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토론방

제목

[난제해설] 성령으로 거듭나서 중생한 사람도 결정적인 범죄로 타락하여 구원이 취소될 수 있습니까?]

닉네임
PAUL
등록일
2016-07-22 23:30:21
조회수
5236
[질문]
성령으로 거듭나서 중생한 사람이 다시 결정적인 범죄로 타락하여 멸망할 수 있는지요?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난제가 되는 이유]
이 문제는 성경에서 분명히 히브리서의 말씀(히 6:4~6; 10:26~27)과 요한일서의 말씀(요일 3:9; 5:18) 사이에 상충되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난해한 말씀으로 알고 있습니다.

(1) 히브리서

(히 6:4~6)
“한번 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맞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 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하는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 요한일서

(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낫음이라“

(요일 5:18)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 위의 히브리서와 요한일서 말씀이 서로 상충되기 때문에 난해합니다. 말하자면 상충되는 두 곳의 말씀으로 인하여 성령으로 거듭나서 중생한 사람이 타락할 수 있는지, 중생한 사람이 타락할 수 없는지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난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해석 방법론]
그러나 이 문제는 성경을 잘 들여다보고, 주경신학과 조직신학적인 식견이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난제가 될 수 없습니다. 주경신학적으로 본문들을 잘 살펴보면 본문 자체의 정확한 해석만으로도 판단이 되며, 조직신학적으로 접근하면 더욱 선명하게 분별이 되는 문제입니다. 첫째로 주경신학적으로 본문들을 자세히 살펴서 그 중에 핵심이 되는 키워드들(key words)을 찾아 잘 정리하고 주석을 해나가면 됩니다. 다음으로 조직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God's callings)과 중생(regeneration)의 의미(새로운 피조물인 새 생명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면 이 난제는 시원하게 풀리는 문제입니다.

[답변과 해설]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 교회사의 초세 말에 나타났던 펠라기우스(Pelagius)의 주장을 이어받은 중세의 알미니우스(Arminius)의 주장인 반면에,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은 타락할 수 없다는 것이 초세 말의 어거스틴(Augustine)의 주장을 이어받은 칼빈(Calvin)의 주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알니미안주의에서는 인간이 중생 후에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견해이고, 칼빈주의에서는 인간이 성령으로 중생한 후에는 결정적인 타락이 있을 수 없다는 견해입니다. 이 문제는 알미니안 파 중에 극단파인 항론파(Remonstrance)와 칼비주의자들(Calvinists)과의 치열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모였던 돌트회의(the Synod of Dort)에서 항론파에 대한 이단정죄로 일단락이 된 문제입니다.

그 당시에 항론 파(Remonstrance)에 대항하여 칼빈주의에서는 (1)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ation/Total inabil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efficacious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등 칼빈주의 오대교리(The Five Points of Calvinism)를 확정시킨 것입니다. 이 중에서 (4) 불가항력적 은혜와 (5) 성도의 견인의 조항에서 택함 받아 중생한 자들의 타락을 허용치 않는다고 확언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란 기왕에 타락할 수 없는 성질로 변화된 몸이기 때문에 타락이 불가능하다는 원리입니다. 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기 위해서 두 가지 접근방식, 즉 주경신학적인 접근방법과 조직신학적인 접근방법을 사용해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1. 주경신학적인 접근 (Exegetic Theological Approach)

이 방법은 이에 관련된 성경 본문들을 정확하게 주석함으로써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관련된 본문들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성경해석의 툴(tools)이 필요합니다. 이 툴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잘못된 해석을 하거나 본문과는 전혀 무관하게 엉뚱한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제시된 성경본문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와 주변 구절들(문맥과 스토리)의 배경과 성경 전체의 원리에 의해서 그 뜻이 정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A) 히 6:4~6 말씀

“한번 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맞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1) “한번 비췸을 받고”라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 곧 복음을 받아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하며,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라는 말씀은 성찬으로 암시된 하늘의 영적인 은사를 맛본다는 뜻이며,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라는 말씀은 오히려 “성령의 은사에 참예한바 되고”라고 이해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경험을 말하며, “선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말씀”(마 7:21,22) 즉 복음을 의미하며, “내세의 능력”은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영적인 은사들은 “복음의 빛을 통하여 받는 영적인 축복들”이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중생의 은혜”와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거론하겠지만, 그러므로 이러한 은사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외적인 부르심(external calling)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영적인 은사(spiritual charismata)라는 것입니다.

