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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제해설] 인간의 구성요소에 대한 삼분설(세대주의 입장)과 이분설(개혁주의 입장)에 관한 성서적, 신학적 이해

닉네임
PAUL
등록일
2018-05-12 10:41:19
조회수
4531
(2018-05-11)

[질문 내용]
인간의 구성요소에 대한 삼분설과 이분설에 관하여 이 두 견해를 비교하여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자세히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신학적인 난제]
얼마 전에 어느 분으로부터 인간의 구성요소에 관하여 삼분설(trichotomy)과 이분설(dichotomy) 중에 어느 것이 맞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문제는 이 두 견해가 나름대로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신학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삼분설은 인간의 구성요소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 같은 성구들에 호소하고 있으며, 또 이분설도 인간의 구성요소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성경구절들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난제가 되어왔다. 삼분설은 멀게는 일부 그리스의 신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그노시스 사상(인간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바울이 이단으로 정죄한 그노시스주의는 혼합주의(syncretism)기는 하지만, 이 사상의 영향으로 오리겐의 알레고리 해석원리에 적용되었고, 현대에 이르러 특히 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한국의 세대주의의 정설이 되어왔고, 수많은 교인들이 이 삼분설의 프레임(frame)에 갇혀있는 것 같다. 이 프레임을 통하여 "영"적 신앙, "혼"적 신앙, "육"적 신앙이라는 3부분 형식(3 part-formation)이 수많은 교역자와 교인들에게 신앙의 패턴으로 자리잡아 만연되어 있다.

본 아티클에서는 여러 가지 제한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세밀한 부분들은 생략하고 문제가 되는 "영"과 "혼"과 "육"에 관하여 개혁주의신학의 입장에서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구성요소가 왜 세 부분이 아니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삼분설과 이분설에 관하여 상세하게 알기를 원하시는 분은 작년(2017년)에 출판사 [기독교문서선교]에서 출간한 [성경난제 해석과 방법론] (912페이지 중 625-650페이지)을 참고해주기 바란다. 그 책에서 비교적 소상하게 학문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어 일독을 권한다.

[해석 방법론]
이 문제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의 인간론(anthropology)에서 다루게 되는데, 인간의 구성요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인 접근(ontological approach)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의 구성요소는 기능적(functional)이 아니라 본체론적(ontological), 즉 존재론적으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구성요소는 분명히 한낱 추상적(abstract) “기능”(function)이 아니라 실체적 “존재”(substantial existence)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구성요소를 존재(substance)가 아니라 기능(function)으로 이해하게 되면, 삼분설외에 사분설이상의 오류에 빠질 수 있게 된다(신 6:5; 막 12:30; 히 4:12; 살전 5:23; 고전 2:14; 고전 3:1-3; 고전 15:44). 그러므로 영과 혼을 각각 독립된 존재로 생각한다면 존재론적 이분설에 대한 오해를 떨쳐버릴 수가 없게 된다.

[답변과 해설]
이 문제를 정확히 풀기 위해서 인간의 개념과 존재, 그리고 그 기능에 관해서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삼분설의 주장과 이분설의 주장을 비교 연구해서 정확한 해석을 통하여 두 견해들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 존재의 개념과 요소, 그리고 그 기능에 관하여 소상하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각 부분으로 분리시키면 사람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각 부분이 통합된 전인적 “사람”으로서 논하지 않으면 각 부분이 분리된 상태에서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육과 영이 따로 분리된 상태에서는 온전한 사람의 의미를 갖지 못하며, 그러므로 영육이 부활한 몸이 되어야만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칭의나 성화, 영생, 상급 등의 의미는 분리되었던 부분들이 승화, 통합된 부활의 몸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어원적으로 볼 때, 성경에는“사람”이 몇 가지 다른 용어들로 사용되고 있다. 성경에는 아담(adam, ם󰕇אָ), 이쉬(ish, שׁיאּ), 에노쉬(enosh, שׁוֹנ󰔤), 께베르(geber, ר󰔫󰕃)등등이 있는데, 구약성경에 최초로 언급된 “사람”(창 1:27, 아담, ם󰕇אָ)의 어원은 “땅”(흙, earth, ground)을 의미하는 “아다마하”(adamah, ה󰗲󰕇󰔣)이며 어근 “אדם”(황갈색, 적색, 창 25:30)에서 유래했다. 성경에 보면 인간의 구성요소는 “육신”(body)과 “영혼”(soul) 또는 “육”(flesh)과 “영”(spirit)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이 같은 여러 가지 용어들을 교호적으로 혹은 독립적으로 사용하거나 각 용어들의 합성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첫째로, 육신(ר󰙴󰔯)의 원어는 빠살(bassar, ר󰙴󰔯)로 뼈와 살을 포함하는 “육신”으로 번역된 곳이 많다(왕상 21:27; 민 8:7; 욥 4:15; 잠 4:22; 시 84:3, 119:120; 왕하 6:30). 뼈와 살의 생물학적 의미를 넘어 모든 영적 존재와 기능의 좌소(mysterious embedded place)가 되는 “육신”(몸, ר󰙴󰔯, σόμα, body)을 의미한다. 빠살(ר󰙴󰔯)은 영적인 기능보다는, 육적인 정욕에 가깝기 때문에(겔 23:20) 종종 인간의 범죄성(human criminality)을 나타내기도 한다.(창 6:3).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좌소(시 42:5,11)인 동시에 죄의 좌소가 되어(롬 7:20) 죄로 인하여 서로 분리될 수밖에 없어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다(시 78:39; 사 40:6).

