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택 목사, 중심부를 지향하지 않고 주변부 고통 받는 타자들을 향하여...
경기노회 두레교회(담임목사 오세택)가 설립 3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가졌다. 지난 24일과 25일 양일에 걸쳐 있었던 기념행사는 ‘30주년 기념 공연’과 ‘홈커밍행사’ 그리고 ‘기념식(비전선포식)’ 및 ‘기념세미나’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오세택 목사는 두레교회 30년을 회고하며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세 가지 기념비를 세우자고 했다. 첫째는, 성장이 아니라 성숙을 지향하는 두 번의 분립을 기억하는 기념비이고, 둘째는 높은 곳, 중심부를 지향하지 않고 주변부 고통 받는 타자들을 향하는 기념비이다. 고통받는 타자를 향한다는 것은 노숙자 쉼터, 부모의 돌봄이 부족한 아이들을 돌보는 민들레교실, 그리고 굶주린 이들에게 식사를 공급하는 오천 운동과 같은 구체적인 사역이라고 했다. 셋째 기념비는 삶의 가치로서의 기념비이다. 십자가의 가치를 붙들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님과 타자를 위해 살겠다는 삶의 가치를 세우는 일이다. 오 목사는 이러한 기념비들과 더불어 두레교회의 새로운 30년을 맞이하며 “좋은 제자, 좋은 이웃 되는 교회”라는 비전을 선포했다. 또한 세 번째 교회 분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25일 주일 오후에 “좋은 제자, 좋은 이웃 되는 교회”라는 주제로 30주년 기념 세미나가 열렸다. 발제자로 강영안 장로와 권연경 목사가 나서고 이성진 집사와 오희정 청년이 논찬을 맡았다. 두레교회는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를 추구하며, 자신이 아니고 타자를 지향하는 교회이다. 내가 중심이 되기를 원하며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는 세상 가운데, 참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려고 애쓰는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음은 주제 발제를 위해 교우들에게 배포되었던 “누가 이웃인가?”라는 주제의 강영안 장로의 글을 독자들을 위해 싣는다.
누가 이웃인가?
1. 이웃, 왜 문제가 되는가?
이웃은 어떤 존재이며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일상 경험을 통해서 이웃에 관해서 우리가 손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공간적 인접성과 관련됩니다. 이웃은 우리와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의 이웃은 내 옆집에 사는 사람입니다. 공간적으로 바로 나 곁에, 나와 가까운 곳, 곧 나와 이웃해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이웃입니다. 이웃이 누구냐 물으면 이웃은 옆집 사람이라고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에게는 옆집뿐만 아니라 아랫집 사람, 윗집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사전적인 정의를 따르면 모두 이웃입니다. 이웃은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타인입니다(물론 여기에는 공간적으로 가까이 살고 있는 나의 가족은 제외됩니다). 이웃 개념을 여기서 좀 더 확장하면 이웃 사람, 이웃 집 뿐만 아니라 이웃 지역, 이웃 나라, 이웃별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물의 존재 방식을 먼저 살펴봅시다. 우리 앞에 책상이 놓여 있다고 합시다. 책상은 하나만 있지 않고 여럿 있습니다. 이 책상 옆에는 저 책상이 있고 저 책상 옆에는 또 저 편의 책상이 가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앞에 사과가 있다고 합시다. 사과 옆에 사과가 있고 그 옆에 또 사과가 있습니다. 공간적으로 책상들과 사과들은 각각 이웃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상과 저 책상을, 이 사과와 저 사과를 공간적으로 인접해 있다고 해도 서로 이웃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이웃은 정감의 작용을 통해 상호 관계가 가능한 사람들에게만 붙일 수 있는 이름입니다. 사물의 존재방식은 ‘나란히 이어 있는 존재 방식’이고 따라서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존재 방식인 반면, 사람이 서로 이웃해 존재하는 방식은 ‘서로 나란히 함께 있는 존재’이고 따라서 감정이 개입되는 존재 방식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공간 안에서 서로 나란히, 곁에, 옆에 존재하는 방식은 사물의 존재방식과 달리 공간적으로 가까우면서도 언제나 감정이 개입되는 방식입니다. 집에 대해서, 마을에 대해서, 도시에 대해서 ‘이웃집’, ‘이웃마을’, ‘이웃도시’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 안에 거주하면서 고운 정, 미운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논의를 토대로 해서 보면 이웃은 “공간적으로 가까우면서 좋아하거나 미워하거나 가까이 느끼거나 멀리 느끼거나 서로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웃을 얘기하게 됩니까? 이웃이 이야기 대상으로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치 삼각형을 어떻게 정의(定義)할까 궁금한 사람이 “삼각형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는 상황이 다른 물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문제가 될 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이 왜 문제입니까?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누가 10:25-29). “선생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해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율법교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 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대답이 옳습니다.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살 것입니다." 