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설교한편

제목

떠오르는 도끼 [왕하 6:1-7] 송명목 목사

닉네임
황 창 기
등록일
2007-09-26 09:53:46
조회수
6127
지난 23일 대학교회에서 송목사가 설교한 것입니다.홈피에지에서도[www.daehaak.org]들을 수 있습니다. 이 본문으로 어떻게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지 살피시기 바랍니다.[그리스도 완결 설교] 황창기
.....................................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과 같이 호숫가를 거닐 때, 금도끼와 산신령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정직한 나무꾼이 나무를 베다가 그만 도끼를 연못에 빠뜨리고 말았단다. 그 때 연못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이 금도끼가 네 것이냐?" 라고 물으니, 정직한 나무꾼은 "아닙니다"고 말했단다. 산신령이 다시 나타나서 "그러면 이 은도끼가 네 것이냐?" 물으니 역시 아니라고 말했단다. 산신령은 정직한 나무군에게 쇠도끼는 물론 금과 은도끼도 선물로 주었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도 정직해야 된다 알겠지?"라고 교훈의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미끄러져 깊은 호수에 빠져 버렸습니다. 이 때 산신령이 나타나서 울고 있던 아들에게, 잘 생기고 돈 많고 멋진 아저씨를 보여주면서, "이 아버지가 네 아빠냐?" 라고 물어봅니다. 그 때, 아들은 "아니요. 우리 아버지는 못 생겼고 돈도 별로 없어요"라고 대답합니다. 이 때 산신령은 성격이 좋아 보이고 멋지고 돈 많은 다른 아저씨를 데리고 호수 위로 나타납니다. "이 사람이 네 아빠냐?" 아이는 "우리 아빠는 용돈도 안주고 잔소리만 합니다. 그 아저씨도 우리 아빠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때 산신령은 원래 아빠에다가 처음에 나타난 두 아저씨도 아이의 아빠로 주겠다고 말하며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왕하 6장의 사건도 정직하게 살면 복받는다라는 교훈을 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지: "나는 말씀에 순종하여 회복을 받아야 한다."

첫째로, 왜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여 회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기업 무를 자-고엘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의 빚을 청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이런 내용입니다. 때는 BC 830년경이었습니다. 엘리사 당시에 선지자를 양성하는 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생이 많아져서 공간이 비좁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선지 생도가 엘리사에게 신학교 건물을 확장하자고 제안합니다 (1절). 비록 아합왕과 여호람왕 같은 악한 왕들이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지만, 선지 학교는 계속 흥왕하여 구약의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있음을 봅니다. 실제로 엘리사선지자 당시에 벧엘, 여리고, 길갈에 선지자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왕하 2:3, 5, 4:38). 그들은 지금의 수도사와는 달리 결혼도 했습니다. 선지생도와 엘리사는 요단강 가의 숲에 가서 나무를 베어 와서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2절). 여리고나 길갈에서 요단강까지는 10km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요단강둑에는 아카시아, 버드나무, 플라타너스와 같은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렘 49:19). 아니면 요단 강 근처에 선지학교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도 요단강으로 함께 갑니다. 나무를 열심히 베던 중 한 선지 생도가 그만 도끼날을 요단 강물에 빠뜨리고 맙니다 (5절). 선지생도는 "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입니다!"라고 소리칩니다 (5절).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도끼날이 어디 빠졌느냐?"라고 물으니 선지 생도는 저기에 빠졌다고 가리킵니다. 엘리사는 나무 가지를 베어 물에 던집니다. 그러자 도끼가 요단강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6절). 그래서 그 선지 생도가 도끼날을 다시 취합니다 (7절).