둘째로, “영혼”(soul, שׁ󰘱󰗾, 네페쉬, flesh+spirit, 󰖏וּר)으로서의 인간의 몸은 생명체로 비물질적 존재인 영(ruach, 󰖏וּר)과 물질적인 존재인 육(bassar, ר󰙴󰔯)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에는 사람을 “영혼”으로 표현하는 곳도 많다. 그런데 혹자는 비물질성인 사람의 혼(soul)과 물질(material)을 동일시하는데, 이것은 스피노자(Spinoza)의 일원론(Monism)이나, 마르크스의 유물론(Materialism)과 같은 사상으로 오해받기 쉽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스피노자의 일원론에 의하면, 유척추 고등 동물에서 무척추 하등 동물, 더나가서 아메바 원형질의 원자, 전자 등 물질로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존재가 “생명의 물적 근거”(the material ground of life)로서 물질의 극치이기 때문에 물질성(materiality)와 비물질성(immateriality)을 나타냄으로 영, 혼 혹은 정신은 물질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일원론적 유물사관(the materialistic conception of history)으로 마르크스의 유물론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몸(body)은 물질적(material, physical) 존재이며, 그리고 “영”이나 또는 “혼”은 비물질적(immaterial, spiritual) 존재이다. 그러면 인간의 “영”(󰖏וּר, spirit)은 무엇이며 “혼”(שׁ󰘱󰗾, soul) 무엇인가? 이 문제부터 풀어야 할 것이다.

먼저, 혼(魂, soul, שׁ󰘱󰗾)에 대한 어원적인 의미(שׁ󰘱󰗾, ϕυχή, soul)는 사람의 영과 혼을 존재론적으로서 나눈 두 부분이 아니라, ‘영’(󰖏וּר)과 “육”(ר󰙴󰔯)의 결합상태에서 나타나는 영의 기능의 육적 기착상태(embedded state)을 혼(שׁ󰘱󰗾)이라고 한다. 이 “혼”의 의미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과 “육”이 결합함으로 나타나는 생기의 주체로서 영에 관련될 때에는 “영혼”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그래서 성경에는 “사람”을 “영혼”이라고도 한다(창 2:7; 레 21:10; 욥 9:4,21; 학 2:13). 이런 경우에 영과 혼이 결합된 사람의 영적인 부분을 “영” 혹은 “혼”이라고 표현하여, 사람의 죽음을 영육의 분리 상태로 인식하여 사람이 죽을 경우에 “영”이 떠났다고도 하고, “혼”이 떠났다고도 하며(애 2:12), 영혼이 떠났다고도 하고, 소생할 때 혼이 돌아왔다고도 한다(왕상 17:22). 결국, 사람의 두 부분 중에 한부분인 영적인 부분을 “영” 혹은 “혼”이라고 하며 “영혼”(sou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짐승의 혼은 육신의 기능을 가능케 하는 육에 따른 비인격적인 기능의 주체이므로 죽으면 땅으로 내려가서 사라지고, 인간의 혼은 영에 따른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을 닮은 인격적인 기능의 주체이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간다(전 3:21). 이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는 짐승이나, 사람 모두 똑같은 용어인 “영”(󰖏וּר, spirit, 생기) 또는 “혼”(שׁ󰘱󰗾, soul)을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의 주체에 대한 표현이다. “생령”(창 2:7)의 원어는 “네페쉬 하야”(󰕘󰖷󰕘 שׁ󰘱󰗾)로 “살아 있는 영”(고전 15:45) 또는 “살아 있는 혼”(living soul)을 의미한다(창 2:7; 고전 15:44)). 이는 인간의 육신(흙)이 하나님의 영(생기: 󰖏וּ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죄로 인하여 생기(하나님의 영)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소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성령)을 받아야 한다.

“인간의 혼”과 “짐승의 혼”과의 차이는 그 “혼”이 “하나님의 영”과 관련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혼”이 있느냐 없느냐의 “혼”에 관한 한 인간과 짐승은 차이가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도 동물적인 요소인 육과, 영에 관련될 뿐만 아니라 육에까지 관련되어 있는 “혼”이 있다. 짐승은 단순히 육에만 관련된 혼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짐승이 죽으면 그 혼은 땅으로 내려가서 영원히 사라지고, 인간은 영에 관련된 혼으로서 위로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가서 영원히 거하게(영생하게) 되는 것이다(전 3:20-21; 12:7).

