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자유게시판

제목

바른 신학의 영성화

닉네임
강종수
등록일
2009-03-17 10:40:33
조회수
23096

  바른 신학의 영성화     
                             / 강종수목사 (사이버신학교 카페)
                                                 
신학이 비록 성경 자체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논리적 증명과 성경에
의거한 세속문화에 대조된 새로운 역사적 형태의 효과를 기술한다해
도 역시 신학을  합리적인 사고로 볼 때는 관념의 일종으로 보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성경책도 책방가게 어느 한 켠에 꽂혀 누군가에게 팔려
갈 준비를 한 것처럼 어떤 이가 사서 읽고 영적 새로운 가치 이념이
자기 존재에서 역사 속으로 자기  확대의 변화를 가지기까지는 하나
님의 경륜적 계시라는 카이로스의 시간대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그
냥 책이라는 명목으로 보일 뿐이다. 신학이 신학으로만 머물고 있다
면 하나님의 시간대에는 무용지물이 된다.

기독교,예수의 출현에서부터 이방인까지 확대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은 사도들의 증언과  삶-사도행전의 새 역사 장을 지나 차츰 제도화
되면서 기독교의 본질은  어디로 가버리고  하나님의 편에서 우리를
보는 시각에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념의 형태로 수없
이 많은 논증과 부족한 인간의  지혜를 드러내면서 마침내 다원화를
따라 사고(思考)하기에 다소 편할 법한 신학함의 정서가 오늘에까지
온 것같다.
교리와 기독교 신비주의는 결국 신학이 영성화로 승화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불완전한 한 단위의 두 개념화에 이르는 논증의 형식 때문
에 원수처럼 싸우다가도  가끔씩 한 쪽에서  양보하며 수용하려고도
하였고 또 버리기로 반복을 해왔다.

신학은 신앙을 완전하게 증명하는가? 

명제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에  나는 결코 완전한 증명이 불가능하
다 여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을 논증적으로 말하려 할 때 체험
된 개인 양심적 고백과 아울러  정확한 성경의  도안대로 그 사랑을
증명 할 수 있을까? 사랑해야 함에 진실한 양심보다 사랑치 못한 자
아를 역사에 거론하면 그 변명은 양심보다  훨씬 화려하며 아름답게
연출된다.
그러나 한 주간 성도나 이웃에게라도 참 사랑으로 품고 위하여 기도
하고 나서 강단에 서면 미사려구하고 똑 부러지게 잘 표현되는 변증
법적인 설교보다 거저 사랑함에 묻어날 수 밖에 없는 심령으로 성도
를 얼마나 뚫어지게 바라보며 부모가 사랑하는 막내 보듯 그렇게 사
랑하는 맘으로 주시하면서 뭔가를 공급하려는 바램때문에 권면과 축
복의 형용은 좀 어눌하여도 진솔함으로 청중을 사로잡게 된다.

3위1체의 증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 내가 주를 사랑하고 영혼들을 사
랑함에 대한 진실성의 표현방식이다. 대부분 그렇지 않은 것처럼 여
길지 모르지만 쉽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고 외치고,그 21세기
형 난해한 시문학도 못 따를 멋진 형용으로 부르는 하나님을 사랑한
다는 시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혹 신앙이 아니고 신학이 아닌지 모른
다. 믿음의 고백 시(詩)라, 믿음의 고백문이라 하나 혹 우리는 성령
없이 변명에 능통해져버렸는지 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방법은 많이 나왔으니 영성화로 가야한다.

신학함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기준을 바로 잡는 일인데 이제 어지
간한 철학과 신학도 더 이상 추구할 학문분야의 상상도는 그리지 않
아도 될 것같다.
성경 근거를 외도하는 신비주의는 금물이지만 잘된 신학이라도 결국
논증의 신학으로만 그친다면 가끔씩 이단들의 열심보다 못하게 보일
때가 있다. 바울이 율법의 잣대로 그리스도 밖에서 철저하게 죄인으
로 드러난 인간  실존과 그리스도 안에서도 본성과의 싸움이 연속됨
을 피력한  로마서 7장 말미에서 혹 그가 좌절하거나 다른 변명으로
기독인의 정체를 흔들었다면 아마 기독교만큼 난처한 입장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로마서 8장을 건너오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
랑 가운데 속죄함과 믿음으로 새롭게 존재의 변화를  <성령의 법>으
로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게 된다.성령의 법,<신
학의 동력화(動力化)>, <신학의 영성화>가 있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
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충분한 승리를 외칠 수 있었던
그의 고백은 우리들을 위로하였고 우리도 사도들처럼 그렇게 확신을
이어가고 있는 바이다.

최근 교회론에 관련하여 가정교회에 대한 여러 논증을 듣고 함께 연
구하는 마당이지만 본질적인 목표를  위한 방법에 있어서 수용될 부
분이라면 고려할 것이고 그 경유함에 못마땅할 사안이 있다면 한 교
단으로서 같은 신학을 함께  공감하며 가르침을 수용할 자세가 필요
하다 여긴다. 
그렇지 않고 양립될 수 있는 신학적 허용치가 있다면  혹 미움의 정
서같은 것은 버렸으면 좋겠다.바른 이해로 주께 잘 적응함에는 연약
한 인간의 지혜와 그야말로 믿음의 오해가 있기 때문에 조금씩 양보
하면서 가도 늦을 리가 없으리라 여긴다.

부족한 사람은 오늘도 크게 쌓은 지식은 없으나 신학 입학 전에 5질
의 신구약 주석을 프리노트를 하며 읽었고 칼빈주의 중심으로 약 45
0 여권의 책을 읽고 시작하였다. 그 뒤 신학 수업에 필요한 서적 외
몇 권 더 읽지도 못한 것 같다.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 정도의
경험으로도 나는 제 나름대로  과분수가 되어 괜히 머리만 큼직하게
짐처럼 이고 다니는 목사가 된듯해서 요즘은 초기 주님을 만나 거저
앉아 예배에 참석함으로도 눈물이 쏟아지던 때가 그립다. 
남은 세월 그 첫사랑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한다.십자가 주를 보고
있는데도 눈물이 말라버려서  신앙의 위기감을 느낀다고 괴로워하며
울었다던 스펄전을 기억하며......
		
작성일:2009-03-17 10:40:33 121.183.233.177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게시물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최신순 추천순  욕설, 타인비방 등의 게시물은 예고 없이 삭제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