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결혼

▲ 최한주 목사 /푸른숲교회

루터는 1525613일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였다. 루터보다 16살이나 어린 신부였다. 카타리나는 비텐베르그 근처 님브센 수녀원에서 탈출한 전직 수녀였다. 당시 수녀원은 창살에 갇혀 외부 접촉이 금지되고 복종과 규율만 강조했었다. 카타리나는 루터의 글을 읽고 수녀원 생활에 회의를 느꼈다. 그래서 동료수녀들과 탈출을 결심하고 종교개혁 운동을 하고 있었던 루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루터는 님브센 수녀원에 청어를 정기적으로 헌납하던 상인 코프와 마차를 보냈다. 1523년 부활절에 코프는 카타리나를 포함한 다른 수녀들을 마차에 실은 청어통 뒤에 숨겨 탈출시켰다. 수녀원에서 탈출하거나 탈출을 도와주면 사형을 당하기도 했기에 탈출극은 매우 드라마틱했다. 후에 루터는 수녀원 탈출을 출애굽에 비유하였다. 탈출한 수녀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서 루터는 정직하고 책임감 있는 신랑감을 찾아 짝을 맺어주었다. 

그러나 카타리나만은 쉽지 않았다. 카타리나와 결혼하려 했던 청년이 집안의 격렬한 반대로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루터가 다른 사람을 소개했지만 이젠 카타리나가 반대했다. 카타리나는 루터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노총각 루터는 카타리나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전직 수도사와 수녀의 결혼은 쉽지 않았다. 주변의 반대와 뒷말이 무성했다, 그의 측근이었던 멜랑톤도 반대할 정도였다. 그러나 루터는 신의 명령으로 알고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역사에 알려진 아름다운 부부가 되었다. 

루터는 결혼을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을 통해 종교적 진리를 몸소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결혼은 하나님이 창조한 질서를 지키는 길이고 신의 명령으로 생각했다. 그는 식탁회담에서 만일 결혼이라는 것이 없다면 세상은 황폐해지고, 모든 피조물이 무로 돌아가며 하나님의 종조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루터와 결혼한 카타리나는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6명의 자녀를 낳았고, 살림을 도맡았다. 루터하우스는 기숙대학이자 종교개혁의 본거지였기에 루터 추종자와 학생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기거했다. 카타리나는 집을 개조해 하숙을 쳤다. 그것도 모자라 맥주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녀가 만든 맥주는 선제후의 궁정에 납품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불같은 다혈질의 루터도 카타리나 앞에서는 조용히 인내만을 외쳤다고 한다. 카타리나의 이런 헌신적인 삶으로 루터하우스에 카타리나 동상이 서있다. 카타리나와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도운 사람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루터의 결혼은 둘이 하나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로마 교회 사제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을 경건한 삶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는 결혼이 성경적인 삶을 사는 종교개혁과 밀접하고 성직자의 독신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교화의 법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루터는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낳았고 가정에서 찬송을 부르며 기도했다., 이것이 가정예배의 형태로 이어져 왔다. 루터의 영향으로 결혼생활은 고귀하며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삶이 복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루터와 바르트부르크 성 

독일 중부에 있는 바르트부르크 성은 독일에서 하이델베르그 다음으로 큰 성이다. 루터의 일생을 설명하는 데, 이 성을 빼고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루터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는 바르트부르크 성은 깊은 숲 속 정상에 우뚝 솟아 있다. 마르틴 루터가 10개월 동안 피신했던 현장이다. 

1521416일 보름스 제국회의에 참석하고 루터가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던 중 54일 바드 리벤슈타인의 알텐슈타인 성 근처에서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이 비밀리에 보낸 군인들이 루터를 납치해 바르트부르크 성에 구금했다. 살해의 위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루터는 15215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농노로 변장, 가명을 사용하고 거기 머물렀다. 

