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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한편

제목

잃은 아들을 찾으신 아버지 (2) (누가복음 15:11-24)

닉네임
스데반 황
등록일
2017-02-26 19:34:38
조회수
801
잃은 아들을 찾으신 아버지 (2)

누가복음 15:11-24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17절에 보면 먼 나라에 가서 주려 죽게 된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킵니다.” 여기서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의 원어는 정신 나간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쉬운 성경은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었다”라고 좀더 명확하게 번역하였습니다. 즉, 자신이 누구이며 왜 이런 결과를 당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따라서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킨 후”에 정상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른 생각을 하게 되니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17-20).
그리고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돌이키기 전의 둘째 아들은 예수님의 견해에 따르면 비정상적인 생각을 하던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비유를 듣는 여러분 역시 둘째 아들이 회개하기 전까지는 비정상적인 어리석은 삶을 살았다고 동의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삶을 망령된 삶, 즉 정신 나간 삶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죄의 상태에 있을 때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은 망령입니다. 어리석음입니다. 정신이 나간 행동과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여 정신을 차리면 망령된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둘째 아들은 비정상적인 정신 나간 생각을 하며 산 것입니까?

첫째, 교만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없이 스스로 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자는 망령된 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모든 죄인들의 특징은 교만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망령된 마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시느니라.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는도다”(잠 8:13; 잠 15:25)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교만 때문에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교만한 자는 미련하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29:23; 잠 11:2; 잠 13:10; 잠 14:3; 잠16:18)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은 다 죄니라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잠 16:19; 잠 21:4; 잠 21:24).

예수님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바뀐 가장 큰 부분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아버지를 떠날 때 교만했습니다. 그 교만은 다 망해도 끝까지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는 자존심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지극히 겸손한 가운데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설 수 없으며 나는 고작 이제는 품꾼 중에 하나’라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는 죄의 상태에 있으면서 정신 없이 망령되게 살았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은 정상적인 마음이며, 교만한 마음은 망령된 비정상적인 마음입니다.

둘째는, 망령된 마음은 자신을 파괴시킵니다. 몸과 삶이 망쳐지는 것을 알면서도 썩어질 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하며 신세가 망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끝까지 달려가서 결국 패가망신합니다. 가장 사랑하며 사랑 받을 수 있는 가족들과의 관계를 스스로 무너뜨립니다.

몇 년 전에 뉴스에 나온 기사인데 집에서 게임 중독에 걸린 자녀가 어머니가 게임을 그만하라고 호통을 치자 석유를 사 가지고 와서 집에 기름을 붓고 불태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망령된 마음은 자신 및 자신을 사랑하는 주변 사람에게 파괴를 일삼습니다. 또 수년 전 사건인데, 도박 중독에 걸린 젊은 엄마가 한 살짜리 아기를 차에 두고 도박을 했는데, 아기가 차에서 질식하여 죽었습니다. 정신 나간 여자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삼손이 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생 들릴라와 계속 놀아납니다.
[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삿 16:15-21)

이 내용은 죄에 빠져 있던 삼손이 어떠한 망령된 행동으로 스스로 비참하게 되었는지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최악의 망령된 행동은 자살입니다. 자살은 스스로 가장 비참한 자리로 내려가는 정신 나간 행위입니다. 자살을 합리화하거나 미화하지 않기 바랍니다. 자살은 지극히 어리석고 비정상적인 상태이며 망령된 것입니다.

아무튼 둘째 아들의 먼 나라에서의 삶은 계속적인 방탕 가운데서 자신을 파괴시키는 망령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둘째 아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는 ‘내가 죽으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더 이상 자신을 파괴하는 삶이 아니라 살아서 일어날 궁리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 중에 하나는 영원히 파멸되지 않고 영원히 살 궁리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은 지극히 정상적인 고민이며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해답을 찾는 자는 영원토록 지극히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궁극적인 열매입니다.

셋째는, 썩을 것을 위해 사는 것은 망령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생명을 주고 1억과 바꾸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본인이 죽은 후 1억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다. 어리석고 망령된 자나 자기 목숨과 1억을 바꿀 것입니다. 보험금 1억을 타려고 자기 남편이나 아내, 심지어 부모를 죽이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망령된 행동입니다. 이처럼 썩을 것을 위해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자는 지극히 망령되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성경은 썩을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아들은 이 세상의 썩을 것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들을 버렸습니다. 아버지를 버렸고 끝없는 사랑과 공급을 버렸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정신 나간 망령된 자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가정과 하나님의 나라를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망령된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다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로 인하여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썩어질 세상을 구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 배를 채우고 내 욕망을 채우려는 망령된 생각에서 벗어나 가장 소중한 것들, 특히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거룩입니다. 우정입니다. 진실입니다. 영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보혈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또한 하늘 나라 및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으로 이어질 복음 안에서의 공동체 역시 말로 다할 수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썩을 것을 구하는 망령된 자들은 망령된 마음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교만한 마음, 이기적인 마음, 무지한 마음, 신실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버리고, 천국을 버리고 썩어질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합니다.

