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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한편

제목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마태복음 21:1-11)

닉네임
설맥
등록일
2017-04-12 17:29:50
조회수
1406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고백한다)
마태복음 21:1-11

스가랴의 예언 성취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인 한 주간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입던 옷과 나뭇가지를 바닥에 깔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하심으로 예언된 메시야되심을 선포합니다. 스가랴 9: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의미는 무엇인지? 무리들이 길 바닥에 옷과 나뭇가지를 타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이유는 무엇인지? 제자들을 포함한 무리들이 가졌던 메시야 관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귀를 끌고 오는 두 제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내려갑니다. 유대인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요, 무엇보다 이미 지난 3번에 걸쳐 자신의 수난 예고를 하셨는데, 그 예언을 이루기 위해섭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벳바게에서 두 명의 제자에게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을 것인데 나귀를 끌고 오라 만일 누가 왜 끌고 가느냐고 묻는다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스가랴의 예언을 이루시는 성취자이심에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화평의 왕이신 예수님
스가랴가 예언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본문 5절을 보면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이스라엘 왕, 공의로우신 분, 구원을 베푸시는 분, 겸손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스가랴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공의로 구원을 베풀고, 겸손으로 다스리는 화평의 시대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이 세상이 추구하는 화평의 수단은 전쟁입니다. 전쟁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정복함으로 화평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모든 분쟁과 갈등을 끝냅니다. 이때 정복자는 정복의 상징으로 말을 타고 개선가를 부르며 당당하게 들어옵니다. 정복자의 백성들은 큰 소리를 외치며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며 기뻐합니다. 하지만 피정복자는 가슴을 치며, 고통을 느끼며, 절규합니다. 힘의 논리에 의해 주어진 평화는 진정한 평화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루실 화평의 시대에 대해 스가랴는 어떻게 말합니까? 10절입니다.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힘, 전쟁을 상징하는 병거, 말, 활은 다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힘이 아닌 사랑과 희생으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화평의 범위는 한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땅 끝까지, 모든 인류에게 임하는 화평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1:2절는 그 나귀는 아무도 태운 적이 없는 나귀라고 했습니다. 이 나귀는 멍에를 멜 나귀입니다. 이 나귀가 첫 번째 짐을 지는데 그것이 예수님을 태우는 일이었습니다. 나귀 자신이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영광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한 번도 멍에를 메 본적이 없는 나귀를 타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먼저 화평의 장애물의 인간의 죄의 멍에를 예수님이 해결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9-30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를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고 말합니까? 분명히 멍에는 어렵고, 짐도 무겁고 힘든데 어떻게 쉽고 가볍다고 말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우리의 짐을 다 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다 감당하셨고 그 결과 죄의 멍에는 벗어지고, 화평이 왔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이지만, 어린 나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등에 짐을 진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은 태워보니 어떤 두려움과 불안보다는 평안을 느끼고, 예수님이 새털처럼 가볍지 않았었나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린 나귀가 힘이 들어 고통을 느꼈다면 화평의 시대에 고통을 당하는 나귀, 가벼운 멍에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싣고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이유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부르며, 옷과 나뭇가지를 길바닥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을 합니다. ‘호산나’의 뜻은 시편 119:25-26절에서 “우리가 당신께 구하오니 우리를 구원 하소서”입니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는 종려나무가 아니라 감람나무, 올리브입니다. 올리브를 메시야 나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무리들은 올리브 나무 가지를 흔들지 않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느헤미야 8:15절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는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초막절 행사를 위해 네 가지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초막을 지으라고 명령합니다.
초막절은 농사 절기로 보면 추수를 한 다음에 지키는 절기이지만 민족적인 절기로는 해방절입니다. 우리나라의 8.15 광복절과 같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오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심을 감사하면서 초막을 짓고 예배를 드립니다. 초막을 지을 때에 종려나무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또 주전 165년 시몬 마케베오가 성전을 재봉헌할 때에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 길에 나뭇가지를 깔며 환영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 옷을 길에 까는 행위도 예후가 왕이 되었을 때에 무리들이 옷을 깔고 나팔을 불면서 예후는 왕이라고 선포한 일이 있습니다(왕하 9:13).
화평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이 길 바닥에 옷을 깔고, 승리의 상징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다윗의 자손, 메시야로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민족의 해방자요, 구원자로서 믿고 환영하는 것입니다. 현재 로마의 압제로부터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다윗의 왕국을 재건하고자 하는 염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잘못된 메시야 관
예수님의 입성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소동했습니다(10절). 사람들은 갑작스런 예수님의 등장에 이는 누구냐, 누구길래 나귀를 탔으며, 호산나하며 환영을 받는가? 예수님을 반대하는 어떤 무리들이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11절). 이 말은 예수님은 조롱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나다나엘도 빌립의 전도를 받았을 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무리들은 결코 나사렛에서는 선지자가 날 수 없다고 평가절하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이나, 호산나를 부르면 환영하는 무리들이나,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라고 조롱하는 무리들이나 모두가 예수님을 자기들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생각하고 있던 메시야 관은 다 틀렸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참된 의미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힐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갔고, 부인했습니다. 환영하는 무리들과 반대하는 무리들은 하나같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치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바른 신앙
바른 신앙이란 어디서 옵니까?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땅에 화평과 인간의 모든 멍에는 죄의 문제가 해결됨으로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3절에 영생이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면한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들 가정, 환경, 인종, 기근, 질병 등에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하지만, 그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을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하실 주님께 호산나를 부르면서 이 땅과 교회, 가정, 우리 심령에 참된 화평이 임하기를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대림동 예일교회 이동섭 목사)
작성일:2017-04-12 17:29:50 116.255.8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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