출 22:14-15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빌어온 것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빌려준 사람에게 배상해야 합니다. 엘리사 당시 쇠는 귀한 물품이었기에 도끼날은 상당히 비싼 것이었습니다. 도끼날을 찾지 못한다면 빚을 져서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노예 비슷하게 지내야만 합니다. 도끼날을 되찾아 줌으로써 엘리사는 그 선지 생도를 노예로 팔리지 않도록 해 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선지자 엘리사는 그 선지 생도의 기업 무를 자 즉 고엘입니다. 기적적인 방식으로 중력을 거스려서 도끼날이 떠오르도록 한 것은, 장차 하나님께서 죽음과 종됨과 빚에서 사람을 해방시킬 것을 내다보게 합니다. 엘리사는 이 일을 나무 가지 하나를 던져서 기적적으로 행합니다. 우리는 그 나무 가지가 무엇인가,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장 5조에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어떤 수단도 없이, 혹은 수단을 초월하여, 혹은 수단에 상치되는 방식으로도 자신의 섭리를 이루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 증거 구절로 왕하 6:6절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나뭇가지 자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나뭇가지가 평범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서 사용되면 중력의 법칙도 어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는 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기적이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해서 무언가를 가르쳐 준다는 사실입니다. 도끼날이 물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른 것에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요나 선지자가 바다 속에 던져졌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만에 나와서 육지에 토해진 것과 비슷합니다. 선지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3일 동안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잡혀갈 것을 상징합니다. 요나가 해변가로 나온 것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상징합니다. 마찬 가지로 이 도끼날이 강에 빠졌다가 떠오른 것도 장차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올 것을 상징합니다. 열왕기하의 원래 독자들은 바벨론 포로 중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왕하 6장의 이 기적 사건을 읽을 때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믿으면 포로에서 기적적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죄의 빚을 갚지 못하자, 하나님은 이방 나라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는 죄악의 빚 때문에 사단에게 팔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업 무를 자로 자청하여 역사하셔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복된 자로 사는 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여 회복을 경험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상의 도피성을 건축하는 남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왕하 6장을 읽어 볼 때 상세한 정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도끼를 다시 찾아서 선지학교를 완공했는지? 어디에 완공했는지? 정보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본문의 기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를 믿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긴급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에게 신속하고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신속하고도 결정적으로 도와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코틀란드의 아버딘대학교의 John Gray교수는 왕하 주석을 쓰면서 엘리사가 실제로 도끼날을 떠오르도록 한 것이 아니라, 긴 장대를 가져와서 도끼 자루를 끼는 구멍에 넣어서 건져내었을 거라고 주석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않으려고 작정한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자세는 교회로부터 생명력을 빼앗아 버리는 죄요 악한 일입니다. 하지만 (도끼가) '떠오르다'라는 말이 히브리어 '추프' (사역형, to swim)으로 나타나 하나님께서 도끼가 물 위로 수영하듯이 떠다니게 하심을 강조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기적으로 그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다급한 상황에서 건져내실 수 있음을 믿읍시다. "나의 형편을 아시는 주여,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라도 건지시고 기적을 베푸시옵소서"라고 간구합시다.

그러나 이 기적은 그 이상을 가르쳐 줍니다. 이 단순해 보이는 사건에 심오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엘리사 당시의 선지 생도는 그 당시에 하나님의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합왕이 속한 오므리 왕조의 죄악과 우상 숭배에 굴복하지 않고, 탈출하여 선지학교를 더 확장하려고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은, 금, 보화로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었듯이, 그들도 우상 숭배에서 탈출하여 하나님의 선지 학교를 세웁니다. 그 선지 학교는 마치 오므리 왕조의 죄악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도피성과 같습니다. 그러나 건축 프로젝트에 어려움이 따릅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때는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도피성은 남은 자들의 공동체임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은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의 도피성에 피한 사람들은 대제사장이 죽으면 무사히 밖으로 나와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민 35:25). 마찬가지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는 도피성에서 생명과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의 도피성,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의 도피성, 병든 자들의 도피성입니다. 죄인의 괴수라도 도피성에 들어오면 살 수 있습니다. 이제 교회가 도피성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말씀에 순종하며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성령충만한 가운데 새 생명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사건이 요단강에서 일어난 것에 주목합시다. 물에 잠겼다가 떠오른 도끼는 장차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올 것만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요단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내다봅니다. 우리가 읽은 마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요단강으로 내려가셔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셨고, 그 후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롬 6:4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벧전 3:21절에서 우리가 받은 세례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과 함께 죄에 대해 죽었습니까? 그렇다면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서 삽시다. 그리고 엘리사가 도끼를 떠오르게 했듯이, 예수님도 물 위를 걸으심으로써 중력의 법칙을 어기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연을 다스리는 왕이심을 증거 할 뿐 아니라, 장차 물 즉 이방 나라에 예수님이 복음이 전파될 것을 내다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업 무를 자이신 예수님 때문에 살게 되었습니다. 죄악의 빚에 빠져서 도무지 갚지 못할 처지에 있었지만, 예수님이 기적같이 우리를 건져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례를 받은 자로서 죄악에 대해 죽고, 새 생명, 부활의 생명을 즐겨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죄악 중에 출생하여 죄을 지어 빚 때문에 사단과 죽음에 팔린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기업 무를 자이신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계속해서 어지러운 세상을 안심시키고, 죽음의 종 노릇하는 사람들을 살리는 도피성으로 살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충만하여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 죽고, 옛 성품을 물에 장사지냅시다. 하나님을 향해서, 의를 행해서 삽시다. 아멘.
작성일:2007-09-26 09:53:46 125.189.35.5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게시물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최신순 추천순  욕설, 타인비방 등의 게시물은 예고 없이 삭제 될 수 있습니다.
Christpanta 2007-09-26 10:19:14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함께 죽고 부활한 우리가 그 십자가 부활 사건을 렌즈로 구약을 읽는 안목이 돋보이는 설교이지요. 오무리 왕조때문에 피폐한 이스라엘 중에서도 엘리야, 엘리사를 중심한 언약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를 못보면 이런 설교가 나올 수 없지요! 교인들이 은혜받는 것을 보면서 감격적으로 설교를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