이 때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다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율법교사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은 동기를 성경은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곧 예수께 질문을 던진 이유는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웃을 문제 삼고 이웃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까? 이웃이 누구인지, 이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까? 아마도 이웃이 누구인지, 이웃이 무엇인지 일상 속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에 관해서 말하게 되는 까닭은 이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웃이 어떤 방식으로 문제가 되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 답하기 전에, 아마 먼저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웃을 언제 의식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의 존재를 언제 의식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현재 삶의 상황을 생각해 보시지요. 이웃에 대해서 의식하는 경우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 윗집 사람이나 이웃집 사람들을 만날 때, 이웃집 문 앞에 우유가 놓여 있을 때, 윗집 아이가 쿵쿵 거리고 뛸 때, 아래 집 아이가 피아노를 치느라 소리를 낼 때, 이 때 우리는 이웃의 존재를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들리는 소음이나 방해에 대해 불평을 하고 경비실을 통해서 조용히 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직접 이웃과 대면하기를 피합니다. 이웃은 대부분의 시간에는 실제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지하철을 탈 때, 옆 사람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있음에도 그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척하지 않고 말 걸지 않는 것처럼 이웃집도 그 어느 때보다 공간적으로는 가까이 살면서도 아는 척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웃 가운데서도 낯익은 얼굴들을 만날 때는 가끔 목례 정도 나누는 것 외에는 이웃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는 것이 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과거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전통 가옥 구조 속에서 이웃은 눈을 뜨고 움직이는 동안에는 늘 의식해야 할 존재입니다. 이웃은 언제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는 존재이고 이런 의미에서 일종의 감시자요 관찰자이고, 필요할 때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조력자이기도 한 존재였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나 제사를 지낼 때나 무슨 일을 하든지 이웃과 협력하지 않고서는 살기가 힘든 상황에 사람들은 처했습니다. 그러나 도시 생활의 주거구조와 생활양식은 과거와는 다릅니다. 주거공간이 동시에 노동공간이고 제의공간이었던 곳에서는 이웃은 밀접하게 삶과 연관된 존재였지만 도시의 주택은 이웃집과 공간적으로는 연접해 있지만 거의 독립된 주거 공간이 되었기 때문에 이웃의 도움이나 개입을 요구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오늘의 삶의 조건은 공간적 인접성이 더 이상 이웃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공간적으로는 가까이 살고 아침저녁으로 윗집과 아랫집에서 내는 소리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질 경우가 있지만 이것이 더 이상 이웃을 이웃되게 하는 조건이 아닌 상황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신론자들이 볼 때 신은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통상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것처럼 이웃은 엄연히 존재하지만 ‘마치 이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익숙한 현대적 삶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이클 월저(Michael Walzer)의 용어로 표현해 보자면 과거의 이웃 개념은 매우 ‘두터운’(thick) 개념이었지만 오늘의 이웃 개념은 매우 ‘얇은’(thin) 개념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이웃을 보는 두 관점 그렇다면 문제는 이웃이 사라진 것, 이웃을 사람들이 ‘마치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모든 것이 순조롭다면 아마 이러한 삶의 방식이 문제가 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때는 각자 자기 집에서 성주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각자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삶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좀 더 삶의 테두리를 넓혀 ‘우리’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마을’, ‘우리나라’, 이런 방식으로 우리 안에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지역, 더 많은 문화를 포용하고 공유하는 삶의 방식을 채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삶은 순조롭지 않고, 사람들은 법과 정의를 준수하며 살지 않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생기고, 고통 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고, 낯 선 사람들은 배제되고 예외자가 생산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포섭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길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우리의 이웃에서 배제되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계속 해 가기 전에 잠시 하노버 근처에서 벌목 작업을 하던 레비나스의 체험을 소개하겠습니다. 