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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한편

제목

새 아담인 에스겔 (계10:8-11; 겔 2:1-3:3) 송영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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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창 기
등록일
2007-10-05 10:13:43
조회수
5030
대학교회[www.daehaak.org]에서 추석 명절 후 수요기도회에 설교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일 오전 설교와는 달리 매우 신학적인 설교이나 '오늘 나'에게 말씀하는 설교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황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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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선언하는 동시에, 멀게는 구주 예수님을 예언합니다. 하지만 구약 안에서도 구원의 역사는 발전합니다. 구약의 이전 사람이나 사건은 이후에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도 구약의 다른 성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본문 에스겔 2-3장은 구약 성경 중 창세기를 과거적으로 회고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미래적으로 내다봅니다. 그래서 본문을 첫 사람 아담에서 출발하여 에스겔 선지자를 거쳐 예수님으로 연결시켜봅시다. 즉 에스겔서를 창세기와 복음서와 같이 살펴봅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무슨 교훈을 주는지 들어봅시다.

요지: "나는 매일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해야 한다."

첫째로, 왜 우리는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까? 언약의 하나님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부시의 아들인데, 제사장 가문 출신입니다. 그는 BC 593-571년까지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여호야김 왕이 바벨론에 반역하자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2차로 10,000명가량의 포로를 잡아 갈 때 잡혀 갔습니다 (왕하 24:14).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벨론에 있으면서 장차 7년 후에 바벨론이 완전히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성전은 초토화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에스겔은 이방 나라의 우상 숭배가 만연한 상황 속에서, 불안한 국제 정세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겔 1장에 보면, 강력한 폭풍이 북쪽에서 이스라엘로 몰려오는데, 폭풍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입니다. 이 폭풍 (히. 루아흐)은 창 1:2절에 보면 창조 전에 하나님의 신/루아흐가 수면 위에 운행하신 것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창 8:1절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루아흐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천지창조 전에 운행하신 성령님과 홍수 심판을 끝내시고 땅을 회복시키시는 성령님이 이제 에스겔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이 폭풍 가운데서 네 생물체를 보는데, 이 생물체는 겔 10:1절에서 '그룹'이라 불립니다. 이 네 생물은 창 3:24절에서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 접근하는 것을 막았던 그룹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룹들의 머리 위에는 '궁창'이 있습니다 (겔 1:22). 창 1:7절에 보면 하나님은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십니다. 하나님은 이 생물체의 머리 위에 '무지개'로 나타나시는데 (겔 1:28), 창 9:13절 이하의 노아 홍수 이후에 하늘에 떠올렸던 무지개를 연상시킵니다. 여러분! 왜 창 1장의 모습과 겔 1장의 모습이 -루아흐, 그룹, 궁창, 무지개-이처럼 유사합니까? 그것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에스겔 당시에 타락한 남 유다를 새롭게 자신의 백성으로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겔 2장에서도 창세기와 비슷한 주제가 등장합니다. 에스겔은 93회 정도 '인자' (벤 아담)이라고 불립니다. '인자'는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아담의 아들'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서 생령이 되었듯이, 에스겔도 예언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을 받습니다 (겔 2:1-2). 첫 아담과 마찬 가지로 새로운 아담인 에스겔은 음식과 관련된 시험을 받습니다. 아담처럼 뱀에게 속아서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창 3:6), 에스겔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으로 가득한 두루마리를 받아서 먹습니다 (겔 2:10). 새 아담 에스겔은 마른 뼈처럼 되어버린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 생명을 불어 넣어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들어 주려고 합니다 (겔 37:1-11). 비록 이스라엘의 일부가 바벨론으로 잡혀 갔으나 완전히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남은 자가 되어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예루살렘의 성소를 떠나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바벨론에 이사 가셨기 때문입니다 (겔 11:16).

예수님은 '인자'로 오셔서,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마 20:28).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75회나 '인자'로 불리었습니다. 에스겔이 새로운 아담이라면, 예수님은 둘째 아담이자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첫 아담의 죄악을 돌이키시고, 새 아담 에스겔의 사역도 성취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겔 2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창 1장으로 돌아갔다가, 복음서의 예수님에게도 나아가고 있습니다.

롬 5장에 보니, 예수님은 첫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의 오염을 처분하시고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고전 15:44-49; 롬 5:19). 예수님은 새 아담 에스겔처럼 두루마리를 받아먹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원 전에 계신 말씀이시오, 직접 구원과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저주의 선언을 십자가 위에서 지옥의 고통을 겪으실 때 몸소 자신의 몸에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에스겔이 먹었던 두루마리의 저주를 우리 대신 몸소 다 지셨습니다. 그 결과 승천하신 예수님은 성령의 생기/루아흐를 오순절에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새롭게 창조된 성도가 성령충만하여 심비에 새진 말씀을 지켜 천국을 침노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백성이 온갖 시험으로부터 이기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추방된 우리를 새 언약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믿게 하셔서 새로 빚으셨습니다. 다시는 홍수가 새 세상을 심판했던 것 같은 지옥의 심판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대신 우리 위에 임마누엘과 보호의 언약의 증표 무지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새롭게 창조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언행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도록 맡기는 훈련입니다.

