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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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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이신 예수님 (히브리서 12:1-3)

닉네임
스데반 황
등록일
2017-03-12 16:19:09
조회수
1134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

히브리서 12: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라는 것은 11장의 믿음의 영웅들이 한결 같이 영원한 나라와 하나님께서 보내실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믿음을 지니고 살아갔으니, ‘그러므로’라는 뜻입니다. 이는 11장에 소개된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았음을 의미합니다.

종종 히브리서 12장 1절을 읽으면서 믿음의 영웅들이 하늘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절은 그러한 뜻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믿음과 인내로 살아갔던 구약의 증인들이 구름 떼처럼 허다하게 많다는 뜻입니다.

제가 어떤 교회를 방문했는데 기라성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사진이 복도에 죽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허다한 믿음의 영웅들에게 둘러싸인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처럼 달려가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허다하게 많은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을 소개하며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믿음을 본 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삶을 ‘경주’로 표현합니다. 지금 이 개념은 참으로 신앙 생활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위대한 개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남은 삶이 믿음의 경주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대단히 많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주는 100미터 달리기 경주가 아니라 인내가 필요한 마라톤 경주입니다. 그 경주는 호흡이 마치는 그 날까지 우리가 달려가야 하는 앞에 있는 경주입니다. 이 경주를 제대로 달려야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면 경주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경주는 목표가 있고, 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주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탈락도 있고 합격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삶을 경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신앙 생활을 믿음의 경주로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분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전혀 경주를 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경주는커녕 거꾸로 뛰는 자들도 있고, 심지어 경기장 밖으로 나가 세상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믿음의 경주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많은 경주가 있습니다.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면 그 동안 선수들이 쌓아 온 모든 실력을 보여줍니다. 경기를 다 마치고 나면 승자와 패자가 확실하여지며 그 결과에 따라 자신 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영광과 기쁨이 결정됩니다. 이때 경기에서의 승리의 영광이란 어마어마합니다. 이들의 승리의 영광은 아마 평생 그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그 어떤 경기보다 더 큰 위대한 경기를 말합니다. 그 경기는 다름 아닌 믿음의 경주입니다. 그것은 천국에서의 영원한 영광과 연결된 인생 경주입니다.

이에 바울은 믿음의 경주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였습니다.
[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4-27).

[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2-14)

그리고 복음을 정확하게 전하지 못하면 제대로 달리지 못하고 실격할 것이라고 염려합니다.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갈 2:2).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마라톤 경주 규칙에 따라 정확한 목표를 바라보며 제대로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마라톤 경주에서 영원한 영광과 승리를 얻는 비결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믿음의 경주를 온전히 달리기 위해서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피를 입고 마라톤을 뛰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또한 많은 짐을 넣은 베낭을 메고 마라톤을 뛰는 사람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경주자는 가능한 무거운 짐이나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미리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마라톤 경주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무거운 것”이란 무엇입니까? 원어로 (옹코스)라고 하는데 이는 경주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직접적인 뜻은 불필요한 뱃살 등, 달리는데 방해되는 신체 조건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운동 선수는 마라톤 경주를 달리기 전에 일반적으로 훈련과 운동을 통해 살을 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옹코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마도 올림픽에서의 마라톤 경주를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나 그 때나 마라톤 경주자는 가능한 가장 가벼운 옷을 입습니다.

한편 (옹코스)는 영적으로는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마라톤 선수가 겉옷을 벗어 던지듯이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모든 신자들은 그들의 경주에 방해가 되는 그 어떤 것들이라도 가차없이 던져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내 맘에 드는 것이라도 경주할 때는 일단 벗어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모든 무거운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가장 먼저, 세상의 염려들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을 불안케 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이 주님이 아닌 다른 뭔가에 붙들릴 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 어떤 염려가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을 염려스럽게 합니까? 장래입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녀 문제입니까? 염려하는 대신에 자녀를 위해 주께 기도드리기 바랍니다. 기도로 자라난 아이는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자라날 것입니다. 재정적인 문제입니까? 지금까지 신실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면서 더욱 주님을 바라보며 기다리기 바랍니다. 그러면 염려가 사라지고 오히려 기대가 생기면서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건강입니까? 생사 문제를 주께서 붙들고 계신 것을 믿고 건강의 문제를 주께 맡기면 염려는 사라집니다. 대인 관계입니까? 가족 관계입니까?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정말로 순종해 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용서와 관용과 지혜가 생겨나면서 주께서 보여 주시는 가장 좋은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입니까?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가장 귀한 배우자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경주 가운데 가장 무거운 짐은 염려입니다. 그러나 염려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따라서 염려하는 대신에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기 바랍니다. 또한 염려의 상황 가운데 우리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다시 정립하기 바랍니다. 특히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겠다고 결단하며 고백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염려를 주께 맡기면 순식간에 염려가 사라지면서 마음에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마 6:30-32, 34; 빌 4:6-7)