인간에게 사용된 “생령”(󰕘󰖷󰕘 שׁ󰘱󰗾)이란 말은 동물에게 사용된 “생물”(󰕘󰖷󰕘 שׁ󰘱󰗾)이란 말과 동일하다(창 1:21, 9:20). 똑같이 “살아 있는 혼”(living creature, 󰕘󰖷󰕘 שׁ󰘱󰗾)이다(창 1:24). “인간의 혼”과 “동물의 혼”과의 차이는 첫째로, 혼의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혼은 육에 뿐만 아니라 영과도 관련되어 있으나, 동물의 혼은 육에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혼의 작용에 있어서 인간의 혼은 영육에 작용하나 동물은 영이 없기 때문에 육에만 작용하고 죽은 후에는 육과 함께 아래로 사라진다. 셋째로, 창조에 있어서, 인간의 혼은 하나님의 입을 통하여 직접 생기로 불어넣었지만, 동물의 혼은 말씀의 명령에 따라 간접적으로 창조된 점이다. 넷째로, 창조 과정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로 창조되었으나,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졌다.

인간의 혼의 성격을 보면, 혼(שׁ󰘱󰗾)은 생명(life)이다(출 21:23; 4:19; 왕상 19:2; 욥 2:6). 그런고로 혼(שׁ󰘱󰗾)의 육체와의 결합 여부에 따라 생(生)과 사(死)가 결정된다(창 35:18; 왕상 17:22). 사(死)란 혼이 몸에서 떠나는 것이요(애 2:12), 생(生)이란 혼이 돌아오는 것이다(왕상 17:22). 생명(שׁ󰘱󰗾)은 구조상 하나의 보이지 않는 깊은 기관으로, 한역으로 “혼” 또는 “영혼”으로 번역되었다(시 69:1). 혼(שׁ󰘱󰗾)은 인간 인격인 지(知, knowledge), 정(情, feeling), 의(意, volition)의 좌소(座所)이다. 왜냐하면. 혼(שׁ󰘱󰗾)은 인간의 모든 욕구의 센터(the center of desires)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한역에서는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이는 “마음”(心)으로 번역되기도 하고(민 21:4; 삿 16:16; 삿 10:16), “뜻”(意)으로 번역되기도 했다(창 23:8, 9; 왕하 9:15; 신 21:14). 그리고 “욕심”(慾心)으로 번역도기도 했다(전 6:7; 잠 23:2; 민 21:5; 전 6:9; 사 56:11; 시 105:22; 신 21:14).

이 혼의 욕구(the desires of soul)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날 때에 곧 죽음이다. 그러므로 범죄 한 그 영혼(שׁ󰘱󰗾)은 죽으리라고 했다(겔 18:4). 혼은 의식과 감정을 가진 주체로서의 인간자체 곧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고로 인간을 “생령”(󰕘󰖷󰕘 שׁ󰘱󰗾)이라고 했다(창 2:7). 즉 “살아있는 혼”(󰕘󰖷󰕘 שׁ󰘱󰗾)이라는 뜻이다(창 14:21; 렘 43:6; 겔 33:6; 욥 30:25). 혼과 영의 성격의 상관관계를 보면, 인간은 영(靈, spirit)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지만 그 자체가 영이 아니며, 혼, 혹은 영혼(魂 soul, שׁ󰘱󰗾)이다.(In the soul, which sprang from the spirit and exist continually through it, lies the individuality__in the case of man his personality, his self, his ego; because man is not 󰖏וּר, but has it, he is soul, Oeheler, Theology of Old Testament, p. 150).)

인간은 “영”을 가지고 있으나 그 자체는 “혼”이다. 즉 인간은 영(ruach, 󰖏וּר)을 갖고 있는 혼(魂, שׁ󰘱󰗾), 즉 ”영혼“(靈魂)이다(Payne). 인간은 그 영으로 사고하지만, 사고하는 그 인간은 혼이다(Man has ruach, but he is a nephesh: he thinks with his ruach, but the thinker is the nephesh" J. B. Payne, The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p. 225). 영은 독립된 존재로 사고할 수 있고 영적으로 말할 수는 있으나, 인간으로서 말하는 주체는 영을 가진 혼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하나님께 말할 수 있으나 영으로 인간에게 말할 수는 없다(고전 14:2). 반드시 “영혼”이라는 연관관계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말은 “영”이나 “혼”이 독립적으로 할 수 없고, 단지 “영”이 “육”의 존재와 결합된 상태 즉 “영혼”(인간)이라는 완전한 "사람"으로서만 가능하다(창 2:7). 결국, “혼”이란 존재론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존재라기보다는 영이 육신과 결합함으로 생기는 인간의 지, 정, 의의 사고와 감정과 의지의 기능의 주체이기 때문에 영육이 분리되면 의식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공식으로 표현하자면, 사람(man)=육(flesh)+영(spirit)=혼(soul)이다. 창세기 2:7에서는 육(흙)+영(생기)=생령(살아 있는 혼)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을 말할 때에, 육과 영과 혼으로 부를 때도 있고, 육신과 영혼으로 부를 때도 있다.

