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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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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등록일
2017-12-15 10:08:43
조회수
640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39).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유대 땅에 오셨다. 여기서 자기 백성이란 하나님과 옛 언약 관계가 형성되었던 이스라엘이다. 이방인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 관계가 형성된 이후에 적용되는 표현이다. 베드로 사도의 글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이방인 신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했다(벧전 2:10).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 주어진 자는 자기 백성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살린다는 말은 원래는 산 자였는데, 죽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님께 주어진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 죽은 상태이다. 성경에서 죽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마 8:22)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확인되는 바다. 앞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뜻하고 뒤의 죽음은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난 상태를 가리킨다. 뒤의 죽음은 영원한 멸망과 연결된다. 위의 예수님의 말씀에서 죽음은 전자를 뜻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인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옛 언약 관계인 유대인들이 그 상태였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이탈한 상태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 유대 땅에 오셨다. 완전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셨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그 언약을 전파하셨고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하셨다. 그리스도 곧 구원자시다. 그분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유대인들도 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은 다시 산다. 이는 이방인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 곧 사는 것과는 다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엡 2:1). 다시 사는 것과 처음으로 살아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언약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의 시대를 펼치실 때엔 새 언약으로 부르심을 받는 사람과 부르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구분이 있다. 전자를 구약에선 그루터기(사 6:13), 남은 자(사 10:21)라고 하였다. 시내산 언약 시대의 마지막 때에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멸망하는데, 하나님께서 살리신 사람들이다. 포로 후 회복 언약 시대로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이 예수님 때에도 있었고 그들이 예수님께 주어진 이들이다.



남은 자들이 포로에서 돌아왔던 것과 같이 예수님께 주어진 이들은 완전하게 된 새 언약 안으로 이끄심을 받는다. 한 사람도 잃지 않고서. 요한계시록의 144,000명(계 7:4)이 그들이다. 열 두 지파에 의해 구성되는데, 지파는 성경에서 야곱의 후손들 곧 옛 언약의 백성을 가리키는 전용어다. 하나님이 부르시고자 하신 자들 전부를 144,000(12×12×1,000)으로 표현했다. 예수님의 말씀의 온전한 성취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6-27)도 같은 뜻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로마서 기록 시점에서 하나님과 옛 언약 관계에 있던 유대인들이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그 진술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한 불신국가일 뿐이다. 오늘날 얘기되는 시오니즘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아무 상관없다.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의 기간이 찬 후엔 심판이 집행된다. 이스라엘과 맺어졌던 옛 언약이 공적으로 파기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누렸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지위를 잃는다. 언약 백성의 지위는 보존되었던 이전의 심판과는 다르다. 불신 민족, 불신 국가, 불신 백성이 된다. 다른 민족, 국가, 백성과 같이.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날이다. 예수님께서 감람산 강화에서 밝히신 돌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는 때(마 24:2)이다. 옛 언약의 중심인 돌 성전의 무너짐이 옛 언약의 공적 파기인 것이다.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이 함께 했다. 이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과 원리적으로 같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옛 언약이 공적으로 파기되는 때까지 이스라엘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을 모두 새 언약 안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다니엘에게 주신 예언이기도 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단 12:11). 여기에서 환란이 예루살렘 멸망과 돌성전 파괴를 통한 옛 언약의 공적 파기이다. 언약 백성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기에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 곧 대환난이다.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예수님께 주어진 자들이다.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으로 부르심을 받아 다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이루셨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새 언약 안으로 이끄시고자 하신 모든 자들을 이끄신 것이다. 곧 산 자였던 이스라엘이 그 죄로 인해 죽은 상태가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새 언약의 관계를 맺은 새 언약의 백성이 되도록 하신 것이다.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이 언약 관계에 신실하지 못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는데, 예수님에 의해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방인이었다가 곧장 예수님의 새 언약 안으로 부르심을 받는 이들에 대한 진술이 서신서에 나온다. 엡 2:8-9, 딛 3:5이다. 내용적으로 같다. 신자에겐 이미 이루어진 일이어서 구원 얻었다고 진술되어 있다. 이는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인 구원은 당사자의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편에서 전적인 은혜의 결과이다. 복음을 들을 때에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행 16:14)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 안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다 믿는다(행 13:48). 여기에서 영생은 이 땅에서 삼위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뜻한다(요 17:3).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어 교제하는 것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한다.



만약 이 구원이 사람의 행위 곧 순종이냐 불순종이냐와 연관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성취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예수님께 주어진 이스라엘이 모두 순종한다는 절대적 보장이 없기에.



위 말씀은 이제까지 밝힌 바와 같이 성도의 견인을 말씀하고 있지 않다. 성도의 견인의 근거로 생각한 것은 본문을 잘못 읽은 결과이다.



사족



이러한 설명에 대해 어떤 신학자가 그렇게 풀이하느냐고 밝히란다. 내 글의 옳고 그름이 신학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아니다. 옳고 그름은 스스로의 지성을 바르게 사용하여 판단하면 될 일이다. 반박할 거리가 있다면 반박하면 되고. 신학 사대주의나 의타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물론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위의 설명 또한 이제까지의 교회 역사에서 누군가 말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 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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