프랑스 철학자요 유대인었던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ans)는 2차 대전 독일군의 포로로 잡혀서 하노버 근처에 설치된 유대인 병사 수용소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들의 삶은 고되고 지루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 기쁨을 주는 존재가 등장했습니다. 그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개였습니다. 이 개에게 유대인 포로들은 ‘보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보비는 유대인 포로들이 저녁 무렵 지친 몸으로 벌목 작업에서 돌아올 때 소리 내어 짖어 주었습니다. 이 개를 레비나스는 출애굽기 11장 7절 이집트의 장자들이 죽을 때 입을 열어 짖지 않은 개들과 22장 31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질지라”는 권고를 서로 연결시키면서 나찌 독일의 ‘마지막 칸트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수용소에서 일하던 독일 사람들이나 수용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할 때 ‘보비’라는 개만이 자신들을 단지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목적 자체’로, 고유한 인격의 소유자로 대했다는 뜻입니다. 독일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육이오 전쟁 때 좌우 양편에 선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을 서로 죽였던 것처럼 이웃은 동료가 될 수 있고 친구도 될 수 있지만 가해자가 될 수 있고 적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에 대해 실천 불가능성을 길게 논의한 프로이트의 경우에는 이웃이 적대자가 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웃 사랑에 관해서 『문명 속의 불만(Das Unbehagen in der Kultur)』(1930)라는 글에서 프로이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가? 그게 우리한테 무슨 이익이 되는가? ... 내 사랑은 나한테 너무나 소중해서 잘 생각해 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리면 안 된다. 사랑은 나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야 한다. (중략) 그러나 그 사람이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자신의 가치로 나를 매혹하지 못하거나 내 감정생활에 이미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지 못했다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니,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다. 내 가족은 모두 내 사랑을 내가 자기들을 좋아한다는 증거로 소중히 여기고 있는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내 가족과 동등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내 가족에게 부당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도 역시 벌레나 지렁이나 풀 속에 사는 뱀처럼 이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 사람을 (보편적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면 내 사랑 가운데 그의 몫으로 돌아가는 양은 아주 조금밖에 안 될 것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도저히 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 도저히 이성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명령을 그토록 엄숙하게 선언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중략) 인간은 사랑받기를 원하고 공격을 받아도 기껏해야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을 뿐 상대를 반격하지도 못하는 유순한 동물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은 강력한 공격 본능을 타고난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이다. 따라서 이웃은 그들에게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자신의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고 아무 보상도 주지 않은 채 이웃을 성적으로 이용하고,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 인생 경험과 역사에 대한 지식 앞에서 누가 감히 이 주장을 반박할 수 있겠는가?” 레비나스가 본 인간, 곧 개보다 못한 인간이나 프로이트가 본 인간, 곧 공격본능을 타고난 존재가 만일 인간의 실상이라면 좋은 이웃, 선한 이웃에 대한 우리의 꿈은 환상에 불과한가? 하는 물음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물음에 직면할 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사고의 태도는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예컨대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가 취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방금 얘기한 레비나스가 취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이 두 철학자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에서 다릅니다. 로티는 무엇보다 나와 타인 사이의 연대(solidarity)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타인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내가 가지게 되는 배려와 관심은 나의 나됨, 곧 내 자신의 창조(self-creation)과 무관하다고 로티는 보고 있습니다. 나의 삶에 대한 관심과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은 별개라는 것입니다. 전혀 별개라고 해서 무관심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타인의 삶에 대해서 나는 무관심할 수 없을 뿐더러 타인의 고통과 고통을 야기하는 잔인성에 대해서 나는 방관할 수 없다고 로티는 보고 있습니다. 타인에 대해 잔인하지 않도록, 타인에게 잔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나에게 있다고 로티는 주장합니다. 