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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류의 합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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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등록일
2018-04-03 22:32:35
조회수
548

모든 교리는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성도의 견인도 다르지 않다. 그 근거로 제시되는 성구는 세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 엡 2:8~9, 딛 3:5, 요 6:39~40

둘째, 요 10:28, 롬 8:31~39, 고전 1:8, 빌 1:6

셋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



첫째는 하나님의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한 성구다. 앞 둘은 이방인, 세 번째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효력있는 부르심이다. 불가항력적 은혜를 뜻한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그의 전생애 중에 한번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서 반드시 부르셔서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신다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이 아니다. 

성도의 견인의 근거로 삼는 것은 잘못이다.



둘째는 표면적으론 성도의 견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세윤 교수가 성도의 견인도 맞다고 하는 이유이다. 단순하다. 그런데 그 성구들은 은혜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은혜에서 탈락하지 않는 경우를 가리킬 수도 있다. 둘은 명백히 다르다.

둘 중 어느 것일까? 가리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은혜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면 성경의 다른 곳에 은혜에서 탈락하는 것에 관한 진술이 없을 것이다. 모순이 되기에 둘은 동시적일 수 없다. 그렇지만 성경엔 은혜에서 탈락하는 경우에 대한 진술이 있다. 많다.

그러므로 위의 성구들은 은혜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서 탈락하지 않는 경우에 관한 진술이다. 

그 성구들을 은혜에서 탈락하지 않는다고 읽은 것은 잘못이다.



셋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를 루터와 칼뱅이 오독한 것과 관계되어 있다. 

그들은 행위를 신자가 자기 의지로 하는 모든 짓으로 생각하고 칭의는 그것이 일절 배제된 믿음의 사안이라고 보았다. 당연히 한번 의롭다함을 받으면 불변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법정적 칭의다.



그런데 거기에서 행위는 인간이 자기 의지로 하는 모든 짓이 아니다. 이방인 신자들이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율법 곧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잘못된 것이었다. 모세 율법은 옛 언약의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지 새 언약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믿음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새 경륜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 정하신 방식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박국이나 아브라함과 같다. 현재 새 경륜으로 그들에게 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이방인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은 무엇인가? 모세 율법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율)법(롬 8:2), 그리스도의 (율)법(갈 6:2),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 준수다. 모세 율법과 달리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게 한다. 당연히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이신칭의의 구현이다.



이 경륜을 알지 못하여 모세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불순종이다. 당연히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한다. 천사라고 하더라도 전하면 저주를 받는 다른 복음인 것이다(갈 1:8).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는 관계적 칭의를 가리킨다. 법정적 칭의가 있지만(롬 3:22) 주 내용은 관계적 칭의다. 또한 법정적 칭의는 불변이 아니다.



여기에 신학적 토양이 더해졌다. 칼뱅의 예정론이다. 구원론에서 예정과 섭리론에서 예정으로 나뉜다. 

전자는 무조건적 선택과 불가항력적 은혜와 연결된다. 문제가 없다.

후자에서 그는 돌 하나가 어떤 곳에 어떤 모양으로 있는가도 예정이란다. 우주의 모든 것이 예정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도의 견인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불가항력적 은혜를 예정하시고 영원한 구원을 예정하지 않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것을 예정하지 않았다. 신자와 관련하여 하나님은 그의 앉고 일어섬을 미리 아신다. 예지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을 아신다. 예정했기에? 아니다. 그 능력이 지극히 크시기에 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속 역사와 부르심의 은혜 외엔 예정하지 않았다. 간섭하신다. 예정하고서 예정대로 되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다. 때론 내버려두시기도 하신다. 기쁘신 뜻을 따른 역사다. 예정과는 아무 상관없다.



영원한 구원은 예정의 사안이 아니다. 하나님은 부르신 이들이 모두 영원한 구원을 얻기 원하시고 일하신다. 은혜이다. 그 은혜를 바르게 받으면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 반면에 헛되이 받으면 썩어진 것을 거둔다.

섭리론에서 얘기되는 예정은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것이다.



네 오류가 합작하여 성도의 견인이 탄생했다. 오독한 이신칭의와 칼뱅의 예정론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루터와 칼뱅이라는 이름값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름값 곧 전통의 추종에서 벗어나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은혜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진술한다. 예수님과 모든 성경 기자들의 한결같은 경고다. 영원한 구원을 받도록 하시려는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한다(고후 6:1). 그 은혜를 헛되이 받으면 은혜에서 탈락하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이 아니라.



성도의 견인론은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이기에 거짓 교리이다. 이 거짓에서 돌이켜야 한다. 어려운가? 너무나도 어려운 듯하다. 그렇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선 쉽다. 위의 두 번째를 생각해보자. 그 성구들이 은혜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은혜에서 탈락하지 않는 경우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만 되면 된다. 발상의 전환 하나면 있으면 그 거짓에서 벗어나기가 쉽다.



거짓 교리인 성도의 견인론에 빠져 있다면 그 거짓에서 돌이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기를 바란다.



첨언

은혜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성구들이 성경엔 많다. 믿는 자를 실족케 하는 것 곧 믿음을 저버리게 하는 것(마 18:6-9),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저버림(마 25:14-30, 고전 9:27), 삶에서 약자나 고통받는 자로 찾아오시는 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마 25:31-46), 성전 곧 교회를 더럽힘(고전 3:16), 어미와 음행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결정적 범죄(고전 5:5), 윤리적 범죄의 지속(고전 6:8-11), 믿음에서 파선하고 선한 양심을 저버림(딤전 1:19), 배교(히 6:4-6) 등이 그 예다.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도 생각할 수 있다.

작성일:2018-04-03 22:32:35 223.33.184.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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