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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이 뜨겁다

닉네임
천헌옥
등록일
2007-05-31 08:36:43
조회수
4799


밀양이 뜨겁다. 경상남도 밀양이 아니라 프랑스 칸에서 아니 이제는 전 세계에서 밀양이 뜨겁다. 바로 칸 영화제에서 영화 ‘밀양’의 주인공 신애 역을 훌륭히 소화해낸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십 수 년이 아니라 수 십 년이라도 된 것 같다. 그러나 마음 단단히 먹고 오늘은 영화관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아서 그녀를 보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벌써 인터넷 상의 한 쪽에는 축하 분위기로 뜨겁게 달구어져 있는 반면 또 다른 한 쪽에는 종교적인 이슈로 달구어져 있다. 바로 기독교에서의 반응 때문이다. 용서를 주제로 비판적 글을 쓰기도 하고 구원을 주제로 글을 올리기도 하고 주인공의 허영으로 인한 비극의 자초라는 등 이러쿵저러쿵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필자 나름의 관찰과 판단이 있어야 하겠기에 극장을 찾아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영화는 문광부 장관을 지낸 이창동씨가 감독을 맡았고 신애역을 맡은 전도연씨가 주연, 조연은 종찬역의 송강호씨가 맡아 열연을 하였다. 감독과 연기자들이 영화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영화의 대략 줄거리는 이렇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신애(전도연)는 그 남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아들 준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온다. 밀양에 거의 다 와서 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카센터에 출장수리를 부탁한다. 카메라가 고장 난 차창을 통하여 비춘 밀양의 하늘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맑은 하늘이다. 密陽(햇볕이 빽빽이 비추다)이라는 제목에 걸 맞는 밀양의 풍경을 보여준다.


출장수리를 나온 종찬(송강호)은 신애를 보자 한눈에 반하고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푼다. 신애는 종찬의 주선으로 피아노 학원을 함께 할 수 있는 집을 구한다. 그리고 매사에 소극적이고 밖을 싫어하는 아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하여 웅변학원에 보낸다. 이제 막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신애는 외지에서 혼자라는 서러움과 따돌림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돈이 많은 사람인양 허세를 부리고 이로 인하여 엄청난 비극을 맞이한다.





단 하나의 정 붙이 아들 준이 유괴되어 살해된다. 범인은 신애의 사정을 잘 아는 웅변학원의 원장이다. 신애는 거의 정신을 잃고 울분 속에서 산다. 그러던 중 이사 왔을 때부터 전도를 하던 이웃 장로의 부인으로부터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기를 권유받고 교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무덤덤하게 구경만 하던 신애는 모든 사람이 흐느끼며 상처를 토하여 내는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참을 수 없는 아픔의 통곡을 쏟아낸다.


하나님도 눈물 앞에 약한 것일까 목사의 발걸음은 신애에게로 향하고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점차 신애의 통곡은 잦아들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듯 보인다. 그것을 계기로 그녀는 교회를 찾게 되고 신앙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이다. 여기까지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믿음을 가지게 된 신애는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 준 것처럼 그도 범인을 용서해야 하겠다고 나선다. 직접 교도소에 찾아가 그를 대면하여 용서를 선포하겠다는 것이다. 목사와 교인들은 그녀의 믿음과 용기에 찬사를 보내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드디어 신애는 교도소 면회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범인과 마주 앉는다. 그녀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러 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범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신애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한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범인의 고백 때문이었는데 자신은 감옥에 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께 회개하였더니 용서를 받게 되었으며 지금은 자신도 마음이 평안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범인과의 면회를 마치고 나온 신애는 주차장에서 기절하고 만다. 이후부터 그녀는 돌변하여 예배를 거절하고 교회 출석을 거부한다. 그녀는 정말 미친 여자같이 거리를 휘 젖고 다니며 나쁜 짓을 하여 하나님과 대결하려한다.

마침내 자신을 전도했던 약사의 남편인 교회장로를 유혹해 야외에서 정사를 가지려다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거리에 뛰쳐나와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병원으로 실려 간다.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새롭게 다시 출발하고픈 그녀는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자르는데 하필이면 미용사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의 말썽 많던 딸이 아닌가.


신애는 미용사가 한쪽 머리를 자르고 났을 때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간다. 그리고 거울을 내다 마당에 놓고 자신의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다. 잘려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마당 구석으로 쓸려가는 곳에는 고인 빗물로 인해 젖어있었다. 그러나 그 위로 햇볕은 따사로이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났다. 필자는 영화를 보러가기 전에 읽은 많은 평들을 보고 나름대로 편견을 가진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서 돌아오는 내내 필자는 그런 편견들을 씻어내려 노력해야 했다.