(2) 이러한 영적인 은사들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의 운명은 결정적인 것입니다.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기가”는 그 원인이 다른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짐짓 범죄한 자가 “자기”라는 뜻입니다. 그 범죄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는 후천적인 자범죄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이어받은 원죄와 같은 죄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죄는 다시 회개할 수 없는 배교의 행위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영적인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사람은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이 아니라, 외적인 부르심에 의하여 가룟 유다와 같이 영적인 성령의 은사만을 받고 배교를 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B) 히 10:26~27 말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하는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이 말씀은 바리새인과 같은 자를 의미합니다.

(1) 이 말씀은 히 6:4~6의 말씀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말씀입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은 복음을 듣고 연구하고 깨닫는 지식이긴 하지만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지식을 말합니다. 남은 가르치되 자기를 가르치지 못하는 지식을 의미합니다(롬 2:21). 뿐만 아니라 자기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지식이 아니라, 남은 구원하고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 지식으로, 이러한 지식을 받은 후에도 죄를 짓게 되는데, 더 나가서 “짐짓 죄를 범하면”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무서운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2)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짐짓 범죄 함”인데 이 말씀은 구약(율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출 21:14),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그쳐질 것이라”(민 15:30). 이러한 경우는 의도적으로 지은 고범죄(시 19:13)로 성령을 거역하고 훼방하는 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거역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마 12:31; 12:32; 막 3:29). 이러한 죄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지을 수 있는 죄가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 했기 때문에 지을 수밖에 없는 죄입니다.

(결론) 그러나 이 두 구절들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의 은혜를 받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가룟 유다와 같이 성령의 외적인 “사역은사”를 받고 타락의 길을 가는 “배교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중생”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절대로 결정적인 타락을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조직신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과 “성도의 견인”에서 입증됩니다.

2. 조직신학적인 접근 (Systematic Theological Approach)

이 방법은 이에 관련된 성경 본문뿐만 아니라, 전 성경의 원리를 통하여 체계적으로 증명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조직신학에서 이 문제는 구원론 중의 중생 론에서 다루게 되는데, 중생은 단회 적이라는 데 근거를 두고, 이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 절대로 실패가 없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물론 이 원리는 창조가 실패가 아니라 마지막 완성으로 마친다는 원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첫 아담을 통한 일시적인 실패(?)를 둘째 아담(예수 그리스도)을 통하여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아담이 뱀으로 형상화된 마귀에게 일시적으로 실패를 했지만, 둘째 아담(예수 그리스도)을 통하여 두 번 다시는 일시적이라도 실패를 허락지 아니 하신다는 뜻입니다.

첫 아담은 선악과를 통한 시험에서 마귀에게 유혹을 받아 타락했지만(창 3:1~24), 둘째 아담은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시고(마 4:1~11),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신바, 이 역사를 위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셨는데, 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고 하심으로(롬 11:29) 하나님의 부르심(God's calling)에 합당한 승리를 선언하심으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요 19:30).

(1) 하나님의 부르심 (God's Calling)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선언했습니다.(롬 8:28~39)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1) 위의 바울의 증거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로 난자는 절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지지 않는, 말하자면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고부동한 성경의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제시한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도 타락한다는 히브리서의 말씀들은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중생하지 못한 사람 즉 택함 받지 못한 사람으로, 외적인 성령의 은사(능력)만 체험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좀 더 체계적으로 설명하자면, 성령을 받는 것을 한 가지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보면, 같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각각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역사로 임하십니다.