다음으로 영(靈, spirit, ruach, 󰖏וּר)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영의 원어적 의미(󰖏וּר, πνεύμα, spirit)에 있어서 영(󰖏וּר)의 일반적 개념은 공기(air), 바람(wind), 숨/기식/생기(breath)로 자연계에서는 바람(창 8:1), 동식물계에서는 기식(창 6:17)으로, 인간에게서는 생기(창 2:7)로 이 영(󰖏וּר)의 강조점은 능력과, 생명과, 생기를 의미한다. 이 영(󰖏וּר)의 특별 개념은 성령(Holy Spirit)으로 바람으로 상징되며, 육적, 내적 능력으로 상징되고, 인간의 영적 변화의 능력으로 상징된다. 인간의 영의 성격을 보면, 혼이란 영이 육신(bassar, ר󰙴󰔯)에 작용하여 나타나는 형태이며, 영이란 혼의 존재의 근거이며, 원동력(motive power)이다. 영이 육신을 통하여 인격적 형태로 나타날 때에 그것을 혼이라 불렀다. 혼이 인간의 지, 정, 의의 좌소이지만(민 21:4; 삿 10:16; 16:16; 왕하 9:15), 그 좌소의 더 깊은 곳, 그 원천적인 좌소는 “영”에 있다. 그런고로 인간의 원천은 영에 있다.

그래서 인간은 짐승과 달리 감각적 감성과 이성을 가지고 있다. 원문의 “영”(󰖏וּר)을 한역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한 곳이 많다(창 26:35: 마음=ruach; 왕하 21:5; 민 5:14; 학 1:14; 잠 16:32; 대하 36:22; 겔 11:5; 18:31; 20:32). 인간은 근원적으로 심원까지 부패해졌기 때문에 자기의 영의 작용을 감지하거나 컨트롤하지 못한다. 영의 감각이 죽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이 되살아나야 한다(요 3:5; 시 53:12, 한역은 51:10; 시 51:17; 사 57:15; 66:2; 겔 18:31; 시 34:19; 레 19:17; 시 104:15; 렘 4:19).

이제부터 인간의 구조(The Constitutional Nature of Man)에 대한 학설들과 성서적 입장(William Hendriksen)을 살펴보기로 하자. "영"과 "혼"과 "몸"에 대하여 바울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삼분설과 이분설로 나누어지는데, 여기에 대한 학설이 다양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선 몇 가지 학설들을 살펴보고, 신학적인 바탕에서 특히 성경해석학적으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영과 혼과 몸이 과연 인성 구조의 세 부분을 의미하고 있는지 평가해야 할 것이다. 먼저, 살펴볼 것은 바울이 삼분설주의자라는 것이다(Paul is evidently a trichotomist). 바울은 분명히 인간이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삼분 설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성서적으로 분명하다.

첫째로, 성경 롬 8:10, 고전 5:5, 7:34, 고후 7:1, 엡 2:3, 골 2:5 등으로 미루어 분명하다. 이 구절들은 모두 이분설에 해당된다(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전 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7:34).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고후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골 2: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이와 같이 삼분설인 것같이 보이는 구절은 살전 5:23 뿐이나 이것도 인성의 존재론적 표현(ontological expression)이 아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삼분설(trichotomy)을 발견할 수 없다.

둘째로, 바울 서신의 독자들이 삼분설주의자라는 것이다(Paul's readers were trichotomists). 바울이 그들의 견해를 수용한 것이라는 설이다. 이 수용이론은 확실한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 바울의 독자들(당시 여러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절대로 그 당시 신 플라톤(Neo-Platonist) 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이것은 바울이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Gnosticism)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주의시킨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행 20:29).

셋째로, 바울은 이 성경구절에서 "영"과 "혼"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다만 수사학적 표현(rhetorical expression)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오늘날도 어떤 효과적인 목적을 위하여 영과 혼의 수사적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대단히 합리적인 것 같으나 정확하게 맞는 이론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과 혼과 몸이 완전한 동의어로 사용할 수 없는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영과 혼은 어떤 면에서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나(비 물질성에서), 어떤 경우에(물질성인 몸에 관련하여)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더구나 동일 구절에서 동일한 표현 목적으로 전혀 다른 말(몸은 영과 혼과 전혀 다른 성질의 것)과 혼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또한 어떤 곳에서는 종종 혼(ϕυχή, whence ϕυχιχός, "natural" or "unspiritual 고전 2:14)과 영(πνεύμα, whence πνευματχός, “spiritual” 고전 2:15)을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십계명의 첫째 돌 판의 대의가 되는 마가복음 12:30에 나타나는 "마음"(heart)과 "목숨"(soul)과 "뜻"(mind)과 "힘"(strength)은 동의어가 아니고 구별되는 서로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30; 신 6:5).