둘째로, 왜 우리는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 소화하여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받아먹으니 꿀 같이 달았습니다 (겔 3:3). 칼빈은 여기서 '단 맛'은 하나님의 남 유다를 향한 심판을 에스겔이 수용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봅니다. 선지자로서 심판을 예언하고 그대로 심판이 시행되는 것을 달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저주를 달게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일이라면 어려운 직무라도 기쁨으로 행하고 있습니까? '선지자적 비관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 겔 2:6-7절에 보니 에스겔은 가시, 찔레, 전갈과 같이 선지자에게 찌르고 상처를 주는 이스라엘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야 했습니다. 남 유다가 안 들을 줄 알지만 에스겔은 외쳐서 이스라엘 가운데 선지자 있음을 알려야 했습니다. 패역한 백성들이 듣지 않음을 알면서도, 이스라엘 가운데 진리의 고독한 외침이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죄악 세상 속에서라도 말씀대로 행할 때 결국 쓴 것도 달게 변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이 죄악 세상 속에도, 아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합니다. 구별된 삶을 하나님은 기대하십니다.

겔 2장처럼 계 10장에 보면, 요한은 환상 가운데 천사/예수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아먹습니다. 먹으니 입에서는 단데, 속에서는 씁니다. 달지만 쓴 것은 그 두루마리가 교회의 구원과 교회의 대적이 받을 심판의 메시지가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며, 송이 꿀 같은 말씀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말씀 따라 사는 훈련이 고통스럽지만, 그 결과는 달기 마련입니다. 세상 방식으로 살지 마시고, 성령과 말씀대로 살아서 결국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뿌듯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마음 판에 새깁시다. 그 말씀을 지킬 능력을 성령님이 주시는 것을 믿읍시다. 잊어버리지 말고 어떻게 읽고 들은 말씀 그대로 살 수 있는지 거룩한 고민을 합시다. 말씀을 행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 성장이 없는 믿음 생활만 할 뿐입니다.

금요 성경파노라마, 주일 저녁 성경공부, 새가족 초급-중급반, 성경통독반, 토요일 청년부 성경공부에 오십시오. 듣고 배운대로 전하기 위해서 아가페 전도에 동참하십시오. 주위에 수많은 죽은 자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읍시다. 많이 먹고 뱃살이 차지 않도록 하려면, 말씀을 듣고 배운대로 실천하고 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왜 우리는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에스겔이 새로운 아담이라면,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에스겔이 죄악으로 말라버린 남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생기를 주려고 시도했다면,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 교회에게 성령 충만과 부활의 생명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갔을 때 남은 자인 그들과 함께 하시고자 하나님도 성소를 바벨론으로 옮기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세상 끝까지 함께 동행하시는 참 성전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거룩한 하나님의 현존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계시기에, 성령이 떠나지 않는 것이 곧 임마누엘의 복입니다. 임마누엘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속에 계시는 성령이 친히 말씀하시고, 성령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행동하도록 하십시오.

인자이시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덕분에 새롭게 창조된 성령의 전인 우리가 할 일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죄악과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패역함에서 돌이키는 길입니다 (겔 2:5).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도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롬 8:11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죄악과 사망의 냄새가 아니라 생명의 냄새와 권능을 사모하는 이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기대하십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천지 창조에 간여하셨습니다. 남 유다의 회개에도 간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이미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계속 새롭게 되어갑니다. 새롭게 창조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안의 옛 성품이 아니라, 우리 안의 성령께서 삶을 주관하도록 하십시오. 말씀을 실천하여 소화하십시오. 그리고 실천으로 아직 죽어 있는 자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나누어 주십시오. 아멘.
작성일:2007-10-05 10:13:43 125.189.3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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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panta 2007-10-05 10:22:20
성경전체[숲] 속에서 본문[나무]을 보는 '기본 신학'이 잘 드러납니다. 그리고 구원역사적 관점에서 바벨론 포로 중에도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 [= 하나님의 의]이 잘 드러나도록 부각한 점이 돋보입니다. 나아가서 종말론적 접근에다 그리스도 완결적 적용으로 '성전'된 오늘 우리 신자의 책무도 잘 드러나는 설교 입니다. 윤리 도덕적 설교를 피하는 많은 요건을 보여주는 설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