야곱의 아들 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었습니다. 이에 성경은 그를 망령된 자라고 부릅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2:16).

그러나 모세처럼 정신이 맑은 자는 도리어 썩어질 것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취합니다.
[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이처럼 에서와 같은 망령된 마음에서 벗어나 모세처럼 썩지 않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우주 가운데 가장 망령된 존재는 마귀입니다. 그는 피조물로서 최고로 아름다운 지위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임하신 권한과 힘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피조물인 주제에 하나님이 되고자 하였고, 하나님께 도전했습니다. 이처럼 어리석고 망령된 존재가 이 우주에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 그는 가장 비참하고 천박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섬기기보다 남들 위에 높아지려고 술수와 거짓과 배신의 죄악을 품는 자는 사탄처럼 망령된 자로서 비참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낮아져서 남들을 섬길 줄 아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정상적인 마음을 지닌 자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실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넷째는,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는 자는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비정상적인 망령된 사람은 죄를 고백하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망령된 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진실한 사람들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리고 성을 쳐부술 때, 아간이라는 사람은 그 와중에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을 도둑질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죄를 숨기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죄를 숨긴 그의 운명은 멸망이었습니다.
[
2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25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26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수 7:24-26)

여호수아 7장 15절을 보니, 아간이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람 군대장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 낫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엘리사에게 선물을 주고자 했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게하시가 엘리사를 속이고 나아만 장군을 쫓아가 선물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그 죄를 숨깁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패망입니다.
[
24 게하시가 그 물건을 …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6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왕하 5:24-27)

하나님 앞에서 숨긴 죄는 탄로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춰내시기 전에 주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둘째 아들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라고 말하며 죄 사함을 구하였고, 아버지는 겸손함으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구하는 그에게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 외에도 성경에는 망령된 것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평생 하나님 앞에서 결코 망령된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20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망령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조롱이나 욕이나 저주나 거짓 맹세나 주문 등에 사용하는 것은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망령되게 행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19장과 20장을 보면, 동성 성관계를 망령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상 13장 13절을 보면, 하나님을 불신하는 가운데 주께서 허락하지 않은 번제를 드린 사울 왕을 향하여 사무엘 선지자가 “망령되이 행하였도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정하여 놓으신 선을 넘어가는 모든 교만한 행위들은 망령된 행위들입니다.

역대하 16장 9절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한 아사 왕을 향하여 하나니 선지자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고 말합니다. 또한 역대하 28장 19절에서는 아하스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앗수르 왕을 의지하자 역대하 기자는 그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셨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주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더 의지하는 불신앙은 정신 나간 망령된 모습입니다.

잠언 6장 19절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 망령된 것이라고 말하였고, 잠언 19장 28절은 정의를 업신여기는 거짓 증인을 망령된 자라고 하였으며, 잠언 21장 24절은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망령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0장 15절은 우상 신 앞에서 절하는 것을 망령된 행위라 하였고, 예레미야 23장 36절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는 자들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으로 건너와서는 복음을 대적하는 이론이나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해 망령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딤후 2:16-17).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망령된 상태에서 빨리 돌아서서 정상적인 상태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하고 나면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정상적인 생각이란 성령을 따라 생각하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반면, 내 생각에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망령된 생각을 하며 사는 삶입니다.
[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5-8)

아무튼 둘째 아들은 지극히 비천한 자리에서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교만하고 반항적인 아들이었으나 이제 그는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아버지 품으로 돌아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려주십니다. 20절을 보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았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항상 아들을 기다리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결코 둘째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얼마나 자주 아들이 떠났던 그 문과 길과 산을 바라보았겠습니까? 지금 둘째 아들은 흉골이 사나운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또한 누더기 옷을 입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돼지의 쥐엄 열매조차 먹지 못했던 그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 동네 사람이 알아보았다면 사람의 발보다는 소문이 빠르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거지를 주인의 둘째 아들로 알아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종들도 없었고 주민들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이 먼 곳에서 오는데도 당장 알아보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아들을 알아본 아버지의 마음은 측은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마도 달려가는 아버지 역시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돌아오는 그 아들은 자기 것을 챙겨 집을 떠난 이기적이고 교만한 아들입니다. 심지어 허랑 방탕하여 아버지가 준 재산을 다 탕진한 상태입니다. 지독히 어리석고 지독히 한심한 삶을 살다가 다 망하고 돌아온 아들입니다. 패역한 아들이며 아버지를 저버린 망나니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려갑니다. 눈물을 흘리며 달리십니다.

제가 히브리 원어를 처음 배우고 창세기 3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히브리어가 너무나 신기하다고 느끼며 창세기 1장부터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을 원어로 읽다가 눈물을 쏟았습니다. 하루 종일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 장면은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속아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지만 신이 되기는커녕 비참함을 느끼면서 뱀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때였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수치스럽고 두려운 가운데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신들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는 몇 시간만 지나면 말라비틀어지고 그들의 수치를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비통과 슬픔과 두려움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들을 그토록 사랑하며 모든 좋은 것을 나누어 주신 하나님이 오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런데 제가 눈물 흘린 내용은 3장 8절이었습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숨었더라.”

