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대안교육 칼럼 5>

이제 우리의 교육열을 점검해야할 때입니다.



   ‘저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자식에 관한한 목숨걸고 살아가는 ‘아줌마’들 중 한 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분명히 우리나라의 ‘아줌마’들은 엄청난 동력입니다. 자원하나 제대로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아줌마’들의 교육열은 이 땅을 생존하게 하고 번영하게 하는 동력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동력의 뿌리입니다. 이제는 이 뿌리를 진지하게 돌아보아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동력을 결코 꺼지지 않는 지속적인 에너지로 정착시켜야할 필요가 있기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땅의 강력한 교육열이 학벌이나 학력을 통한 입신양명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가난하게 살아왔던 이 땅의 백성들은 공부를 통한 신분상승을 꿈꾸어 왔습니다. 이것 자체로는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만 자신의 재능이나 비전과 상관없이 무조건 대학에 들어가고 보자는 식으로 교육열이 뻗쳐가고 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일을 통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보다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사회를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사회가 발전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가 될 뿐 아니라 이래가지고는 교육열이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부모와 자녀로 이어지며 뜨거운 교육열이 계승되고 발전되려면 교육의 혜택을 받은 자녀에게 누구도 뺏아가지못할 체험적 기쁨이 있어야합니다.

   교육은 성취감이라는 발판을 딛고 비전의 산을 올라갈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소위 자녀교육이라는 것이 이기심의 발판을 딛고 욕심의 언덕을 올라가는 것이 되어 버리면 민족을 흥왕케하는 교육이 아니라 민족을 멸망케하는 교육이 되고 말 것입니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이웃을 위해 살고 국가를 위해 살고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부모가 자녀를 교육하는 진정한 보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의 ‘아줌마’들은 자기만 알고 자기의 배만 부르게 하는 자녀들을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이미 문화가 되어버린, 힘없고 연약한 친구를 왕따 시키고 공부잘하고 똑똑한 아이를 멸시하는 못된 버릇은 왜곡된 교육열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이런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내버려 둔다면 민족의 미래는 없을 뿐 아니라 국가의 동력인 교육열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교육은 목적과 더불어 과정도 소중히 여기는 법입니다. ‘몇점 받았느냐’라는 결과보다 ‘어떻게 공부했느냐’는 과정을 주목하는 교사가 학생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공부만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일에 있어서도 상식입니다. 목적 자체를 중시하면 희망을 생산하는 사회가 아니라 절망을 생산하는 사회가 되고, 기쁨을 확산하는 사회가 아니라 고통을 확산하는 사회가 되고 만다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의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아줌마’들의 교육열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달려가는 것은 심히 염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고, 어떻게 해서든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교육에 있어서 절대 진리인 것처럼 인식되면서 전염병처럼 온 땅을 뒤덮고 있습니다. 목적은 과정에 종속됩니다. 정치인들이 민족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살아온 정치이력에 종속되어 있음을 우리는 이미 보아 알고 있습니다. 경제인이든 법률가든 교육자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희망을 심어주어야할 지도자들이 그렇지 못한 것은 그들이 교육되어온 과정에 문제의 뿌리가 있고 그들을 이끌어준 잘못된 ‘교육열’에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교육열을 성경말씀에 비추어 살펴 바로잡아야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깊은 산길에서 만난 낭떠러지처럼 우리의 교육열이 어느날 갑자기 꺼져버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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