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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제해설] 하와의 거짓말은 무엇이며, 하와가 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닉네임
PAUL
등록일
2018-08-04 15:09:41
조회수
1975
[질문]
하와의 거짓말은 무엇이지요?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3: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문제 : 하와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무엇이 다른가?

[난제 이유]
위의 본문들을 보면 피상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와의 말”에 차이가 없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에 난감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와의 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다면, “하와의 말”은 거짓말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와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인 뱀, 곧 사단(요 8:44)에 유혹되어 거짓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와는 처음에는 선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창 1:31). 결국 하와도 뱀의 유혹에 말려서 거짓말쟁이가 된 셈이지요. 그러나 본문들에서는 하와가 명시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직설적인 표현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과 거의 동일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난제입니다.

[해석 방법]
“하와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성경 본문말씀들(창2:9; 창2:16,17; 창3:2,3)의 외연적 의미 즉 문자적 명시적 의미(denotation)와 내연적 의미 즉 함축적 의미(connotation), 그리고 그 문맥(context)에 흐르고 있는 뉘앙스(nuance)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들을 보면 문법적인 차이와 내용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핵심은 명시적으로나 함축적으로, 그리고 뉘앙스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와의 말” 사이에 모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는 몇 가지 형식의 스토리들로 분류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명하신 말씀의 이야기(canonical stories), 둘째로, 개인의 경험 이야기(individual, experiential stories), 셋째로, 공동체의 이야기(community stories) 둥입니다. 이것에 기초해서 전개하는 신학을 이야기신학(narravtive theology)라고 합니다.

위의 본문들을 종합해보면 분명히 “하나님님의 말씀이야기”(canonical story), 하와의 “개인이야기”(individual story),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공동체 이야기”(community story)가 공존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살인자(murderer)요 거짓말쟁이(liar) 뱀이 끼어든 것입니다. 결국 하와의 거짓말의 근원은 뱀에게 있었고(요 8:44), 하와는 뱀의 유혹에 말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창 3:2-3) 가감하고 있고(cf. 계 22:18),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뒤틀어서(왜곡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창 3:4-5). 그러므로 하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하와의 말”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해석과 해설]
본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하와의 말” 사이의 차이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성경해석학적인 툴들(tools)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성경해석의 기본원리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the Bible must be explained by the Bible)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 언급된 본문들을 직접적으로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1. 본문의 외연적인 차이 (The Denotational Differences of the Texts)
이것은 본문들에 대한 사전적 의미(lexical meaning)를 말하는 것으로, 본문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여 그 차이점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경신학적인 접근(exegetical approach)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본문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문자적(literal), 문법적(grammatical)으로 비교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위의 말씀은 하나님의 에덴동산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account: narrative expression of the creation of Eden)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1) 창조하신 나무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았다.
(2) 그 나무들이 동산 한 가운데(중앙)에 있었다.
(3) 그 나무들은 생명나무(생명과)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선악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창세기 저자 모세의 기록입니다. 물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모세 오경을 JPED 문서비평(documentation criticism)에 의존하여 저자는 모세가 아니라 각각 다른 문서들의 조합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성서비평을 성서적으로 살펴보면 잘못된 주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설명의 문장을 기초로 해서 다음에 나오는 뱀과 하와와 아담의 말을 비교해보면 반드시 어딘가 뒤틀어지고 거짓말로 왜곡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외연으로도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무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았더라”고 해서 정상적인 눈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았는데, 이에 대하여 뱀에게 유혹된 하와의 탐심의 눈에는, 매혹적인 것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즉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창 3:6). 이 말을 보면 마음과 시각에서부터 하와의 판단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께서 만드신 나무들(생명과와 선악과)이 “한 가운데 있었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표현에 대하여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언급하면서 선악과로만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동산 중앙에는 생명과와 선악과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하와는 “동산의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3:2)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가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3:3)고 말하여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흐려놓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으로 하와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하와는 아담 안에 있었으며(창 2:22-23), 아담과 교통을 통하여 전달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와가 뱀의 유도질문에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했는데, 하와가 뱀에게 말한 것을 보면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먹지 말라”(2:17)는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만지지도 말라”(3:3)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덧 붙였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보듯이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고, 임의로 덧 붙여서 말했고,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정녕”을 빼버렸습니다. 이 부분에서 “죽으리라”(tamut))이라는 히브리어의 어근이 “정녕”(mut)과 같은 것으로, “죽다”(die)는 의미와 “정녕”(surely)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죽으리라”라는 말에 대한 강세 형으로 이중 강조법(double emphasis)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수사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정몽주의 시에서와 같이 “이 몸이 죽고 죽어”라는 강조법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정녕”이라는 말을 빼버린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외연적인 변질을 의미합니다. 어떻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계 22:18-19).

