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 기독교에 대한 <보수>냐 <대체>냐 <해체>냐

들어가며

   
1990년대 이후로 본격적인 다양한 시민사회가 형성되면서 종교 진영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사실 90년대 후반만 해도 종교비평이라는 용어는 내 기억 상에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렇기에 종교인 단체가 아닌 일반 시민사회단체가 결성되어 기독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도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동시에 기독교와 관련해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안티 기독교>Anti-Christianity의 폭발적인 증대 현상이다. 초창기에 안티 기독교 사이트는 여기저기서 생겨났었다. 그러다가 2002년경에 여기저기 산재해 있던 군소 안티 기독교 그룹들을 현재의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하 ‘반기련’, www.antichrist.or.kr)으로서 통합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안티 기독교 진영 안에서도 조금 노선과 내부 갈등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대체로는 반기련이 안티 기독교 진영을 대표하는 단체로서는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나 자신은 안티 기독교의 성장은 일단 기존 기독교의 폐해와 오류로부터 나온 점이 크다고 생각되기에 기독교인이라면 이를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책임성 있게 응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독교는 너무나 예수정신과도 동떨어져 있을 만큼 많은 점들이 변질되어 있는 현실이다. 나는 안티 기독교의 기독교박멸 입장에는 동의하진 않지만 적어도 기존 기독교를 꼬집고 비판하는 주장들에 대해서만큼은 상당부분 공감을 하고 있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나 자신은 진보의 입장이지만 기존의 진보와도 다소 다른 쪽에 있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새로운 대안 기독교 쪽의 입장이다. <대안 기독교>란 기존 기독교와는 또 다른 안으로서 제안된 기독교이다. 이런 점에서 안티 기독교인들이 볼 때는 보수나 진보나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닌가 하겠지만, 일단 이 지점은 정확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새로운 대안 기독교의 입장은 기존 기독교를 대체하려는 입장인데, 안티 기독교와 달리 예수 자체를 반대하진 않기에 오히려 충분히 신앙의 전거로 삼을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는 기존 기독교 전반을 다시 해체하고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것이 바로 <대체>의 입장이다.1) 예수나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니컬한 입장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안티 기독교인들의 얘기처럼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봐야 할 기독교 진영은 근래 많이 대두되기도 하는 <개혁적 복음주의> 진영이 아닐까 싶다. 소위 말하는 개혁적 복음주의 입장이야말로 나는 기존의 보수 근본주의 색조가 좀 더 약화된, 세련된 형태의 기독교 보수 세력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이들은 나름대로 개혁성을 띤다고는 하지만 우습게도 결정적으로는 여전히 기존 기독교의 정통 교리 자체만큼은 여전히 잘 문제 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안 기독교의 입장은 오류와 병폐와 비극을 유발시키는 한에 있어선, 기존 기독교가 금과옥조처럼 떠받들어 온 전통 교리조차도 충분히 문제 삼을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제 얘기를 풀어 나가보고자 한다.


내가 경험했던 안티 기독교

아주 오래 전이지만 나 자신은 우연히 안티 기독교인을 처음으로 접했었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기억상으로는 현재의 반기련 통합 이전인 듯― 우연히 안티 기독교 사이트의 글을 발견하고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내용들은 대체로 기존 기독교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성경을 통해 온갖 날조와 허구를 가르치고 있고, 십일조의 명목으로 돈을 모아서 교회당을 크게 짓고 자기 배만 불리고 있기 때문에, 이제 기독교는 몽땅 망해야 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사람들의 접속수도 매우 높았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안타까움이 있어서인지 나는 약간의 답변을 남겼다. 즉, 기존의 보수 기독교의 그러한 폐해들이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소수의 건강한 진보 기독교의 흐름들도 있으니 기독교에 대해 좀더 깊게 공부를 하실 필요도 있다고 얘기하자, 당시 그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많은 글을 쓰고 또 이를 만든 운영자이기도 했던 그 안티 기독교인은 나의 그러한 코멘트에 대해 매우 인상적인 첫 답변을 주었다. 날더러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열린 종교관을 가지고 있고 성서비평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한 나름대로 이 땅에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위해 사회운동에도 힘쓰는 진보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도 좀더 상세하게 소개를 하니까, 그게 무슨 기독교냐고 반문하면서 그런 기독교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믿으려 하지 않는 반응을 보였었다. 물론 그럴 만도 한 게 그러한 진보 진영은 소수이기도 하니까.