다만 이 둘 사이, 곧 ‘자기 창조’와 ‘연대’ 사이를 연결하거나 통합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고 로티는 생각합니다. 로티가 생각한 연대는 반성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의 고통 받는 타인들로 볼 수 있는 상상력에 기초해 있고 낯선 타인들의 고통과 굴욕의 특정한 세부 내용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증대시킴으로써 창조된 것입니다. 자연법 전통에서 볼 수 있는 ‘공통의 본성’이나 칸트 윤리학에서 볼 수 있는 ‘이성의 명령’이나 ‘정언명법’은 여기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타인에 대한 배려, 곧 이웃과의 연대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요? 로티는 ‘공통의 본성’이나 ‘이성의 명령’, ‘정언 명법’ 등은 신학적 형이상학적 어휘들이므로 이러한 어휘 사용을 거부하고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볼 것을 제안합니다. 이 때 로티가 말하는 자유주의자는 주디스 슈클라(Judith Shklar)가 정의한대로 ‘잔인성이야말로 우리가 행하는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두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의 자유주의자는 로티에 따르면 고통은 장차 감소될 수 있으며 타인에 의해 인간이 굴욕당하는 일은 멈추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지만 어떤 최종 어휘에 기대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인정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사회적 연관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태도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반형이상학적이고 역사주의적인 방식으로 사고해야 합니다. 레비나스의 대안은 로티와 구별됩니다. 레비나스도 전통 형이상학과 본질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나와 타인의 관계를 우연적인 것으로, 단지 우연한 상황에서 연관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신체성을 통해 타인과 구별됩니다. 예컨대 내가 목마를 때, 내가 배가 고플 때, 내가 잠이 올 때, 누구도 대신해서 마셔줄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해서 음식을 먹거나 잠을 대신 자 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목이 마르면 내가 마셔야 하고 내가 배가 고프면 내가 먹어야 하고 내가 잠이 오면 내가 잠을 자야 합니다. 마시고, 먹고, 잠을 자는 매우 동물적인 행위처럼 보이는 행위를 통해 나는 나의 자신임(ipseity)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레비나스에 따르면 내가 세계를 향유하는 가운데 느닷없이 불청객처럼 끼어드는 존재가 있습니다. 볕을 즐기며 나에게 주어진 공간을 즐기는 순간 나의 자유를 제약하고 나에게 ‘죽이지 말라’고 호소하며 나의 삶의 영역으로 침투해 오는 타자 존재의 출현을 레비나스는 ‘얼굴의 현현’이라 표현합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의 현현은 레비나스의 난해한 텍스트를 통해 그 의미를 보여주는 것보다 오히려 신약성경 누가복음서 10장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를 통해서 훨씬 더 저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앞에서 잠시 이 비유를 예수께서 이야기하기 전의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을 포함해서 누가복음 10장의 한 부분을 새번역 성경의 표현을 약간 고쳐 인용해 보겠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습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당신 대답이 옳습니다.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습니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습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당신도 이와 같이 하십시오." 율법교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마 예수가 소크라테스였다면 “당신은 어떻게 이웃을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묻지 않고 비유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곁을 지나갔으나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지나간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그를 치료하고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이미 통상적인 이웃 개념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이웃은 가까이 있는 사람, 나와 같은 민족, 나와 동등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통념을 깨고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이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나의 이웃임을 보여줍니다. 공간적 인접성이 아니라 나와는 달리 고통에 처해 있는 그의 상황이 그가 나에게 이웃인지 아닌지를 규정하는 요소임을 보여줍니다. 나와 다른이, 나에게 타자가, 그것도 나의 행동, 나의 반응을 요구하는 이가 나에게 이웃임을 이 비유는 보여줍니다. 그런데 비유의 끝을 보십시오. 율법교사는 예수께 “그러면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질문은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이 셋 중에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율법교사의 질문은 나를 중심으로 나에게 이웃인 사람과 이웃이 아닌 사람이 누구인지를 구별하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질문은 나 중심이 아니라 타자 중심에서 비롯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자리에서 볼 때 그의 곁을 지나간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물음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강도만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 정확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웃은 내가 다가가야 할 존재이면서 동시에 내가 되어야 할 존재입니다. 