(1) 중생케 하시는 성령(regenerating Spirit) (단회적인 성령세례)
(2) 성화시키시는 성령(sanctifying Spirit) (계속적인 성령충만)
(3) 은사(능력)를 주시는 성령(empowering Spirit) (계속적인 성령충만)

2) 앞에서 언급한 히브리서의 성령의 은사는 (1)번의 성령을 통한 중생이 아니라, (3)번의 성령을 통하여 받은 은사(능력)를 의미합니다. 앞의 세 가지 성령의 은사 중에서 (1)번의 중생의 은혜를 받아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고, 다시는 원죄와 같은 죄를 짓는 타락이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한 사람은 베드로와 같이 절대로 결정적인 타락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외적인 은사만 받은 사람들은 가룟 유다와 같이 결정적인 범죄로 타락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2) 인죄론과 구원론 (Anthro-hamaltiology and Soteriology)

이 문제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적으로 볼 때 인죄론(anthro-hamaltiology)과, 구원론(soteriology) 중에서 하나님의 부르심(God's calling)과 중생(regeneration), 그리고 사역의 은사(ministerial charismata)의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선명하게 해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 타락하면 다시는 회개케 할 수 없으며 무서운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은 신학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1) 첫째로, 인간이 범죄 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지옥에 들어가는 문제는, “인죄론”에서 다루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인간이 지옥에 들어가는 것은 자범죄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물론, 원죄가 해결된 사람도 자범죄를 지을 수 있지만, 죄의 뿌리와 같은 원죄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자범죄로 인한 보응은 받지만 지옥에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원죄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의 자범죄는 원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원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그 자범죄도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원죄와 자범죄를 가리지 않고, 사람이 원죄뿐만 아니라 자범죄를 지어도 지옥형벌을 받는 것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지옥에 가는 것은 자범죄가 아니라 원죄로 인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원죄를 해결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중생은 새로 거듭나서 원죄와 같은 죄를 지을 수 없는 몸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2) 둘째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중생, 그리고 은사를 이해하면, 이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조직신학에서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에는 외적 부르심(external calling)과 내적 부르심(inner calling)으로 구분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입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이해하면 두 국면으로 보이지만, 디지털 방식으로 보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 중에 우선하는 것이 바로 외적 부르심(external calling)으로 이 부르심에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다시 말하자면, 외적 부르심이 내적 부르심(inner calling)으로 연결되어 거듭나게 하는 중생(regeneration)에 이르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중생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은사(charismata)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다시 쉽게 정리하면,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으로 인한 “은사”(능력)를 받는 것과 내적 부르심으로 인한 “중생”으로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중생”에 의한 것이지 “은사”(능력)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을 받아 귀신을 좇아내고, 병을 고치고, 복음을 전했다 하더라도 중생하지 못했다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주님의 이 말씀의 뜻은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은사와 능력을 받음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중생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3) 중생한 사람의 타락 (범죄)

중생한 사람은 절대로 타락하지 않는 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타락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확고한 증거입니다. 더 강력하게 말하자면 범죄할 수 있는 자유마저 없는, 차원이 다른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타락은 궁극적인 타락을 의미합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종류와 성격부터 알아야 합니다.