원어는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이리저리 뛰어 다니시며 아담과 하와를 찾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급히 달리시는 그 소리를 듣고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여기서 소리는 동산에 거니시는 ‘소리’를 말합니다. 특히 “거니시는”은 히브리어로 (미트할렉크)인데 원형 할랄크의 히트파엘 형태, 분사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게 그 순간 그 그림이 제 마음 속에 들어오는데, 마치 어린 자녀를 잃은 부모가 맨 발로 아이를 찾아 뛰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잃고는 에덴 동산을 쉬지 않고 찾으시며 왔다 갔다 하며 뛰어다니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달리시는 그 소리가 강한지라 아담과 하와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렇게 급하게 뛰어 다니시며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외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 장면을 보고 많이 울었습니다. 마침내 아담과 하와를 찾아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스스로 수치를 가리려고 지어 입은 무화과나무 치마를 거두시고, 동물을 죽여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이는 먼 훗날 하나님의 어린양이 그들의 죄를 덮어주실 것을 예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습니다. 이 또한 아들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아버지의 배려입니다. 물론, 놀랍게도 송아지는 피를 흘리고 풍성한 잔치 음식이 되었습니다. 항상 성경에 언급되는 잔치에는 동물의 죽임이 있고, 그 이후 하나님과의 화목을 표현하는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만찬을 예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
6 모세가 (소의)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11 (이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출 24:6, 8; 1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 직전에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며 떡과 포도주로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6-28)

사실 유대교 문화에 의하면 송아지를 잡아서 죽이는 것은 언약식을 할 때에 행해지는 것입니다. 특히 과거의 모든 과실을 용서하고 다시 하나가 될 때 송아지를 잡아서 언약식을 한 후 잔치를 하였습니다.

아무튼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얼마나 더럽고 냄새가 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돌아온 아들을 측은히 여기신 아버지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맞이할 뿐이었습니다. 이미 아버지의 마음은 돌아온 아들을 보며 그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아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또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아버지께는 품위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참 사랑에는 품위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지극한 영광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러나 잃은 양을 측은히 여기사 그 양을 찾으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그 사랑 때문에 모든 품위를 내려 놓으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마구간으로 오셨고 머리 둘 곳이 없이 청빈하게 사셨으며 나아가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사 십자가에서 아무런 품위 없이 가장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2-3)

왜요? 길 잃은 양을 찾아서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양들은 목자가 자기 생명까지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양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친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며 반가워하며 용납하는 것을 보고 고백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이 얼마나 겸손하고 아름다운 회개의 모습입니까?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이 얼마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입니까?

이에 아버지의 마음은 더욱 사랑으로 차고 넘쳤습니다. 따라서 당장 종들을 불러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명령합니다.

지금 둘째 아들은 더러운 누더기를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십니다.

제일 좋은 옷은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자에게 입히시는 영광스러운 의의 옷을 상징합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는 것은 “지금부터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한 그 아들에게 더욱 그가 참 아들임을 증거해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발에 신을 신겼다는 것은 그가 노예가 아니라 그 집안의 왕자이며 모든 종들을 다스릴 주인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모든 사람 앞에서 선포합니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에 주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이 아버지와 함께 즐거워하였다는 것이 둘째 아들의 비유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잃은 자를 찾으신 아버지의 사랑이며 기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잃은 자녀를 찾으시는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심리가 어떠한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잃은 자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니 더 이상 세상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자로 살지 말고, 주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 돌아오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구약의 희생양이 상징하던 대속의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그의 죄를 이미 다 용서하셨고 다시는 기억조차 않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사람은 진심으로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께 고백할 것입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는 당장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외치시며, 더러운 죄악의 옷을 벗기시고 새롭고 정결한 의의 옷을 입히실 것이요, 또한 죽었다가 아버지의 참된 아들로 다시 태어나 살아났다는 증거로 가락지를 끼워주실 것이며, 나아가 주의 나라에서 맘껏 일하고 섬길 수 있는 직분과 은사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온 하늘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랑스런 선포와 더불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3-24절).

우리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삶의 목표를 잃은 영혼들과 또한 본향을 떠나 방황하는 영혼들, 특히 성도의 공동체를 떠나 절망과 모든 궁핍에 떨어진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고 반갑게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하나라도 돌아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한없이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최고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즉, 아버지가 가장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 역시 주의 아들로서 가장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아직 먼 나라에 가서 방탕한 삶을 사는 둘째 아들이 있다면 당장 회개하고 돌아오기 바랍니다. 한편, 주의 장막에 거하는 모든 신자들은 이러한 둘째 아들이 돌아올 때 하늘 아버지와 함께 참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가장 반갑게 환영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의 가정을 든든히 세워가는 참된 주의 가족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교회]
작성일:2017-02-26 19:34:38 211.235.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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