난 것인데도 거듭나지 못하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책상 앞에서 앉아서는 성령님의 역사를 평하고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이들 중에는 가라지가 있습니다만 그러한 상태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 가라지인 것은 아닙니다.

거듭남 간증을 살피면 스스로 거듭났다고 말하는 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 비하여 그 이후에 자신에게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한 간증에 있어서 그 이전을 거듭나지 못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문제입니다(삼* 교회의 손** 목사의 간증과 거듭남 주장이 그렇습니다). 그 이전에 갈등하고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청교도들의 책을 읽고 그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던 모습을 거듭나지 못한 것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 모두는 거듭났기에 나타나는 현상임에도 거듭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되는 거듭남은 신학적으로 제 2의 중생 체험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거듭남 자체가 아닙니다. 체험을 앞세워 이야기되는 엉터리 거듭남 주장인데, 그것을 보편화시키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스스로 거듭나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그 상태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거듭났으나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짊, 예수님을 좇음에 있어서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하지 않음으로 겪는 현실인데도, 거듭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거듭남은 사람의 사모함이나 열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사안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게 하심으로 되는 사안입니다. 거듭남을 사모한다고 거듭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 2의 중생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현재적인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짊, 예수님을 좇음이 없다면 그 체험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제 2의 중생 체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비성경적 거듭남 주장은 결과적으로 교회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이지 못한 주장은 언제나 교회의 약화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교회는 하루 속히 비성경적인 거듭남 이해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성령님의 존재 유무에 대한 추가 설명
바울 사도는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고 말씀합니다. “소멸한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스벤뉘미로서 “불을 끄다, 끄다, 꺼져가다, 꺼지다, 소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불씨가 완전히 사라진다(마 12:20), 등불이 완전히 꺼져서 불을 전혀 밝히지 못한다(마 25:8), 불이 완전히 꺼져서 불이 없는 상황을 가리키며(막 9:48),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없애는 것(엡 6:16)을 뜻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자명합니다. 성령님을 없애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물질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생각이나 뜻대로 없애거나 만들거나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없앤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신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께서 주도적으로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신다는 뜻입니다. 다만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 성령님을 떠나가시게 하시기에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한번 선물로 주어졌기에 기계적으로 죽을 때까지 당사자 안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몸 안에서 장기와 같이 어떤 요소로 존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그 주권으로 어떤 사람에게서는 떠나십니다. 그분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도는 그 사실을 인식하고 성령님이 떠나가시도록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곧 이어서 바울 사도는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합니다. 예언은 미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곧 대언입니다. 계시가 완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말씀을 전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한 문장입니다. 곧 바울 사도가 적고 있는 글을 하나님 말씀 대언으로 받아서 멸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앞 내용을. 넓게는 데살로니가서 전체를, 더 넓게는 신약 성경 전체를. 한번 선물로 주어진 성령님은 절대 그 당사자를 떠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언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작성일:2009-02-25 11:15:17 124.80.24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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