넷째로, 바울이 영(spirit)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성령(Holy Spirit)을 의미했거나, 중생한 개인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영(divine Spirit)을 의미했다고 한다. 이 이론은 훌륭한 주석가들에 의해서 진전되기도 했지만 전혀 잘 못된 이론이다. 왜냐하면, 바울이나, 실라나, 디모데가 성령이나 성령의 부분이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삼위일체 중 제3위가 되시는 성령이 흠이 있거나 온전해져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바울이 영(spirit)과 혼(soul)이라는 단어를 두 개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이며, 같은 비 물질성의 실체를 가리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은 하나님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영향을 받고, 예배하는 실체(spirit)로, 그리고 혼은 더 낮은 영역에 관련하여 감정, 애정, 욕망 등의 좌소(soul)로 보았다. 이 두 부분이 하나의 비 물질성의 실체로 보고, 여기에다 몸을 더하여 "영"과 "혼"과 "몸"이 온전하고 흠 없기를 바란다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이제껏 제시된 이론들 중에서 가장 개연성이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론은 한 마디로 이분설을 옹호하는 이론인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이 가장 훌륭한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여지는 남아 있다.

먼저, “온전하고”(sound)와 “흠 없게”(blameless)라는 수식어와 더불어 그 것의 대상이 되는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의 본래 의도와의 조화가 문제이다. “May the God of peace himself sanctify you entirely; and may your spirit and soul and body be kept sound and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살전 5:23, NRSV). 다음으로, 의미상으로 보아, 접속사 “와/과”(and, καί)의 사용상의 문제이다. “영"과 "혼”은 다음의 몸과 전혀 성질이 다른 실체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and"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영”과 “혼” 사이에도 과연 같은 동일 접속사(identical conjunction)인 등위접속사 “and"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그 다음으로, 형용사인 “온전한"(sound)을 세 명사들(spirit, soul, body)에 연결하고 있으나, 원문에서는 그것이 왜 단수로 사용되었는지?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문법상이나 문맥상으로도 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본래 언어라는 것은 구조상으로 완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 문맥의 원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여섯째로, 바울은 "마음"에 "영"과 "혼"과 "몸"이라는 세 개의 연결된 요소들(linked elements)의 연속성을 의도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그가 먼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너희의 온전한 인격”(your entirely person)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격적으로 혹은 온몸으로 흠 없기를 바라는 심정을 가지고 수사적 표현(rehtorical repression)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오래 전부터 제시되었던 것으로 근래에 와서 찰스 메이슨(Charles Masson)에 의하여 강력하게 제창되었다(“Sur Thessaloniciens 5:23," RThPh 33, 1945, 97-102). “And may the God of peace himself sanctify you holly, and may your entire person your soul and your body, be kept irreproachable for the day of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이분설] (Dichotomy)
다음으로, 이분설의 성서적 근거에 대해서 살펴봄으로 삼분설에 대한 반론을 대신하려고 한다. 성경은 인간이 “혼” 혹은 “영”과 “몸” 혹은 “육”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혼(שׁ󰘱󰗾, ϕυχή)과 영(󰖏וּר, πνεύμα)을 말하고 있으나,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존재의 두 방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서적으로 고찰할 때, 성서는 이분설에 관한 무수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첫째로, 인간 창조의 원리로 볼 때,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hY:j' vp,n)이 된지라”(창 2:7).

jP'YIw" hm;d;a}h;A@mi rp;[; !d;a;h;Ata, !yhil󰔤> hw:hy rx,yYIw"
.hY:j' vp,n
And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KJV)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NIV)

위의 원문에 “생기”라는 원어는 “tm'v]n”(네페쉬)로 “󰖏וּר”(루하)와 동의어로서, 흙으로 몸을 짓고, 코에 생기, 곧 영(󰖏וּר)을 불어넣어서 생령(󰕘󰖷󰕘 שׁ󰘱󰗾)이 되었다고 했는데, 여기의 “생령”(生靈)의 원어는 생혼(生魂)과 동일한 것으로 “영”이나 “혼”이 동일함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이 문맥을 문자적으로 보면, 사람은 생기(tm'v]n) 즉 영(󰖏וּר))을 불어넣어서 사람 즉 “살아있는 혼”(󰕘󰖷󰕘 שׁ󰘱󰗾)이 되었으니, 그는 영(󰖏וּר)인 동시에 혼(שׁ󰘱󰗾)이다. 한역의 “영혼”은 영과 혼의 통일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 즉 몸과 영혼을 모두 지칭하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몸과 영, 이 두 부분은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인간은 본질상 다른 두 요소, 즉 "몸"과 "영"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활동에 있어서는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즉 육과 영이 신비적으로 연합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이나 “몸”이 따로 따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영육으로 인하여 인격화 된 “사람”이 범죄하는 것이다. 성서는 인간을 두 주체의 복합적 성질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인간 속에서 이중 주체로 따로 따로 행동하는 것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사람 속에 있는 사람의 “영”이 육신과 연합된 “자아의식”(마음)과 관계없이 “영”이 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교통할 경우에만 하나님의 영(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과 따로 행동할 수 있다(고전 14: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동은 마음에 의해서 제재를 받게 된다(고전 14:32). 그러므로 범죄에 관한한 분리된 "영"이 따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하여 육신과 연합된 "사람" 혹은 "영혼"이 범죄한다고 말해야 한다(겔 18:20-24). 이런 경우에 그 죄는 영육간에 모두 미친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범죄에만 해당될 뿐, 원죄와는 상관이 없다.