그 외에 “모든 무거운 것들”로는 재물에 대한 욕심과 향락 및 기타 여러 욕심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있어서 큰 방해거리들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참조, 눅 8:14)

이러한 장애물들을 과감하게 벗어던져야만 힘차게 달릴 수 있는 믿음의 경주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1절을 보면, 믿음의 경주를 제대로 힘차게 달리려면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란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악들을 말합니다. 신앙 양심을 어기는 행위들을 말합니다.

죄는 우리를 얽어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한번 지은 죄는 또 다른 죄를 짓게 만듭니다. 또한 죄로 인한 결과들이 우리의 다리를 얽어맵니다. 습관적인 죄악은 우리의 삶 전체를 얽어맵니다. 모든 죄악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즉, 우리를 얽매입니다. 따라서 전혀 달릴 수가 없습니다. 죄에 빠지면 실족하게 됩니다. 죄에 얽매인 자들은 평생 평강을 잃습니다. 진정 맑은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하늘의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 11: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족한 사람, 즉 미끄러져서 자빠진 사람이 어떻게 달리겠습니까? 죄라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자들은 실족하는 자들로서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올림픽 경기를 보면, 미끄러져 넘어져서 상을 놓치는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실족이라는 것은 미끄러져서 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들은 실족할 때마다 믿음의 경주에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하물며 1년 내내 어둠 속에서 실족 상태에 있는 신자라면 영원한 상은커녕 어떻게 믿음의 경주를 달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보아도 교회를 다닌지 10년, 20년이 되어도 조금도 예수님의 모습을 닮지 않는 자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살펴보면 어김없이 얽매이기 쉬운 죄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실족한 상태에서 한 걸음도 달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죄로 인한 상처를 입고 마음이 실족한 자들 역시 마귀의 덫에 걸려 믿음의 성장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죄에 얽매이는 것을 마귀의 올무에 빠졌다고 표현합니다. 이때 그들에게는 책망이 필요합니다.
“주의 종은 …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4-26).

자주 실족하거나 죄에 얽매여 있는 분들은 신속하게 회개하기 바랍니다. 사실 24시간 죄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전혀 믿음의 경주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단코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허랑방탕하게 보내지 않기 위해 무엇보다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철저하게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어떻게 제거합니까? 사람마다 얽어매는 약점과 죄성이 다릅니다. 흔히 남자들은 음욕과 혈기에 자주 넘어집니다. 반면에 여자들은 거짓말과 질투에 약합니다. 우리는 먼저 나를 유혹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내야 합니다.
[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 5:29-30)

