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는 성화를 통해 온전한 칭의의 증거를 드러내야 한다

▲ 박광서 목사(큰사랑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

최근 SNS에 뜬 Albert Mohler의 문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Theological corruption is always prior to and explains moral corruption.” 간단히 말해 신학적 부패는 언제나 도덕적 부패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한국교회의 끝없는 추락의 원인을 적절하게 설명해주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런 차원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미래교회포럼과 코람데오닷컴이 진단하고 있는 칭의에 대한 점검은 큰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논의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파열음은 필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도대체 무엇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은혜 vs. 인간의 책임

역사적으로 와 관련하여 두 개의 흐름이 시계추처럼 반복되어 왔다. 그것은 무게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의를 강조하느냐, 아니면 인간에게 두고 인간의 의를 더 강조하느냐의 흐름이다. , 하나님의 은혜냐 아니면 인간의 책임이냐의 문제다.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개신교 내에는 인간의 의를 강조함으로 인해 벌어진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 예를 들면 17세기 청교도들의 도덕법 논쟁’, 18세기 토마스 보스톤의 매로우 논쟁’, 20세기의 페더럴 비전과 최근의 새관점등이 그것들이다.

인간의 의를 높이고 싶은 유혹은 떨쳐 버리기 힘든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 왜 그토록 인간의 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 영광을 온전히 돌리지 못하는 인간의 죄된 본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오늘의 한국 교인들처럼 구원받은 신자가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함에서 오는 현상적인 원인도 한 요인일 것이다. 그로 인해 인간의 책임에 대한 강조가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를 넘어선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그 인간의 의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과 신학을 강조한 사람이 바로 고전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이다. 번연이 멀어진 부자지간의 관계를 화해시켜주려고 애쓰다가 폭우에 폐렴이 걸려 주님 곁으로 간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천성적으로 온유한 성품의 복음전도자다. 논쟁은 되도록 피했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훼손된다고 느껴질 때는 언제든지 논쟁에 뛰어들어 진리를 파수했다. 이에 필자는 번연이 치열하게 참여했던 논쟁 중 인간적 요소와 율법주의적 경향을 보인 사람들과 벌인 칭의 논쟁을 간단히 소개하며 칭의의 참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겼으면 한다.

 

율법주의자들과의 논쟁: 인간의 요소가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번연은 칭의와 관련하여 두 사람과 격한 지상논쟁을 벌였다. 한 사람은 퀘이커교도인 에드워드 버러우(Edward Burrough, 1634-1663)이고, 또 한 사람은 장로교에서 국교도로 개종한 에드워드 파울러(Edward Fowler, 1632-1714). 버러우와의 논쟁은 수감되기 전인 28-29세 때 있었고, 파울러와의 논쟁은 12년의 수감생활을 마칠 즈음인 43-44세 때에 벌어졌다. 저들의 어떤 점이 번연을 화나게 만들었을까? 내용이나 강조점의 차이가 있지만 번연이 보기에는 두 사람 모두 인간적 요소를 칭의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같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을 칭의의 근거로 믿는 번연의 입장에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먼저 에드워드 버러우와의 논쟁을 살펴보자. 번연이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밝히듯이, 그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칭의를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 영적 진통을 겪었다. 번연이 루터를 좋아한 이유도 루터가 자신과 동일한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번연은 죄인의 칭의는 인간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만 가능하다고 철저히 믿었다. 그런데 퀘이커 교도인 버러우가 칭의의 근거는 역사적 예수가 아닌 신비적인 인간의 내적 빛에 의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번연은 즉각 반격했다. 번연이 볼 때 퀘이커교도들이 의지하는 양심이나 내적인 빛역시 또 하나의 인간의 요소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의 근거는 불완전한 인간의 양심이 아닌,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구세주가 되시며, 신이자 인간이신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사실 구원이 그리스도에 의해 획득된다는 점에서는 번연과 퀘이커 모두 같았지만, 그 구원이 인간 속에 있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느냐 아니면 인간 밖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의한 것이냐는 점에서 확연히 달랐다. 번연은 구원은 내적인 빛과 같은 인간적 요소가 아닌 우리 밖의 역사적 예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입장이었다.

인간의 의를 강조한 또 한 사람은 당시 펠라기우스주의자로 의심받고 있었던 에드워드 파울러다. 번연이 출소를 앞두고 파울러의 글을 읽으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파울러도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인간의 의에 의한 칭의를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구주가 아닌 단순한 교사정도로 여겼다. 파울러는 기독교를 도덕종교로 격하시키고,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훈련을 통해 거룩함을 증진시키는 것이 교회의 유일한 계획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파울러는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것과 신의 은혜로부터 벗어나 인간이 자기 의를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번연은 파울러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무지한 자며,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지도 않았고, 기적이 아니면 그 의에 순복할 수도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번연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의한 칭의를 붙잡았다면, 파울러는 인간 행위에 의한 칭의를 붙잡았던 것이다. 번연의 입장에서 파울러는 전가에 의한 칭의를 허무는 사악한 자였다.

신율법주의자로 여겨진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도 번연과 견해차가 있다. 서로 직접적 논쟁은 없었지만 백스터의 입장에서 은혜를 강조하는 번연은 반율법주의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백스터도 전가에 의한 칭의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칭의를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백스터가 반율법주의를 비난한 것은 자칫 은혜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성화에까지 미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로 인해 그 역시 도덕법에 관한 반대편 극단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그래서 백스터는 신자의 궁극적 칭의에 있어서 신자 자신의 선행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결합함에 의해 성취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의와 더불어 믿음, 회개, 순종, 사랑이 최종적 칭의와 영광이라고 했다.

백스터의 이와 같은 주장이 최근 논란이 되는 주장과 비슷하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유보적 칭의, 최종 칭의, 어떻게 불리던 간에 새관점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주장이 백스터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백스터는 인간의 칭의를 위해 세 가지가 함께 간다고 믿었다. 하나님 입장에서의 자비와 은혜, 그리스도의 입장에서의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 그리고 인간의 입장에서의 행위가 그것이다. 이런 점이 백스터가 신율법주의자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다. 이에 반해 번연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진 은혜언약 안에서 모든 조건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믿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지금까지 존 번연이 치열하게 논쟁했던 에드워드 버러우와 에드워드 파울러와의 논쟁, 그리고 리처드 백스터와의 차이에 대해 살폈다. 번연에게 칭의의 근거는 인간 편에 있지 않다. 철저하게 인간 밖에 있는 한 의, 하늘에서 임한 하나님의 의, 즉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의만이 죄인의 칭의를 위한 유일한 근거가 된다. 그런 점에서 버러우의 양심이나 내적인 빛, 파울러의 도덕적 훈련에 대한 강조, 그리고 백스터의 그리스도의 의와 결합한 인간 편에서의 행위들은 인간적인 요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주장들은 그리스도의 의로만 의롭다 인정받는 믿음을 가진 번연이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번연이 인간의 선행이나 행위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의 저서 2/3가 성화와 관련된 저서들이며, 그의 대표작인 천로역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인간의 행위는 구원받은 자의 증거요 열매다. 죄인의 칭의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만 말미암는다는 것이 번연의 칭의관이다. 칭의가 성화를 무시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신자는 성화를 통해 온전한 칭의의 증거를 드러내야 한다. 성화는 칭의의 증거요 열매지 수단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의 칭의 논쟁이 불편함을 주는 것 같다. 인간이 그토록 높이고 싶어 하는 행위도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그것이 번연이 강조하려는 복음이다. 구원의 은혜는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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