1) 원죄 (Peccatum Originale)

중생한 사람은 이 원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원죄는 우리의 시조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로 이 죄 때문에 우리가 저주를 받아 궁극적으로 지옥에 들어갑니다. 이 죄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거듭나야, 즉 중생해야 되는데, 그러므로 우리가 이 원죄를 해결하고 중생해야 하나님 아버지 집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원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 는 바로 이 원죄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 원죄 또는 이 원죄와 같은 죄(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과 동시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다시는 원죄와 같은 죄를 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중생한 사람은 원죄와 같은 죄를 인하여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이 다시는 원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요한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로 났고 그 속에 말씀의 씨가 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둘째로, 주께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이 말씀을 요약하면, 본질적으로 우리가 죄의 몸이었던 것이 본질적으로 의의 몸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앞으로도 다시 죄를 지을 수 있다면,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실패하실 수 있다는 것과, 하나님 자신마저 피조물과 같이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로 그의 하시는 일은 실패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만일 인간이 중생하고도 다시 타락할 수 있다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또 다시 중생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 1:3)로 말미암아 중생한 사람이 평생토록 중생을 반복해야 할 것이니, 그러한 믿음은 구원의 확신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범죄 하여 타락했다가 다시 회개하여 중생하고, 또 다시 범죄 하여 타락하면 또 회개하여 중생하는 반복된 생활을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도 없지만(히 6:4~6; 10:26),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을 장담할 수 없으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더 피곤하실 것이며 걱정이 태산 같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신 구원의 믿음은 단회 적이며, 그러므로 중생도 단회 적이고, 구원도 단회 적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구원”이라는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개인 영혼의 구원에 관한 문제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영혼이 천국에 가기 위하여 받은 “중생”에 의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단회 적이며 그러므로 중생도 단회 적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 다시 나야 할 필요가 없는데, 이는 둘째 아담(예수 그리스도)으로 인한 구원이 단번에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두 번 다시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영혼이 성장해가는 과정, 즉 “성화”의 과정을 뜻하는 구원으로 이것은 계속적으로 성령을 충만 충만하게 받아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가기 위한 구원은 즉각적으로 단번에 주신 “중생”을 의미합니다.

중생이란 율법학자 니고데모가 생리학적으로 생각했듯이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증거 한 말씀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합니다. (요 3:3~6)

① 천국에 가는 조건: 중생 (거듭남)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② 중생의 의미와 원리: 영적인 의미와 원리
(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생물학적 원리)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영적 원리)
③ 성령으로 난 사람: 인간이 확실히 알 수 없음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요 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요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중생한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롬 8:35). 다시 본질 론으로 말하자면, 변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는 “육신인간”이 다시는 변할 수도 타락할 수도 없는 “신령한 몸”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다시는 범죄 할 수 없는 몸으로 변화되기 때문이 중생한 사람은 타락할 수 없다는 원리입니다. 이는 자범죄는 언제라도 지을 수 있지만 원죄와 같은 죄를 다시는 지을 수 없는 변화된 “신령한 몸”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2) 자범죄 (Peccatum Actuale)

그러나 중생한 사람도 자범죄는 지을 수 있습니다. 자범죄는 후천적인 것으로 각자 자기가 짓는 죄를 말합니다. 중생인이 이 죄로 인하여 보응(징계)은 받게 되지만(히 12:5~13) 궁극적인 멸망 즉 지옥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중생한 사람도 아직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육성에 끌려 실족하여 자범죄를 범할 수는 있지만, 고의적으로 짓지는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육신이 약하여 짓는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그 실례가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베드로는 중생의 체험과 고백으로 믿음의 씨 즉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었고(요일 3:9), 그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되살아나도록 주님께서 아버지께 부탁을 하셨는데(눅 22:31) 이것이 주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말씀입니다(요일 5:18). 그러나 이 자범죄도 원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죄와 연결되어 있는 자범죄는 원죄에 따라 지옥으로 가는 죄가 됩니다.

(4) 사망에 이르는 죄 (Sin unto Death)

요한은 원죄와 자범죄를 또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원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요 자범죄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입니다. 물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롬6:23). 그러나 모든 불의가 다 죄로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는가 하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다고 사도 요한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요일 5:16~17). 물론 사망에는 일시적인 육신의 사망과 영적인 영원한 사망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죄로 인한 것이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사망은 육신적인 사망이 아니라 영적인 사망을 의미합니다.

