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설교한편

제목

야곱, 요셉의 두 아들 입양(창세기 48:8-20)

닉네임
설맥
등록일
2017-02-28 11:34:29
조회수
993
야곱, 요셉의 두 아들 입양
(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창세기 48:8-20절

하나님이 하십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이것저것 자꾸 잊게 됩니다. 기억에 장애가 생깁니다. 두 가지가 생각이 납니다. '건망증'과 '치매'입니다. 대부분은 건망증이 심해지면 치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건망증과 치매는 엄연히 다릅니다.
단순한 건망증은 기억력에 장애로 어떤 일에 대해서 세세한 부분까지는 기억을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상 생활을 하는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치매는 기억을 못할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퇴행을 하게 됩니다. 건망증은 주로 기억력 감퇴로 일어납니다. 남성 보다는 여성, 지적 활동이 낮은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납니다.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긴장은 뇌세포의 피로를 촉진해서 건망증을 가져옵니다. 때로 우울, 초조한 마음 등이 건망증을 심화시킵니다. 수면 부족, 강박적인 마음도 건망증을 일으킵니다.
반면 치매는 단순히 기억장애만이 아니라 인지 장애를 동반합니다. 인지 장애란 뇌손상이나 질환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사물을 분별하여 인지할 수 있는 기능에 문제가 있는 상태말합니다. 기억력 장애는 과거 기억은 물론이고 새로운 기억을 습득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언어장애가 생깁니다. 실어증도 그 증상중에 하나입니다. 시공간 장애도 있습니다. 익숙한 길인데 길을 잃고, 집안에 있는 화장실도 못 찾아갑니다. 그리고 배회, 수면장애, 환각, 의심, 남의 물건을 훔치는 등 판단력 조차 장애가 생깁니다.
기억 장애는 육적 기억 장애도 있지만 더 무서운 것은 영적 기억 장애입니다. 육적 기억장애는 몸의 불편함이지만, 영적 기억장애는 영혼의 잃어버림입니다. 영적 기억 장애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과 우상, 마귀를 숭배하는 영적 건망증이요, 영적 치매입니다. 회개하여 돌아온다면 영적 건망증에 불과하지만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다면 영원한 저주와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이며, 영적 치매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8: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12:7절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했고, 호세아는 호세아 12:5-6절에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병문안했습니다. 야곱은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았습니다. 침상에서 힘을 내어 일어나 앉은 이유는 자신의 생명의 끝이 다 된 줄 알고, 요셉과 그의 두 아들에게 복을 주기위해서입니다.
3절을 보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은 야곱은 요셉에게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나타나 복을 주셨다”고 말하면서 “네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내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면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 양자로 삼았습니다. “요셉,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벧엘(루스) 언약을 상기하면서 양자로 삼았습니다. 벧엘 언약은 창세기 28: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아니하리라.” 즉, 야곱이 요셉을 두 아들을 양자 삼으려고 한 것은? 두 손자를 언약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너희들이 살 곳은 애굽 땅이 아니라 가나안 땅임을 확실히 알려 주기 위해섭니다.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네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라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야곱은 라헬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올 때에 가나안 땅, 에브랏 길, 곧 베들레헴에 묻혔다고 했습니다. 라헬의 무덤(카바드 라헬)은 지금도 예루살렘 남쪽으로 10킬로 베들레헴 입구에 남아 있습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살인 참극을 겪은 다음에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게 됩니다. 35:9절을 보면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미 야곱은 몇 년 전에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 세겜에 돌아와 살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집안 사람과 종들에게 있는 모든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새 의복을 바꾸어 입은 다음에 벧엘에 올라가 제단을 쌓을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복을 주신 것입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드릴 때 그 예배를 받아주시고 기뻐하십니다.
야곱은 벧엘을 떠나 아버지 이삭이 살고 있는 기럇아르바 마므레로 갑니다. 가던 중에 에브랏 베들레헴 길에서 라헬이 난산 끝에 아들을 낳고 숨을 거두고 맙니다. 고통 끝에 아들을 낳고 죽으려고 할 때 라헬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내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아버지 야곱은 그 이름을 고쳐 “베냐민”, ‘내 오른손의 아들’로 불렀습니다.