심지어 교양 생활이나 여행 또는 운동을 하는 것처럼 죄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믿음의 경주를 방해한다면 그것도 잘라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막는 유혹거리는 물론 심지어 선한 것이라도 나의 시간과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는 것이라면 잘라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힘차게 믿음의 마라톤 경주를 계속 달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과감하게 잘라낸 후에 곧바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얽어매는 죄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러므로 이미 지은 죄로 인해 인생이 얽매어져 있다면 보혈의 언약을 의지하며 회개하기 바랍니다. 보혈의 언약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가 지은 모든 죄악 및 죄책감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에 힘쓰면서 성령의 능력을 구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할 것입니다. 쉬지말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반드시 생명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 우리의 죄성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죄를 이기지 못하는 가장 큰 문제는 진심으로 죄성을 죽이고 주의 뜻을 추구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징계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제 2절을 보니, 믿음의 경주를 제대로 하기를 원하는 자는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는 동시에 정확한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4세 미만의 어린아이들에게 50 미터 달리기를 시키면 가다가 딴 짓을 합니다. 중간에 멈춰선 아이도 있고, 다른 곳으로 뛰는 아이도 있습니다. 앉아서 우는 아이도 있고,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놀고 싶어하는 어린이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경주가 이러하면 안됩니다. 믿음의 경주를 제대로 하려면 반드시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목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주께서 상 주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최고 목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믿음의 주요 또한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달리면 쉬지 않고 계속 골인 지점까지 힘차게 달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표를 잃지 않고 바라보는 이 한가지가 신앙의 경주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눈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떼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믿음의 경주를 바르게 달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마라톤 선수는 끊임없이 골인 지점을 바라보고 열심히 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에 실패하는 이유는 믿음의 마라톤을 경주하면서 목표의식을 잃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의 목표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일 때 그 경주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신앙의 목표가 돈이면 그 경주는 엉뚱한 곳으로 달릴 것입니다. 신앙의 목표가 자녀들의 출세이면 그 또한 이상한 달리기가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환상적인 종교 체험을 신앙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악령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목표는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신앙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놀랍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 신앙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영원한 나라에 대한 지식도 없고 갈급함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이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목표가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베드로후서를 보면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약속이 복수로 되어 있고, 그 소망이 현재의 거룩한 삶을 엄청나게 격려하는 것을 증거합니다.
[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 3:12-14)

즉,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자는 반드시 새하늘과 새땅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며 달려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경주에 바른 목표 의식이 없을 때 나타나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는 신앙 생활이 됩니다. 그러면 위선과 판단이라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 거리며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목표 의식이 없는 신앙 생활은 자꾸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게 됩니다. 기도를 할 때도 사람들을 의식합니다. 성경을 보는 것도 사람을 의식해서 봅니다. 봉사를 할 때도 사람들을 의식합니다. 즉, 자기 나름대로의 분명한 목표가 없으니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신앙을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목표 의식이 없는 신앙은 일반적으로 대중이 달리는 방향으로 달립니다. 따라서 이들의 신앙 생활은 언제나 시대와 상황에 따라 유행처럼 아무렇게나 휩쓸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경주는 좁은 문이 아니라 넓은 문으로 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고 편안한 넓은 길을 선호하여 그 길로 달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낭떠러지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바라 보며 달리는 신앙의 경주는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를 보며 간섭하고 판단하느라 자신의 경주를 달리지 못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왜 저렇게 뛰지? 손을 이렇게 높이 들어야지. 어어? 저놈은 왜 얼굴에 인상을 쓰며 뛰는 거야.’
자신도 경주자인데, 다른 경주자에게 너무 신경을 쓰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경주를 하지 않으며 남에게 간섭하며 시간을 떼우는 이유는 자신의 경주의 목표 지점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목표 의식이 없는 신앙은 극복해야 할 장애물 앞에서 포기한다는 점입니다. 좌절하며 실패하는 경주자들은 장애물의 부정적인 면에 집착하게 되면서 경주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경기를 하면서 '길이 험하다', '경사가 왜이리 급해', '길이 너무 좁아', '날씨가 춥다', '습기가 많다' 등등 온갖 불평과 원망과 말하면서 주춤거린다면 마라톤에 실패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골인지점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난관이 있더라도 원망이나 탄식, 불평 대신에 주님과 함께 그 장애물을 이겨내면서 계속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달릴 수 있습니다.

인생을 가는 동안 믿음의 마라톤 경주를 달리면서 험하고 어려운 길이 눈 앞에 보일지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목표로 바라보며 적극적인 믿음의 태도를 가지고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소년이 겨울이 시골 할아버지 집에 놀러갔습니다. 눈이 하얗게 쌓인 어느날 아침에 소년과 할아버지는 산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소년에게 시합을 청했습니다.
“너와 내가 5분을 걸어서 누구 더 똑 바로 걷는지 시합하자!”
소년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발을 보며 똑바로 걸었습니다. 그는 결코 연약한 할아버지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5분 후에 각자 걸은 길을 돌아보니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일자로 똑바랐지만, 소년의 걸음은 삐뚤빼뚤 엉망이었습니다. 소년이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할아버지는 힘도 없으신데 그렇게 똑 바로 걸을 수 있었나요?”
할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얘야, 너는 네 발을 보고 걸었지만, 나는 저 산위의 소나무를 보고 걸었다. 목표가 정확하면 걸음도 정확해진단다.”