근본적으로 사망은 인생의 과정 속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생래적으로 타고 나온 것입니다. 말하자면 원죄로 인하여 “처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죄나 원죄에 결부된, 원죄에 부응하는 죄에 의해서 사망이 결정되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인론적으로 말하자면 “원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고,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원죄와 같은 죄”로 사망에 이르는 것인데, 이 원죄와 같은 죄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과 같은 배교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두 죄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죄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결국 원죄와 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원죄를 해결한 사람은 원죄와 같은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중생한 사람은 원죄가 해결되었음으로 원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지만,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그의 원죄의 연장선상에서 원죄와 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짓는 원죄와 같은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했고, 이와 같이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조차 없다고까지 요한이 말했습니다(요일 5:16). 이러한 죄는 “회개케 할 수 없는 죄”로 회개가 되지 않고(히 6:6), 속죄할 제사조차 없다는 것입니다(히 10:26).

이 경우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가룟 유다의 경우입니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외적인 부르심(external calling)에 의하여 주의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직분중의 하나인 재정을 담당하고 항상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주님의 곁에서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생의 은혜를 입지 못하여 결국 제 갈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단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던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마 26:24; 막 14:21; 눅 22:22). 그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에 동참하고 나서 몹시 후회를 하고, 자기가 무죄한 피를 팔았다고 그 판돈을 제사장들에게 갖다 던지면서 창자가 터져 나오도록 곤두박질하여 죽었지만(마 마 27:2~5; 행 1:18) 회개가 되지 않았습니다.

(5)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Sin not unto Death)

요한은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는 반면에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다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요일 5:16~17). “원죄”와 “원죄와 같은 죄” 즉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죄는 다시는 회개할 수 없고 결국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지만(히 6:4~6), 원죄와 연결되지 않은 자범죄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지은 형제들을 위해서는 기도를 하되,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서는 구할 필요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죄를 짓는 사람을 소위 이단자 또는 배교자라고 합니다. 이단과 배교자는 구원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원죄를 해결 받은 사람이 짓는 자범죄를 의미합니다. 원죄는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한 번에 해결이 됩니다. 이와 동시에 중생의 선물을 받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한 사람은 원죄가 해결된 후에도 자범죄는 지을 수 있지만, 그 자범죄로 인하여 지옥에 가지는 않습니다. 원죄가 해결된 사람은 자범죄를 지어도 원죄와 같은 죄, 즉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죄는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은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죄와 연결된 자범죄가 아니라 원죄와는 상관이 없는, 말하자면 원죄를 해결 받은 사람의 자범죄는 회개가 가능하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게 됨으로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경우에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베드로도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판 것과 버금가는 죄, 즉 세 번이나 그것도 저주하면서 주님을 부인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좀 더 심각하게 말하자면, 가룟 유다와 같은 죄를 지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가룟 유다와 같이 회개를 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져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회개하고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여기 가룟 유다와 베드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원죄와 같은 죄 즉 주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말하자면 원죄와 연결된 자범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원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이 원죄와 연결된 자범죄를 지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죄를 해결 받지 못함으로 인하여 중생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를 할 수 없는, 말하자면 회개가 되지 않는 상태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원죄를 해결 받고 주님을 향하여 신앙고백까지 했기 때문에, 주님을 부인하는 그의 자범죄는 원죄의 효력이 없는 죄가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말하자면 회개가 가능한 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원죄와 끊어진 즉 원죄와 상관이 없는 자범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은 불신자와 같이 자범죄까지도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회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그렇게 후회하면서 자살까지 했지만 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마 26:24).