겔 18:20-24에 보면,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18:20)라고 했는데, 이 말씀의 문맥을 이어보면, 범죄하는 “그 영혼”(vp,n, 네페쉬)은 죽은 사람의 “영”(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을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혼” 즉 “산 사람”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라는 것을 본문 문맥을 통하여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에스겔 선지자가 그 당시 죽어 이 세상에 없는 “영”이나 “영혼”에 대하여 경고할 리가 없고, 살아있는 의인(사람)에 대한 선행과 악인(사람)에 대한 악행에 대하여 경고한 내용이다. 사람이 죽은 후의 “영” 또는 “영혼”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황으로, 범죄나 상급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본문은 죽은 사람의 “영”이나 “영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에 관한 언급으로, 성경에는 종종 “산 사람”을 “영혼”(네페쉬)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에스겔서 18장의 “영혼”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그래서 흠정역(KJV)에서 범죄한 “그 영혼”(the soul)으로 번역한 것을 새국제번역(NIV)에서는 번죄한 “그 사람”(the one)으로 번역하고 있다. 성경에서 “영”과 “혼”과 “영혼” 그리고 “사람”은 상황에 따라 교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창 2:7에서 인간의 복합성, 즉 이중성(두 부분)을 인정하면서도, “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혼” 또는 “생령”이라는 말은 인간의 복합성 중 어느 한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된 전체로서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령” 혹은 “생혼”이라는 말은 생기를 불어넣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몸과 영혼이 결합된, 그러나 순수한(타락되지 않은) 인간의 전체의 인격을 의미한다(man became a living being/creature, שׁ󰘱󰗾 here is not a constituent of human nature, but denoted the personality ad a whole; ICC, vol. I, p.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력(생기)을 받아서 하나의 몸과 영혼이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창 2:7; 겔 37:1-14). 창 2:7에서 인간의 복합성, 즉 이중성(두 부분)을 인정하면서도, “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혼” 또는 “생령”이라는 말은 인간의 복합성 중 어느 한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된 전체로서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령” 혹은 “생혼” 이라는 말은 생기를 불어넣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몸과 영이 결합된, 그러나 순수한(타락되지 않은) 인간의 전체의 인격을 의미한다(man became a living being/creature, שׁ󰘱󰗾 here is not a constituent of human nature, but denoted the personality ad a whole; ICC, vol. I, p.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력(생기)을 받아서 하나의 몸과 영이 연합되어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창 2:7; 겔 37:1-14).

둘째로, 혼과 영은 구별 없이 사용된다. 성경에서는 “혼”과 “영”을 교호적으로 사용하여, 혼을 감각기관과 관계를 가지는 인간 속에서의 정신적 요소라면, 영은 영계와 하나님에게 관계를 가지는 정신적 요소라고 말하는 철학적 개념을 반대한다. 영(󰖏וּר, πνεύμα)과 혼(שׁ󰘱󰗾, ϕυχή)이 다 같이 동물에 대하여 사용하고 있다(전 3:12; 계 16:3). 혼(ϕυχή)은 여호와에게도 돌려졌다(암 6:8; 사 42:1; 행 9:9; 힘 10:38). 몸과 분리되어 죽은 사람들을 혼들(ϕυχαί)이라고 부르기도 한 것을 볼 수 있다(계 6:9; 20:4). 종교의 최고의 위치와 수행이 혼(ϕυχή)에게 돌려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막 12:30; 눅 1:46; 히 6:18, 19; 약 1:21). 그러므로 혼(ϕυχή)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막 8:36, 37).

셋째로, 혼과 영은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경은 혼과 영을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실체의 두 방면의 이름일 뿐인데, 이것을 두 용어(혼과 영)가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아서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 혼이 떠난다고 하기도 하고(창 35:18; 왕상 17:21; 행 15:26), 영이 떠난다고 했다(시 31:3; 눅 23:46; 행 7:59). 죽은 사람의 비물질적인 요소를 “혼들”(ϕυχα)이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영들”(pneuvmasin)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벧전 3:19; 히 12:23; 계 6:9; 20:4). 그러므로 인간의 전체를 가리킬 때에, 어떤 때는 “몸”과 “혼”으로 표현하는가 하면(마 6:25; 10:28), 어떤 때에는 “몸”과 “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전 12:7; 고전 5:3, 5).