보름스 칙령152158일로 표기되고 526일 황제 칼 5세에 의해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공포됐다. 주요 내용은 루터를 옹호하지 말 것,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지 말 것, 그의 글을 읽거나 인쇄하지 말 것, 그를 체포할 것, 황제에게 넘겨줄 것 등이었다. 루터의 목숨은 언제든 그 누구에 의해서든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성 위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전망이 좋다. 여행자들이 성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은 루터가 성경을 번역했다는 골방이다. 하지만 안내자 없이 그가 은신했던 방을 찾기란 쉽지 않다. 금방 끝날 것 같은 미로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바르트부르크 성은 입구부터 삼중 문으로 돼 있다. 삼중 문 중 하나는 다리로 연결이 돼 있는데, 육중한 문을 올리면 바로 낭떠러지다. 그 낭떠러지를 통과해도 문은 쉽게 열릴 수 없었다. 철통같이 방어한다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요새 중 요새였다. 성에 들어와도 루터의 방을 찾는다는 것 역시 수수께끼였다. 

루터는 바로 이곳에서 고독과 싸우며 진리를 위한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루터가 작곡해 불렀다는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현장이기도 하다. 찬송가 585장은 루터의 작곡과 작사로 명기돼 있다. 이런 바르트부르크 성에 서면 개혁의 정신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든 가슴이 뭉클해질 것이다. 이 성에 30대에 불과한 종교개혁자 루터의 고독과 한(), 환호와 열정, 기도와 찬송이 묻어 있다. 루터의 고독은 죽음의 위기 가운데 가족을 떠나 홀로 이 성의 작은 방에 숨어 살아야만 했던 것을 뜻한다. 

고난의 풀무불이 보화와 같은 믿음의 결실들을 얻게 하였다. 최고의 업적인 성경번역과 지은 찬양들이다. 종교개혁이 선포되었어도 전국적으로 번지지 못했고 성도들 개개인에게 스며들지 못했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직자들만의 것이었고 개인이 성경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바르트부르크 서에서 고독과 싸우며 서경을 번역하였다. 마침 마인츠에서 구텐베르그가 인쇄술을 발명하여 성경이 인쇄되어 이로 말미암아 개혁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지게 되었다.

 

루터와 성경번역 

루터가 작센주() 선제후 프레드리히 현공에 의해 바르트부르그 성에 농부로 가장하여 숨이 있을 때,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위기의 시간이었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은둔의 시기가 종교개혁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업적을 남기게 된 시간이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번역하여 성도들이 자유롭게 성경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당시 성경은 성직자들만이 가질 수 있었다. 또 글자도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평민들은 쉽게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므로 누구나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불길이 성도들 속으로 번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동료 멜란히톤의 권고에 의해 시작됐다. 1521년 가을부터 152231일까지 11주 동안 루터는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그때 루터가 독일어 번역에 사용한 성경 텍스트는 에라스무스의 헬라어성경과 몇몇 라틴어 성경, 중세 표준 성경인 불가타 성경이었다. 15229월 처음으로 독일어 ‘9월 성경이 출간됐으며, 1523년 구약 일부가 세상에 나왔다. 1525년까지 구약과 신약이 함께 나온 판이 22개였고, 이를 다시 찍어낸 횟수는 100회였다.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 독일어 성경 번역의 표준 되었다. 

1534년에 이르러서야 여러 종교개혁자들과 동료 교수들의 힘을 합쳐 완역한 독일어 신구약전서 루터 성경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이 성경은 평민들도 읽을 수 있는 쉬운 독일어로 번역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루터 성경은 헬라어 구약 성경 칠십인역을 번역해 낸 불가타와는 달리, 히브리어 구약 텍스트와 헬라어 신약 원문으로부터 가능한 한 독일어로 직역한 것이었다. 루터는 문자적 직역을 시도했다. 힘 있고 그림이 충분히 그려지며, 더 서민적이고 쉽게 이해 가능한 표현들을 사용했다. 독일어 번역에는 남북의 방언이 함께 섞인 중동부의 독일어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루터 성경이야말로 오랫동안 독일어 성경번역의 표준이 되었다. 