이러한 관계를 믿음과 회개라는 차원에서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믿음으로 주님을 따랐고 주의 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믿음과 베드로의 믿음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믿음은 중생과는 관계가 없는 사역을 위한 믿음에 불과하지만, 베드로의 믿음은 중생의 믿음과 사역의 믿음을 함께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결정적인 순간에 가룟 유다는 회개를 할 수가 없었고, 베드로는 회개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가룟 유다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자책했지만 구원에 이르는 중생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회개하지 못하고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중생의 믿음이 작동하여 회개를 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문제를 좀 드라마틱하게 메타포(metaphor)를 사용하여 설명해보겠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똑 같이 “사단”이라는 영적인 “바이러스”가 그 속에 들어가(눅 22:3; 눅 22:31; 요 13:27; 마 16:23; 막 8:33) 영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똑같이 주님을 파는 죽을병이 걸린 것입니다. 그 결과로 가룟 유다는 죽었고, 베드로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왜일까요? 가룟 유다는 그 속에 믿음의 항체(antibody)가 없었고, 베드로에게는 믿음의 항체 즉 “말씀의 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항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방주사를 맞아야 생기는 법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바이러스인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과 같이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번했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그러나 베드로는 사단이 들어가 밀 까부르듯 하겠으나 주님께서 아버지께 간구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기 때문에 회개하여 돌이켰고, 돌이킨 후에 더욱 믿음을 굳게 하여 주의 사역에 복귀하게 된 것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다시 말하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예방주사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 속에 믿음의 항체가 없었으나, 베드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예방주사를 맞고 그 속에 믿음의 항체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바이러스 “사단”이 가져다주는 죽을병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경우를 좀 더 드라마틱하게 설명하자면,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죽을병에 걸려서 다른 사람들과 모닥불을 쪼이며 벌벌 떨고 있을 때, 그곳에 있던 세 사람이 연속해서 베드로가 주님과 관련된 자라고 고변하니까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는데, 특히 마지막 세 번째 사람이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하니까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로 부인했습니다. 이 대목은 인간은 연약한 존재로 범죄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향해 철저하게 신앙고백을 하고 중생한 베드로가 다시 범죄 하여 타락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베드로의 범죄 즉 베드로의 타락은 궁극적인 타락이 아니라 일시적인 범죄로 자범죄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진행되는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확실히 드러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그것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 한 후에,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베드로의 속에 주님께 예방주사를 맞은 후 형성되어 있던 믿음의 항체가 작동하는 순간(Καίρος)이 있었는데 그 때가 바로 속에 있던 베드로의 믿음이 작동하는(working time) 순간입니다. 이 잠자고 있던 믿음이 작동하기 시작한 동인(the causes of move)에는 두 가지 자극제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오디오 시스템(audio system)인 “닭의 울음소리”입니다.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4~75). 이 "닭의 울음소리“를 통하여 주님의 말씀으로 형성되었던 믿음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닭의 울음소리”를 통하여 들려온 주님의 말씀이 재생(revival)되어 그의 가슴을 때리므로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에게 맞았던 예방주사로 인하여 형성된 “믿음의 항체”가 작동하는 순간입니다.

둘째가 비디오 시스팀(video system)인 “주님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박되어 끌려하시는 주님의 뒤 보습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도 끌려가시면서 뒤를 돌아다보셨습니다. 이때에 주님의 시선과 베드로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 순간 영적인 불꽃이 튀었습니다. 주님의 강력한 시선의 능력에 압도되는 순간 베드로의 가슴은 벼락에 얻어맞듯 충격을 받고 주를 부인한 죄책감을 못 이겨 그대로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처절한 자신을 바라보고 통곡하는 베드로의 회개장면입니다. 이렇게 하여 베드로는 가룟 유다와 같은 심각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여 회복되었는데, 이 베드로의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결론]
간단히 결론을 내리자면, 중생한 사람은 자범죄는 지을 수 있어도, 원죄와 같은 죄를 짓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고(요일 3:9), 또 주께서 저를 “지키시기 때문”에(요일 5:18) 원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중생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원죄와 같은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으로 해결된 원죄가 다시 살아날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육신을 벗어버리는 순간까지 중생한 사람들도 자범죄는 지울 수 있지만, 원죄와 같은 죄를 지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원죄는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하여 단번에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해결되지만, 자범죄는 육성에 끌려 죽는 날까지 반복해서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옥에 들어가는 것은 원죄에 의한 것입니다. 원죄를 해결 받은 사람의 자범죄는 회개가 가능하며, 근본적으로 그 죄로 인하여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으며 멸망하지 않습니다(눅 22:3; 요 6:39, 40; 10:28, 29; 17:2, 6, 11, 12; 롬 8:30; 11:29; 빌 1:6; 살전 5:23; 살후 3:3; 벧전 1:4, 5; 요일 3:9; 5:18).