이와같이 우리의 믿음의 경주에서 목표가 정확할 때 우리의 신앙은 올바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1절을 보니,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인내라고 말합니다. 마라톤은 아무리 전반에 열심히 잘 뛰어도 후반에 그만지쳐 뒤로 쳐진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준비, 땅하면 약 1K 미터 정도는 전력 질주하여 선두를 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맨 뒤에서 포기하고 주저 앉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경주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마라톤을 한결같이 잘 뛰어야 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 잘 뛰었다고 해도 후반 인생에 뒤쳐질 수 있습니다. 거꾸로 처음에 제대로 못 뛰었어도 후반에 다시 잘 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후반 인생을 더 열심히 뛰고 잘 달리면 더 좋습니다. 나는 지금 다 살았다라고 생각하며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지금부터 뛰면 됩니다. 아직 경주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남은 기간이 있습니다. 이는 사실 주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아직 허락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라톤은 육체적 고통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경기입니다. 마라톤 선수들은 달리는 동안에 항상 갈등이 옵니다.
‘꼭 이 마라톤 경기를 뛰어야 하나. 이렇게 힘들게 뛰어야 하는 것인가?’
자기와의 끊임 없는 싸움이 마라톤 경주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계속 되는 헐떡임과 육신의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또한 시련 속에서 계속 포기하지 않고 달기기 위하여 자신을 쳐 복종시켜야 하는 것이 믿음의 싸움니다. 그래야만 신앙의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기 바랍니다. 믿음의 마라톤을 완주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큰 영광을 얻는냐 못얻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완주해야 합니다.

중요한 진리는 우리의 인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삶의 결정을 내릴 때, 어떤 행동을 할 때 우리들의 숨은 동기를 확인하기 바랍니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인지 묻고 결정하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을 생각하며 사랑할 때 주께서는 변함없는 생동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인내를 위해서는 목표는 분명하게 바라보되 남은 거리를 미리 내다보지 말고 매일 한걸음씩만 보기 바랍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오늘의 믿음의 달리기는 오늘 달릴 것만 달리면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매일 한걸음씩 걷는 것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의 인내는 나의 인내가 아니라 믿음으로 통해 얻는 그리스도의 인내입니다. 그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면 큰 영광을 얻게 됩니다.
[
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살후 3:5; 히 10:35-36)

이제 2절을 봅시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동안 꼭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발생했던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미래의 즐거움을 위하여 현재의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이러한 인내의 자세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영원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가장 어려울 때 좌절합니다. 그러나 어두운 시점에서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뒤로 물러나지 않고 믿음으로 전진한다면 어둠이 물러가면서 광명한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경주의 방향만 맞는다면 반드시 그 길은 밀로 가가면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방향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방향을 잘 정하셨다면 남은 것은 인내를 가지고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2-3).

그리스도의 인내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 기억하며 끝가지 인내하고 낙심하지 않기 바랍니다. 믿음의 경주를 달릴 때 많은 불신자들의 조롱이 있었도 개의치 말고 계속 달리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귀한 영광의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믿음으로 앞서간 참된 믿음의 영웅들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 가운데 믿음의 흔적들을 남긴 귀한 자취들을 기억하며 본 받기를 바랍니다. 그들을 기억할 때마다 한없는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선조들이 남긴 글들을 읽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의 믿음의 경주 가운데 큰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그들의 글들을 읽다보면 우리를 향해 힘차게 응원하는 그들의 함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쳐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다시 주님을 향해 힘차게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단 한번 밖에 없는 믿음의 마라톤 경기입니다. 다시 되돌아가 두 번 뛸 수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살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인생을 주신 그분을 위해 살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믿음의 경주를 뛰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 고난 후의 영광을 기억하며, 성령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말씀으로 힘을 얻어 끝까지 최선을 다하기 바랍니다. 경주가 어려워도 중도의 포기 없이 경기는 계속해야 되어야 합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아니들려도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를 뛰다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마 8:13).
“잘하였다도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3).

우리의 남은 인생 가운데 믿음의 경주를 최선을 다해 완주하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무한한 영광과 복을 소유하는 복된 주의 백성이 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작성일:2017-03-12 16:19:09 211.235.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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