율법교사는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율법교사는 “가서 당신도 그렇게 하십시오”라는 권고를 듣게 됩니다. 바른 답 못지않게, 바른 실천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비유중의 사마리아인이 왜 강도만난 사람을 건져주었는지 우리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의 성품이 그런 방식으로 형성되었을 수가 있습니다. 곤궁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이웃 사랑이기 때문에, 이웃 사랑의 명령을 실천하느라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양심을 잠재우고 스스로 행복을 찾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로티처럼 자신이 그런 잔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레비나스처럼 강도만난 사람의 얼굴의 현현에 사마리아인이 반응을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사마리아인은 곤궁에 처한 이웃을 그냥 두지 않고 그의 위급한 상황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개입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프로이트가 기대할 수 있는 행동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사마리아인은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며 그 상황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사마리아인은 행했습니다. 4. 동일자의 공간과 타자의 환대 이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왜 이웃을 말하는가? 이제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지요. 이웃은 있으나 이웃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웃을 찾아보고 이름을 알아보고 이웃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는 운동을 벌여야 할까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끼리라도 같은 층, 같은 동 사람이라도 먼저 알아가는 운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공동의 삶, 그것도 공동의 선한 삶을 위해서 우리가 다니는 길, 우리에게 익숙한 얼굴들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갈 필요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로티를 따르든 레비나스를 따르든, 아니면 이들과 무관하게든, 이웃과의 연대는 우리 자신들이 덜 고통을 당하고 살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논의 가운데서 공간적 인접성이 이웃을 반드시 이웃으로 규정하는 요소가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이웃을 반드시 옆집, 앞집, 윗집이나 아랫집으로만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을 받고 억울함을 겪는 사람이면 그가 어디 있든지 우리의 이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이웃집보다 저 먼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우리가 다가가야 할 이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바로 옆집의 이웃이 아니라 저 먼 곳의 이웃의 필요를 헤아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이 우리가 다가가야 할 사람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웃이 되어주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에게 있는 두 가지 성향, 곧 이웃을 외면하고자 하는 성향과 이웃의 곤궁, 이웃의 고통을 확인하고 개입하는 성향을 함께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동일자의 공간, 곧 같음과 비슷함에서 오는 우애와 사랑, 정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먹어야 하고, 잠자야 하고, 따스함을 누려야 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가족, 친구, 같은 교회나 성당의 교우, 동창회, 향우회 등은 우리에게 동일자의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안온함과 소속감과 안정감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늘 동일자의 공간 속에서만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 우리의 삶에 개입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호소하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우리가 행동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공간적 인접성이 이웃을 만들어 내기보다 관심과 사랑이 오히려 이웃을 만들어 낸다고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 이웃과의 나눔, 거저 주는 삶은 단순한 동물적 삶을 초월하여 인간다운 삶을 빚어냅니다. 다름에 기초해서 타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때 동일자의 폐쇄성은 깨어지고 우리는 타자에게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됩니다. 그럼에도 완전한 다름에 바탕을 둔 삶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같음만의 테두리에 우리 삶이 갇힐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름으로 인한 사랑이 마침내 같음의 공간을 풍요롭게 하고 같음으로 인한 사랑이 다름으로 향하여 자신을 포기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확장할 때, 다시 말해, 같음과 다름, 가까움과 멂, 한편으로는 아가페의 사랑과 다른 한편으로는 필리아의 사랑이 함께 어울려 놀 수 있을 때, 우리 자신과 이웃의 삶은 훨씬 풍요롭고 훨씬 크게 창조주께서 원하는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