물론,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는 죄 즉 회개가 되지 않는 죄가 있는 반면에,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원죄와 상관없는 자범죄)도 있는 것입니다. 전술한 히브리서의 구절들은 원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들로 사역을 위한 성령의 은사는 맛보았으나, 근본적으로 중생을 위한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하여 하나님의 자녀(장자)의 명분을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혹자는 그러면 중생한 사람들은 맘 놓고 죄를 지어도 되지 않겠느냐? 고 반문하지만, 사실 중생한 사람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그 속에 성령이 내주해 계시기 때문에 범죄 할까 더욱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Systematic Theology (Professor)
REV. PAUL B. JANG
e-mail: revpauljang@hotmail.com
website: www.mission4.org (한글)
website: www.usmission4.org (영문)
작성일:2016-07-22 23:30:21 107.184.13.18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게시물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최신순 추천순  욕설, 타인비방 등의 게시물은 예고 없이 삭제 될 수 있습니다.
koramdeopaul 2016-11-25 17:21:32
중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중생의 참뜻을 살펴보시고
성경말씀의 지원을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님의 말씀대로라면, 한국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회 교인들은 모두 다 이단일 것입니다.
설령, 님과는 달리 중생의 교리를 믿는다고 해서
이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shm100 2016-11-19 21:36:21
중생한 자들도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이단 사설에 오염되면 자동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koramdeopaul 2016-07-28 22:54:08
성령의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하고도 중생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재정을 맡아 일하며 다른 제자들과 같이 나가서 전도를 하고 능력을 행했습니다. 주님께서 가롯 유다를 비롯하여 제자들에게 능력을 부어주어 전도하며 능력을 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그러나 예수께서는 능력행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구원받는 것으로 기뻐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18~20). 가룟 유다는 열 두 사도들의 한 사람으로 불림 받아 주의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좋았던 사람입니다(마 26:24). 신학에서 이러한 사람을 유기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선택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중생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요 3:3~5). 극단적인 예로 우리가 보통 자살한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단 마디로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예로 뇌에 손상을 입어서 치매환자와 같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자살하는 예도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문제로 우리가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중생하지 못했다면 구원 받지 못한다”라고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했다고, 주여 주여 했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 것으로 이것이 구원의 표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phj3168 2016-07-28 18:19:56
<정말 잘 정리가 되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의 궁금함인데요, 중간에 보면
이러한 관계를 믿음과 회개라는 차원에서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믿음으로 주님을 따랐고 주의 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믿음과 베드로의 믿음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믿음은 중생과는 관계가 없는 사역을 위한 믿음에 불과하지만, 베드로의 믿음은 중생의 믿음과 사역의 믿음을 함께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러면 가룟유다에게 주어진 믿음은 사역을 위한 믿음인데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진 믿음인가요?
koramdeopaul 2016-07-28 13:13:18
위의 글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그것에 대한 답이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신학적인 전문용어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외적 부르심(external calling)이 있는데 이것은 중생과는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경우입니다. 교인들 중에 교회에서 열심히 일한다고 다 중생의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내적부르심(inner calling) 즉 중생을 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알곡과 죽정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받을 사람은 중생과 함께 외적인 은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열심이 있다고 해서 다 중생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주를 위해 열심이 일을 하고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마 7:21~23; 히 6:4; 히 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