넷째로, 인간 자신의 자의식이 증명한다. 성경에 제시된 이분설은 인간의 자의식에 의해서 증명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는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자의식(self-consciousness)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속에 영과 혼의 두 존재가 있다는 의식을 가지는 사람은 없고, 다만 자기 안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삼분설에서는 인간의 고등한 영성(spirituality)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선악을 분별한다고 하고, 그 다음의 수준에 있는 혼이 식욕이나 성욕, 그리고 여러 가지 상상 즉 기억을 하는 자의식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의식은 두 부분이나 두 실체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요소의 두 방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작용들 중에 어떤 것을 혼에 속하고 어떤 것은 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 혹은 혼이라는 동일 실체의 여러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성막의 유추로, “뜰”은 몸에, “성소”는 혼에 “지성소”는 영에 해당하는 것으로 삼분설을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잘 못된 유추이다. 실제로 이 성막은 그 성격상 성전과 성전 뜰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성소와 성소는 “하나의 성전”이다.(지성소에서 섬기는 대제사장이나 성소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은 똑같이 하나님의 성별하신 제사장들이며, 뜰에서 제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백성이다). 초대교회 시대에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그노시스(영지주의)의 인간관을 보면, 인간이란 영과 몸과 심령으로 된 소우주(microcosmos)이며, 신관에 있어서 하나님(Pleloma, proper Aeon)과 그리스도(Kenoma, higher Aeon)와 창조주(Demiurge, lower Aeon)로 구분하듯이 인간도 영(spirit)과 심령(혼, soul)과 물질(heule, ὕλή, material, materia)의 3원리로 생각하여 영적(영), 정신적(혼), 물질적(몸)등 3계급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구성 요소의 삼분설과 흡사하다.

다섯째로, 영혼을 혼과 영으로 분리시킬 수 없다. 성경은 “혼”과 “영”을 두 개의 다른 존재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과 “혼”은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 실체로서나 동작에서도 분리될 수 없다. “영혼”의 어떤 부분은 생각하고, 어떤 부분은 감상하며, 또 다른 부분은 의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 전체가 생각하고, 감상하고, 의욕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한다거나(thinking) 감정(feeling)을 갖는다는 것과 의지(will)를 가지는 것들은 마음(mind/heart)이나 영혼(soul)의 부분들이 아니라 영혼의 동작들의 분류를 의미한다. 사람의 인식(recognition)이나 마음(mind), 결의(determination), 의지(volution), 감정(feelings), 감상(sentiment), 그리고 양심(conscience)과 같은 도덕적 성질(moral temperament)들은 모두가 영혼의 다양한 동작들이다.

여섯째로, “영”과“혼”을 따로 언급한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히 4:12) “영”과 “혼”을 따로 언급한 것은 다음의 “관절”과 “골수”를 따로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온 몸” 즉 “전 인격”(영육)에 침투해 들어가는 정황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관절”과 “골수”가 같은 성질의 물질적 존재(material substance)라면, “영”과 “혼” 역시 같은 성질의 비물질적 존재(non-material being)로 대비해서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metaphorical equivalent for yuch'" kai; pneuvmatoς).

[결론]
결론적으로 요약하려고 한다. 이는 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 정립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구성요소는 삼분설이 아니라 이분설이 성경적이다. 이는 성경을 통하여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전제는 “기능적”이 아니라 반드시 “존재론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구성요소는 추상적이고, 임시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것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의미에서 “마음”(mind)나 "생각"(thinking)에 연관된 “혼”은 실체가 아니라 “영”과 “육”(신)이 결합할 때에 나타나는 현상에 따라 "영"에 연관될 때, “영혼” “육”에 연관될 경우에는 중국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말을 빌리면 “각혼”覺魂, ame des betes), 또는 “육혼”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신학의 입장이기에 정확한 성경적 견해는 아니지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는 뜻에서 조심스럽게 인용해본 것이다.