밀양이라는 제목은 이 영화를 경상도의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넘어서게 하고 있었다. 원저자의 소설을 많은 부분 고쳐서 각본을 새로 썼던 이창동 감독은 상당히 많은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필자는 한마디로 감독이 밀양이라는 제목에서 이 영화의 결론을 관객으로부터 얻어내려 하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영화의 첫 장면도 그랬지만 마지막도 빽빽한 햇볕, 밀양이었다. 밀양(빽빽한 햇볕)은 구석지고 물(눈물)에 젖은 곳에도 어김없이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상징하고 있었다.

신애가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은 다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녀는 후에 남편도 잃고 아들도 잃고 용서할 기회도 잃었다고 울부짖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는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 그녀가 손목을 긋고 죽음에 직면했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겠지만 빈손으로 왔던 인생에게는 아무것도 자신의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로부터 빼앗아 보려고 했던 자신의 그 생명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신애가 점차 변하여 가는 것을 영상에서 보여주려고 애를 쓴 흔적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아파했던 그녀가 교회에서 안정을 얻고 신앙을 가짐으로 극복했다고 보았는데 그것이 시작이라는 메시지로 시작하여 성도가 어떻게 시험을 이기고 극복해 가는 가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 엿보인다.


신애가 범인을 만나고 난 뒤 지금까지의 신앙은 허풍선 같이 무너지고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것은 우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고 점차 대항으로 바뀌어 간다. 그녀는 먼저 예배를 거부하고 교회 출석을 기피한다. 교회에 들어가서 신자들의 기도(하나님과의 만남)를 방해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두 손으로 의자를 두들겨댄다.

자신을 위한 기도모임을 하는 교우의 집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 방해를 하고 레코드가게에서 음반을 훔치고 그 훔친 음반을 가지고 교회의 야외집회에 가서 기도하는 시간에 '거짓말이야' 라는 제목의 노래를 틀어 조롱하며 훼방한다.

그리고 자신을 전도했던 약사의 남편인 교회 장로를 유혹해 야외에서 정사를 가지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늘을 향하여 “보여? 이게 보이냐고?”라고 말한다. 물론 그것은 신애의 하나님에 대한 복수극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반항하며 하나님에게 복수를 하려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신애는 왜 그렇게 하나님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가?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을 빼앗아 가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빼앗아 가고 그리고 마지막 자존심의 보루였던 용서할 기회마저도 빼앗아 갔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복수를 지독히 품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께 복수를 하는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실패한다. 손목을 긋고 자살을 함으로서 하나님께 치명적인 복수를 하려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생명을 구걸한다. 거리로 뛰쳐나가 살려달라고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하나님께 항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나오는 그녀는 이미 변한 모습이었다. 비록 아들을 죽인 범인의 딸에게 머리를 끝까지 맡기지 못하고 뛰쳐나오지만 그녀의 변한 모습은 바로 다음 장면의 길에서 만난 이웃과의 대화에서 읽을 수 있다. 긴 머리를 한쪽만 자르고 나타난 그녀에게 머리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 미용실에서 자르다가 그냥 나왔다고 한다. 그러자 이웃 여인은 "...미친 것처럼...."하고 말을 뱉다가 실수한 것을 깨닫고 당황한다. 그러나 신애는 오히려 긍정한다는 야릇한 웃음을 보인다. 이웃 여인도 따라 웃는다. 여기서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리고 따스한 햇볕이 내리비치는 마당에서 머리를 자르고 그 머리가 날리는 곳으로 카메라가 이동한다. 거기는 간밤에 온 비로 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 위로 햇볕은 내리비친다. 密陽이다. 지나간 날의 비극적인 삶에 흘렸던 눈물 위로도 하나님의 은총의 햇볕은 밀양처럼 부어진다는 메시지였다.



신애의 동생에게 습관적이지만 교회에 나간다고 말한 종찬(송강호)은 마지막 장면에서 머리를 자르는 신애 앞에 거울을 들고 선다. 이 또한 그녀의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어쩌면 그녀는 전도인이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믿고 살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보이지 않는 것도 믿게 된다’는 뜻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햇볕 아래 앉아 머리를 자르는 것도 스스로 하나님의 은총 아래 나아오는 것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많은 것을 시사해 주었다. 영화는 말로만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보여주는 영상을 통해 포괄적이고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은 종교를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을 말하는 영화’라고 했다. 아마 감독의 이 말 속에는 불필요한 종교적 논쟁에 휘말리거나 특정종교 세력의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호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범인의 잘못된 용서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켜 오늘날의 기독교를 돌아보게 하는 선지자적 역할도 하고 있다. 물론 전도자의 거친 말투와 함께 어색한 부분이 없지 않기는 하지만 눈을 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영화를 끝까지 주시해 보면 밀양은 기독교 영화로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메시지를 담은 영화인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랜만에 영화다운 영화를 본 느낌이다.