예레미야 31:15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예언, 성취되었습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고 돌아오지 않자, 헤롯은 베들레헴 일대의 두 살 아래 사내아기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이 잔혹한 사건을 마태복음 2: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주제하고는 동 떨어지지만 베들레헴 입구에서 아들을 낳다가 죽었는데, 슬픔의 아들인 베노니는 바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주님의 이름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도 라헬처럼 베들레헴에서 십자가에게 죽을 슬픔의 아들, 베노니를 낳았지만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로 불러주었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죄와 슬픔, 사망 권세에서 부활시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심으로 진짜 “내 오른손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막 16:19).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 예언, 성취가 그리스도께 적용된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입니다.
라헬은 요셉에게는 어머니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는 할머니가 됩니다. 요셉에게 어머니는 그리운 존재, 보고 싶은 존재였습니다. 야곱이 라헬의 무덤을 이야기하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귀소본능입니다. 연어가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알을 낳으려 합니다. 귀소본능입니다. 즉, 너희는 비롯 애굽 땅에서 태어났지만 너희는 언약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다. 애굽 사람이 아니요, 이스라엘 사람이다. 지금은 이곳에 살고 있지만 반드시 돌아갈 곳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다. 그러므로 네 어머니가 묻어 있는 가나안 땅으로, 네 할머니가 묻어있는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귀소본능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귀소본능입니다. 이것이 약해지면 영적 건망증에 건린 것이고, 심해지면 영적 치매 단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야곱은 요셉을 보면서 “내게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 보게 하셨다”고 하면서 두 아들을 축복을 축했습니다. 그때 야곱은 요셉의 큰 아들인 므낫세에게 오른 손이 아니라 왼손으로 축복하고, 작은 아들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으로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기뻐하지 않고, 야곱의 손을 옮기려고 했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모르겠지만, 요셉을 알고 손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의 행동을 허락하지 않고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고 하면서 동생 에브라임을 형 므낫세보다 앞 세웠습니다.
앞이란 말은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 얼굴 역할을 합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나오고, 솔로몬 때에 남북이 분열할 때 북쪽 10지파의 대표가 항상 에브라임 지파였습니다.
왜 야곱은 이런 행동을 합니까?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을까요? 먼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의해서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라는 약속을 받고, 후에 장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불법으로 장자권을 탈취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한 언약대로 야곱을 복의 계승자가 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로마서 9:13절에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요셉의 두 아들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41:51-52). 요셉은 애굽 신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큰 아들 므낫세의 이름은 뜻은 ‘하나님이 네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의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이고, 둘째 아들 에브라임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입니다.
언약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에 이 두 아들 중에 누가 언약적인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고난에 대한 망각을 뜻하는 므낫세인가? 번성을 뜻하는 에브라임 인가할 때에 에브라임이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야 누가 되든 상관이 없지만, 하나님의 복은 언제나 언약과 함께 오고, 그 언약을 믿는 믿음과 소망을 통해서 계승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야곱이 언약을 기억하고 벧엘에서 제단을 쌓을 때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과, 또 야곱이 애굽 이주를 앞두고 브엘세바에서 희생 제사를 드린 모든 것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복을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복은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큰 자에게 주던지, 작은 자에게 주던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무엘을 낳고, 약속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는 한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무엘상 2:3-8절입니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고 했습니다.
복은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며 예배하며 섬겨야 합니다. 영적 건망증도 좋은 것은 아니지만, 영적 치매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예배하며 살아야 되겠습니다.
(대림동 예일교회 이동섭 목사)
작성일:2017-02-28 11:34:29 116.255.80.11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게시물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최신순 추천순  욕설, 타인비방 등의 게시물은 예고 없이 삭제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