“영”과 “육”이 결합할 때에 “사람”인 것과 같이 “영혼”과 “육신”이 결합 될 때 역시 “사람”인 것이다. 사람에 연관된 "혼"은 사후에도 “영”과 함께 “영혼”으로 존재하지만(계 6:9), 짐승에 연관된 혼은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인 “영”이 없기 때문에 죽으면 그냥 사라지고 만다. 다시 말하자면, 짐승은 육에 결합된 혼에 의하여 보고, 느끼고, 감각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이 있는 사람과는 달리 도덕적, 윤리적 의식이 없기 때문에 살아서도 짐승들끼리, 심지어 어미와 새끼들 사이에도 도덕적 감정이나 도의적인 책임의식나 성적인 윤리의식도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죄의식”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의 감정으로 죄의식(guilt)을 가지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 존재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영혼”은 타락된 “육”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시 41:4; 겔 18:4). 여기서 범죄 하는 영혼은 영육이 분리된 상태의 영이 아니다. 육과 결합된 상태의 “영”을 의미한다. 즉 살아 있을 동안 육과 결합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말할 때에 영과 육이 분리된 상태에서 말하기 때문에 오해를 할 수가 있다. 죽은 후, 영육이 분리되어서 육에서 떠난 “영”은 더 이상 범죄의 가능성이 없이 완전 성화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사후의 영은 죄와 관계없다. “죄 성”을 가진 “육”과 결별했기 때문이다. 살아있을 동안 육과 결합되어 있는 때에 “사람”은 범죄 할 수 있다. 육과 결합상태에 있을 때에는 “영이 범죄 할 수 있다” 또는 “영이 범죄 할 수 없다”는 등의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결국 이에 대한 질문은 난센스이다. 천사는 육이 없는 영적 실존으로 범죄 할 수 있는 것은 사람과 달리 처음부터 창조될 때에 육이 없는 영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육이 없는 존재라면, 천사와 같이 영만의 존재로 범죄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육을 가진 사람이 육과의 분리된 상태에서 "죄를 범한다," "범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영이 범죄 할 수 있다," "영이 범죄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없고, "사람이 범죄 할 수 있다," "사람이 범죄할 수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영혼”이 범죄 할 수 있는 경우(시 41:4; 겔 18:4; 20)와 범죄 할 수 없는 경우(요일 3:9; 5:18)가 있다. 특히 중생한 성도가 범죄 할 수 있는 경우는 “자범죄의 경우를 말한다. 이 자범죄는 원죄와 연결되어 있지 않는 이상 궁극적인 멸망과는 관계없고 다만 그 죄의 보응으로 징계를 받게 된다(히 12:5-12). 그러나 중생한 성도가 범죄 할 수 없는 경우는 ”원죄와 같은 죄“를 의미한다. 원죄를 해결하면 구원이 보장된다.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원죄와 같은 죄는 범할 수 없는 새사람 즉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같이 자범죄를 인하여 보응으로 고통은 당하지만 결국에는 회개하고 회복된 것이다. 중생한 자가 범죄치 못하는 것은 (1)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씨가 그 속에 있고(요일 3:9), (2) 하나님께서 저를 지키시기 때문이다(요일 5:18). 이제 마지막으로 삼분설이 아니라 이분설이 성경적이라는 이유를 성경적인 원리로 설명하려 한다.

첫째로, 창조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상대성 원리로 창조하셨다. 즉 사람을 흙으로 빚고 그 코에 생기(영, 󰖏וּר)를 불어넣었다(창 2:7).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영혼)과 육(육신)으로 지으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분설이 맞다.

둘째로, 인간의 죽음과 사후 존재론적으로 볼 때에 인간의 죽음이란 바로 영육분리를 의미함으로 사후에는 영은 하늘로 올려, 신자는 낙원(천국)으로 불신자는 음부(지옥)으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게 되고, 육은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만약에 삼분설이라면, 영과 육은 가는 곳이 분명한데, 혼의 존재는 어디에 있게 되는가가 문제이다. 이를 억지로 변명하려고 삼분설을 주장하는 어떤 학자는 자신의 삼분설을 고집하기 위해 사람이 죽는 순간 영은 하늘로, 육은 땅으로 돌아가되, 혼은 일시 "존재하기를 중지한다"고 억지를 부린다.

셋째로, 사람이 부활할 때에도 역시 영과 육이 부활하게 되나 혼이 부활한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어디에도 없다. 성경은 한 결 같이 영육부활을 언급하고 있다(눅 24:39).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는 영(혼)과 육(신)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제는 사람의 구성요소를 사역이나 기능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성경에서 존재론적으로 언급할 때에는 “영” 혹은 “영혼”과 “몸” 혹은 “육신”으로 언급한다. 반면에 사람의 상태에 관하여 죽었을 때에 “영” 혹은 “혼”이 떠났다고 하거나 “영혼”이 떠났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기능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때에 따라 “영”과 “혼”이라는 용어를 교호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사람은 창조할 때에도 "영"과 "육"의 두 부분으로 창조되었고, 죽을 때도 "영"과 "육"의 두 부분으로 분리되며, 부활할 때에도 "영"과 "육"의 두 부분이 결합하여 부활하기 때문에 사람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분설이 지극히 성경적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해석방법론은 기능적 용법(functional usage)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존재론적으로 말할 때, 인간의 구성요소가 영, 영혼, 마음, 정신, 몸, 육, 육신, 육체 등등 여러 가지 양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과 “육”, “혼”과 “육”, “영혼”과 “육신,” “영혼”과 “몸”, “영성”과 “육성” 등등으로 표현되는 것이지, 영(성), 육(성), 혼(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인간존재의 구성요소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성경적인 원리가 위에서 증명한 바와 같이, 인간의 창조원리나(the principle of creation), 사망 후 존재원리(the principle of existence), 그리고 부활원리(the principle of resurrection)를 보면 인간존재의 원리가 이분설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THE END

REV. PAUL B. JANG
e-mail: revpauljang@hotmail.com
website: www.mission4.org (한글)
website: www.usmission4.org (영문)
작성일:2018-05-12 10:41:19 107.184.1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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