작성일:2007-05-31 08:36:43 58.127.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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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나 2007-06-09 09:39:33
밀양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공로로 명예 밀양시민증을 받은
이창동 감독과 전도연 그리고 송광호씨...

그런데 송광호씨가 인사말에서 그러더군요
"마지막 장면에까지 따뜻한 햇볕은 비추었다"

아마도 이 영화는 따뜻한 햇볕(밀양)을 이야기하기 위해
secret sunshin 으로 위장한 것이 아닐까요?
천헌옥 2007-06-04 17:26:24
이상욱 목사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아무도 댓글을 안달아서 고신 목사님들 모두 너무 경건해서 영화도 안보나 싶었습니다. ㅎㅎ
먼저 영화를 본 것이 오히려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는데...

이목사님!
저는 영화를 참 몇 십년 만에 본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창동 감독을 잘 모릅니다.
이 작품은 이창동 감독이 원저자가 아닌 줄로 압니다.
이창동 감독이 각색을 해서 영화가 된 것으로 압니다.

전 그냥 제 눈에 보이는대로 순수하게 보고 받아들였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밀양은 종교를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을 말하는 영화’라고 말한 것에서도 전 순수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폄하되거나 어느쪽에서든 영화로 인하여 종교적 논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기독교가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그 말을 던진 것이 아닌가 하는 너무나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이지요.

저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무게를 많이 두었습니다.
빽빽한 햇볕.. 밀양...
그리고 전도인의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된다"는 말....
원저자와 감독은 아무 의미 없이 그 장면을 영화의 시종에 장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신애가 왜 그처럼 미친듯 복수를 하려고 했던가요?
누구를 향해서?
그것은 신애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인정하였기 때문이라고 저는 강하게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이목사님!
관심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만나면 커피라도 한잔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샬롬!
이상욱 2007-06-04 14:18:12
천헌옥 목사님의 사진과 글 항상 '감동'입니다. 국사봉 사진 너무 좋습니다. 눈이 호강했습니다. 포럼에서 가끔 뵈면서도 목사님과 제대로 인사도 못한 처지이지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글과 사진, 순수성, 열정, 여유... 모두가 부럽습니다.

목사님께서 영화 밀양을 보시고 올리신 소감과 분석 잘 읽었습니다. 밀양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를 기독교적 시각에서 해석하시고 오늘의 교회가 생각해야 할 것들을 찾아내시는 통찰력을 보면서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 밀양이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성격, 이창동 감독의 의도와 숨은 메시지를 염두에 둘 때 천헌옥 목사님의 이해와 분석은 너무 기독교적이고 순수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목사님의 소감에 대해 시비를 걸거나 하는 무례한 의도는 없습니다. 이창동 감독에 대한, 그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선입견이 없이 밀양을 본다면 어쩌면 밀양은 화해에 대한, 용서에 대한, 구원에 대한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그간의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나 영화 밀양에 대한 그의 언급 등을 미루어볼 때 그리고 밀양이 던지고 있는 다양한 상징들에 댐긴 메시지를 볼 때, 밀양은 기독교적 구원의 메시지를 담은 영화라기보다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근본적인 구원을 주지 못하는 종교(기독교)의 무력함에 대한 비관적 시각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서 저는 니체를 떠올리곤 합니다.)
저는 이창동 감독이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본 시각이라든가 그의 전작들-박하사탕, 초록물고기, 오아시스-에 숨어있는 기독교에 대한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시각이 밀양에도 여전히 투영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창동 감독 스스로도 밀양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지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용서, 화해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해답을 담고 있는 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밀양을 거대한 비극을 겪고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한 인간이 다시금 무의미로 돌아가면서 겪는 참극이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밀양은 다른 종교들보다 더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해답을 담고 있는 종교인 기독교가 정작 가장 큰 피해자로 고통당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무기력하다는 종교의 무의미성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밀양의 주인공 신애는 교회(기독교)에서 위로는 얻지만 구원은 얻지 못합니다. 종교적 구원이 설 자리는 그 곳에 없습니다. 신애는 근본적 치유를 받지 못합니다. 교회는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처절한 몸부림은 해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보복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는 귀막고 눈먼 하나님일 뿐입니다. 결국 미쳐버립니다. 절망하고 좌절한 그녀, 미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 무너진 그녀를 구원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고, 인간의 무의식적인 삶의 의지(가장 인간적인 내면의 의지)라고 이창동 감독은 소리지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이것은 저의 생각일 뿐이고 어쩌면 이창동이라는 사람에 대한 선입견의 틀에 갇혀서 엉뚱한 상상력을 동원한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저의 좁은 소견이라고 생각하시고 혜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