2. 본문의 내연적 뉘앙스의 차이 (The Connotational Differences of the Texts)
이것은 본문들의 함축적 의미의 차이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 함축적 의미를 우회적으로 표현할 때는 비유(parable/figure)와 은유(metaphor), 그리고 상징(symbol)과 표상(typology)과 같은 표현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본문들을 살펴보면, 상징과 표상의 방법으로 이 둘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교호적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물론 본문들의 내용들은 상징과 표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분명히 실제적 상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위의 본문에서 “그 땅”은 “에덴동산”을 의미하며, “에덴동산”은 “천국낙원”의 표상이며 “생명나무”는 “지혜”(잠 3:18), “예수 그리스도”(롬 8:1) 또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 또는 “복음”(막 1:15; 10:29; 롬 1:2)을 상징하기도 하고, “선악과”의 법은 “율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선악과”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같이 신령한 것으로(롬 7:12-14) “먹지 말라”는 법으로 지키지 않으면 그것이 죽음(사망)이 되는 것입니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위의 본문에서 “임의로 먹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와는 “”먹을 수 있으나“(3:2)라고 해서 뉘앙스의 차이가 있습니다. “임의로 먹되”는 “맘대로 먹으라”는 뜻이고, “먹을 수 있다”는 말은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선악의 분리로 인한 “죽음의 법”을 상징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이 법을 어기면 죽는다는 뜻입니다. “먹지 말라”는 법은 “금단의 법”을 의미하고,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은 “반드시 죽으리라”는 뜻인데, 하와는 “정녕”이라는 말씀을 빼버리므로 유혹의 여지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창 3: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위의 본문에서 하와가 뱀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라고 해서 “선악과”를 의미하고 있으나, 본래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도 “선악과나무와” 함께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와가 “생명과”보다는 “선악과”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하와의 눈에는 이미 “선악과”는 보기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기 때문입니다(3:6). 이 말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는 뱀의 유혹에 말려들었다는 뉘앙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와의 말씀에는 뉘앙스로 보아 완연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본문의 신학적 의미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the Texts)
이 에덴동산에 관한 말씀은 신학적으로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에덴동산의 사건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와 마귀(뱀)의 유혹과 시험, 인간의 타락과 심판, 그리고 인간과 만물의 구속을 위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창세기 3장 24절까지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좀 더 넓은 의미로는 창 1:1의 천지창조로부터 출발해야 하겠지만 오늘의 질문 내용이 창 2:9에서부터 시작됨으로 이 범위 안에서 신학적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하기 때문에 인간이 일시적으로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다시금 회복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컴퓨터를 제작할 때에 외부의 바이러스의 침입으로 컴퓨터가 일시 중지될 것을 예상하고 복구 프로그램(recovery program)을 만들어 컴퓨터 안에 함께 내장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creation project)도 외부의 바이러스 사단이 뱀의 형상으로 에덴동산에 침입하여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켜 에덴동산을 파괴할 것을 예상하고 하나님께서 복구를 위한 구속 프로그램(redemption program)을 창조프로그램에 함께 넣었는데 이것을 “메시아 프로그램”(Messiah program)이라고 합니다.

[창조]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고 윗물과 아랫물을 갈라 그 아랫물에서 땅이 드러나게 하시고 그 땅에 지상낙원인 에덴동산을 설치하시고 그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고, 거기에 아담과 하와가 거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사역으로 아직은 아담의 테스트 과정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입니다(창 1:1-2:9).

[타락]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그 실과를 통하여 아담과 하와를 시험(test)하셨는데 그 핵심 내용이 본문들에 들어 있습니다. 이때에 뱀으로 형상화된 사단이 에덴동산에 침입하여 먼저 남자 아담보다는 더 정서적인(?) 하와에게 접근해서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이는 하와를 유혹하기 위한 사단의 첫 마디 질문으로 여기서부터 하와에게 의아심을 갖도록 유혹하는 말을 합니다. “참으로...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그럴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와는 전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해서 대답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특히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죽을까 하노라”(창 3:3)라고 변질시켜 사단에게 한 발 양보하게 됩니다. 이 때다 하고 뱀(사단)은 두 가지 달콤한 말로 하와를 유혹합니다. (1)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라는 말과, (2)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은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라고 해서 하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습니다. 이것이 사단의 사기적인 거짓말의 유혹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하와의 마음은 탐욕에 사로잡혀서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인간의 완전 타락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의 원리입니다.

[구속] 이 이야기를 좀 더 확대하여 연장해보면 타락된 인간의 심판과 구속의 원리가 전개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해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고 뱀은 물론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땅까지 저주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창 3:14-24). 뱀에게는 기어 다니며 종신토록 흙을 먹고 살고(창 3:14-15), 여자의 후손과 원수 되게 하며 결국에는 머리가 밟혀 죽게 되리라고 했고(창 3:15),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창 3:18), 아담에게는 얼굴에 땀을 흘리며 종신토록 수고해야 먹고 살다가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하셨으며(창 3:17-19), 여자 하와에게는 해산의 수고를 더하셨습니다(창 3:16).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구원을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해서 구속을 위하여 메시아를 약속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소위 “원시복음”(proto-gospel)이며, “어머니 언약”(maternal promise)이라고도 합니다. 이 약속과 더불어 여호와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었습니다. 이것이 곧 구속을 위한 은혜의 옷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상으로 지어주신 “하나님의 의”(그리스도의 의)의 옷입니다(롬 3:21).

[결론]
결론적으로 하와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본래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말쟁이인 마귀가 형상화한 뱀(요 8:44)에게 유혹되어 같이 어울려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거짓말쟁이가 된 것입니다. 그 거짓말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지 않고 가감하여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며 뒤틀어진 마귀의 말장난에 휘말려 결국은 범죄를 하고 만 것입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거짓말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거짓말을 무력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전하지 않고 자기기만의 유혹에 말려 얄팍한 인간의 두뇌로 시대정신에 영합하여 거짓말로 말장난(pun play)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설교할 때에,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는 사역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V/Dr. PAUL B. JANG
작성일:2018-08-04 15:09:41 107.184.1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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