한글번역 성경이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을 백성들 속으로 퍼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듯이, 루터의 독일어 번역 성경이 표준 독일어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루터의 수많은 독일어 창조는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루터 성경의 개정판은 1984년 발간됐으며, 많은 작곡자들이 이 성경으로부터 교회 합창과 칸타타 등의 가사를 차용했다. 루터는 이 성경을 모든 크리스천들의 손에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읽고 은혜를 받아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책무를 다할 것을 선언했다. 

성경번역이 완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구텐베르그(1396~1468)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이다. 아무리 번역을 잘 했다 하더라도 인쇄술이 따르지 못했더라면 대중 속으로 퍼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인쇄술로 인쇄한 첫 성경은 독일의 국보이자 유테스코 세계기록유산물이기도 하다. 구텐베르그의 인쇄술 발명은 종교개혁의 불길에 기름을 붙는 놀라운 역할을 하였다.

 

루터와 아이스레벤

마르틴 루터는 독일 동부 아이스레벤에서 14831110일 태어나 여행 중이던 1546218일 그곳에서 별세했다. 출발지에 다시 돌아와 끝을 맺은 것이다. 아이스레벤은 독일어 '아이스(Eis)''레벤(Leben)'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얼음 일생'이다. 루터가 중세교회에 맞서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얼음장 같이 차갑고 힘든 일생을 보낸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아이스레벤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인구 25000명의 소도시다. 비텐베르크와 함께 1996년부터 '루터의 도시'로 불리게 됐으며 역시 비텐베르크와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만큼 아이스레벤에는 많은 유적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곧 루터가 남긴 역사적 사료들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이스레벤에는 루터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은 데, 그가 태어난 집과 마지막 숨을 거둔 집, 그리고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은 성베드로 바울 교회가 있다. 태어난 후 처음 교회 나오는 날 유아세례를 베푸는 당시의 관례였다. 이에 따라 갓난아기 루터는 출생 이튿날인 14831111일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교회 내부에는 물이 동()하는 매우 특이한 예쁜 우물이 있었다. 예배당 강대상 바로 아래를 파서 지름 2m 크기의 대리석 둘레에 못을 만들어 그곳에서 세례를 베푼다. 물론 이는 루터의 세례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 고안한 세례 우물이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의미 있는 상징인 세례를 보여주는 예배당이기도 하다. 

아이스레벤은 통일되기 전에는 구 동독에 속해 있었다. 루터가 태어난 집은 이미 530여년이 흘러 전형적 독일식 가옥으로 다듬어져 있다. 한쪽은 현대식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그곳은 루터의 역사적 가계를 보여주면서 중세의 경건과 영성을, 그리고 루터의 세례를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했다. 루터는 생애동안 여러 차례 아이스레벤을 찾았으며, 그의 마지막 여행지도 바로 이곳이었다. 

루터가 별세하였을 때 선제후(選帝侯) 요한 프리드리히 공은 루터의 시신을 비텐베르크로 옮겨오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가 숨을 거둔 이틀 후인 1546220일 아이스레벤을 출발해 평소 루터가 활동한 할레, 비터펠트, 켐베르크를 거쳐 222일 비텐베르크에 도착했다. 

루터가 남긴 위대한 개혁의 물결과 말과 글들은 우리 곁에서 머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움직인다. ‘종교개혁과 그림은 크라나흐 같은 위대한 화가를 통해 근대로 나아가는 길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언어세계와 그림 언어를 형성했다. 그리고 종교개혁과 성경500년 전부터 미디어혁명을 가져온 측면을 조명했다. 루터성경의 보급을 통해 서적의 출판은 새로운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종교개혁과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숙고를 통해 종교개혁은 하나님 앞에 선 자유자인 인간의 존엄에 관심을 쏟게 됐다. ‘종교개혁과 정치는 종교개혁이 기독교적 자유의 개념을 형성했고, 국가 정치에 참여하되 순종과 저항 사이를 두고 고민하게 만들면서 민주주의 사회와 참여 시민사회로 가는 시금석이 됐다. 

그는 죽었으나,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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