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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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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창 기
등록일
2007-11-17 14:53:23
조회수
4491
성탄의 계절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간다. 하지만 ‘세살버릇 여든까지’란 말처럼 우리는 어릴 때 보고 배운 그대로 교회에서 선물교환과 성극과 같은 잔치 분위기에 익숙한 것 같다. 그야말로 성탄절은 단지 예수님이 나신 날로만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교의 석탄절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마저도 연말연시와 이어진 성탄 대목을 보려는 마케팅 전략에 따른 장식 때문에 들뜬 분위기가 돋우어진다. 말하자면 우리 구주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신 그 참 뜻은 오해되고 흐려지고 가려진지 오래되었다. 그럼 성탄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심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revelation].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과 모양으로 인간에게 자기를 나타내시었다. 마지막 날에 그 초점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확실하게 드러내시었다.[히1:1-3]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병을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는 모든 활동은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시’를 이루시고 완결[성]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아기 예수님으로 태어나심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이다[incarnation].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요1:14] 따라서 하나님을 찾아보려면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성경의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요1:18]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을 통해야 하고[요14;6], 그 예수님을 알려면 ‘오직 성경으로써’ 가능하다.

예수님이 세상에 처녀 마리아 몸을 통하여 아기로 태어나심 자체가 주님의 ‘낮아지심’이다[humiliation]. 주님은 본래 근본이 하나님이시었다. 그 하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사람들의 환호와 영광의 축포 속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비우시었다. 즉 스스로 종의 모습을 가지시고[taking: labw,n],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being made: geno,menoj],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being found: eu`reqei.j]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시었다.[빌2:6-8] 하나님 되신 모든 것을 누리려 하시지 않으시고, 자기는 빈 털털이로 되신 셈이다. 이 말은 자신의 신성[deity]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영광을 내려놓으신 것이다 [요17:5]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종으로 낮아지셨다. 이 낮아지심은 고난의 연속이었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보통 사람의 무덤에 묻혀 지옥에 내려가시기까지 연장된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단번에 [once for all] 자기 몸을 영원한 산제사로 드리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은 능동적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었다.

이러한 주님의 낮아지심을 주님 자신만의 변혁으로 보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가장 큰 잘못이다. 즉 우리가 주님과 연합된 사실을 평소에 잊어버려 핵심을 놓치고 성탄을 맞이하기 일쑤란 말이다. 주님의 낮아지심은 변혁 [transformation]의 일부이다. 주님의 탄생-고난-부활-승천-오순절성령강림-재림으로 이어지는 주님의 변혁의 일부이다. 우리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은 주님변혁이 곧 나의 변혁이라는 사실이다.[롬 1:3-6] 주님부활이 나의 부활이요[엡2:5,6], 주님 부활이 나의 중생임을 [벧전 1:3] 믿고 즐겨야 한다.

따라서 주님과 나 자신과의 이런 관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인품 [Person] 때문에 나의 신분 [person]도 변혁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러 오신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시었다.[마20:28] 여기서도 주님의 이 낮아지심으로 구원받은 우리 성도는 본질적으로 섬기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주님이 섬기는 분이시니까 우리도‘주님을 따라서’섬기는 것이라기보다도, 주님과 우리가 연합되었기에 ‘본질적으로 섬기는 자’되었음을 명심해야한다. 주님 따라 우리도 33살까지만 살아야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주님 따라 빌라도의 법정에 설 필요는 없다. 다만 섬기러 오신 주님과 연합되었기에 본래 섬기는 자란 말이다. 따라서 ‘기독교 지도자’란 말은 주님의 낮아지심과 맞지 않는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어떤 변혁이 일어났는가? 하늘의 영광 보좌에 계셨던 분이 맏아들[firstborn :prwto,tokoj]로 태어났지만 사관[inn]에 있을 곳이 없어서 구유에 누인 아기로서 가난하고 비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눅2:7] 보는 이와 읽은 이들의 동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의 동정을 구할 목적으로 이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은 [목자들] 너희에게 ‘표적’[sign: shmei/on]으로 오셨다.[눅2:7] 또 “이스라엘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눅 2:34] 표적이란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서 [부산 영도의 사람들에게] ‘오륙도에 가자’고 할 때 오륙도는 뷔패와 같은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 말 듣고 배타고 오륙도에 가는 사람은 없다. 표적은 그 뒤에 가리키는 실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럼 아기 예수님 표적의 실체는 무엇일까?

옛 이스라엘의 심판이요 새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요약된다. 맏아들로 오신 아기 예수님은 호적 하러 온 ‘다윗의 집 족속’[눅 2:4]의 본토박이 이스라엘로 그들 한 가운데 계셔야 될 분이다. 그러나 자기 동네 자기 족속을 떠나 구유에 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맏아들과 백성의 지위를 버림받았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출 4:22-23]이라고 하셨다. 성탄절에 우리는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의 딱한 사정을 동정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옛 이스라엘이 저주 받는 중에 새 이스라엘은 축복을 받는다. 즉 그 당시 버림을 받은 목자들에게 주님의 탄생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 이 경이로운 사건은 새로운 이스라엘 [교회]의 첫 확장이다.

그 지경에 <동일 지역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눅2:8-12]

여기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이 세상의 끝이요, 오는 세상의 시작임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9장26절 하반 절에도 “[그리스도께서]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at the end of the ages :suntelei,a| tw/n aivw,nwn] 나타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탄생, 즉 예수께서 처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세상의 끝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물질적인 우주가 아니라 죄와 육적인 모든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탄을 맞이한 우리는 금년도 거의 다 지나갔다는 생각보다도 이 세상의 마지막을 기억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세상’ [this Age:세대]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는 세상’ [세대: the Age to come]에 속하였음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하겠다. 따라서 나의 옛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은 포기 하고 새로운 피조물 된 자신에 걸맞게 새로운 삶을 설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마지막과 ‘오는 세상’의 시작은 서로 포개져서 [중첩되어, overlapping] 있다. 주님의 나심으로 마감되는 옛 유대주의의 ‘이 세상’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거쳐 예루살렘 성전 파괴[70 AD]로 결정적인 끝을 맞이하고 나아가서 주님 재림 때의 심판을 내다본다. 동시에 주님 탄생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오는 세상’은 주님 부활을 거쳐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결정적인 출발을 한다. 그래서 주님 탄생부터 70년 동안이 옛 세상 [언약]과 새 세상[언약]이 함께 존재하는 ‘언약 중첩기간’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고린도전서 10장 11절 대로 “... 말세를 만난 우리...”의 삶을 살고 있다. 즉 “말세를 만난 우리” [upon whom the ends of ages has come]란 ‘이 세상과 오는 세대의 두 끝들에 접하여 있는 우리’란 말이다. 즉 ‘우리’는 두 세대에 걸쳐있는 존재이다.

올해는 이 모든 성탄의 근본 뜻을 잘 드러내는 심오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란다.
작성일:2007-11-17 14:53:23 125.189.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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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panta 2007-11-17 14:54:40
월간 고신 12월호에 실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