재밌게도 나의 그 글은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는 해우소 같은 곳으로 보내어졌고, 자유게시판은 나 같은 사람이 더 이상 못 들어 오도록 아이피를 막아놓았었다. 그리고서 여전히 또 일방적으로 남겨놓은 얘기는, 기독교는 무조건 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이를 <기독교 박멸론>이라고 부른다. 마치 바퀴벌레 박멸을 떠올리듯 말이다.

 

안티 기독교의 발생과 형성은 기존 기독교의 폐해가 가장 큰 원인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이 안티 기독교로 돌아선 이유에 대해서도 살짝 얘기를 했었는데, 결정적인 것은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기독교에 빠져서 종교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안티 기독교인은 교회를 계속 다니다가 어느 날 목사에게 성경에 의문이 있어서 질문을 했는데 그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서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도 대부분의 안티 기독교인들은 직간접적으로 기존의 보수 기독교의 폐해를 경험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우리는 안티 기독교의 발생이 기존 기독교와 아무 상관없이 그냥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는 사실부터 분명하게 인지할 필요가 있다. 즉, 안티 기독교의 발생은 기존 기독교의 끔찍한 폐해들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안티 기독교의 기존 기독교 비판 형태는 크게는 두 가지로 나뉜다. 기존 기독교에 대한 <사상비판>과 <행태비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사상비판은 교리비판과 바이블비판으로 또 둘로 나뉜다.


안티 기독교인들이 성토하는 내용들은 크게 보면, 주로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독선적인 배타성 및 ‘무조건 믿어라’고 말하는 강압적인 신앙으로 인한 폐해들, 바이블의 앞뒤 안맞는 내용들, 목사들의 재산 축적과 불륜 행태들, 거대 교회에 대한 비난 등등 이러한 것들이 거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때 기독교 비난의 근거로 삼는 내용들 대부분은 대체로 보수 기독교에 한정된다. 기존 기독교에 대한 안티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반감>과 <증오>가 아주 강하다. 이들은 기독교인을 부르는 명칭부터 <개독교인>이라고 부르고, 목사를 <먹사>라고 종종 부른다.


안티 기독교의 주장들을 알아두고서 그에 대한 정직한 답변도 마련되어야

그래서인지 안티 기독교인들은 기존 기독교의 사회적 행태에 대해선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꼬집어내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면, 목사가 불륜을 저지르는 사건이 터지면, 그에 대한 기사거리 뿐만 아니라 자료 사진과 풍자 그림들이 온갖 동원된다. ‘에어장 사건’은 오랫동안 이들에게 안주거리이기도 했었다. 이들은 일상적 삶 속에서 발견되는 기독교인들의 행태도 곧잘 꼬집어 낸다.


때로는 그 관찰력이 아주 탁월한 느낌마저 들 때도 있다. 나는 건강한 기독교인이라면 안티 기독교 사이트도 충분히 가볼만 하고 이들의 주장과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들이 기존 기독교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매우 예리하게 꼬집어내고 발견해내는 지점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안티 기독교의 주장들을 모두 동의하진 않지만, 적어도 안티 기독교의 입장에서 기존의 주류 기독교를 비꼬며 풍자하는 측면들도 알아둠이 좋다는 얘기다. 사실 그들의 영혼들 역시 상처받은 영혼들이긴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안티 기독교의 존재의 의의와 한계

그렇기 때문에 안티 기독교는 기존 기독교의 폐해를 경험한 자들에겐 그 사이트를 접할 경우, 희열을 느낄 만큼 매우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그 매력을 느끼는 데에는 시간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기존 기독교를 까발리는 행태들은 마치 그동안 억누르고 금지되었던 욕구들을 마음껏 발산시키는 해방구 노릇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티 기독교의 한계는 바로 그것이 현재로선 존재의의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즉, 안티 기독교는 기존 기독교의 폐해로 인해 발생하였지만, 기존 기독교가 “무조건 믿어라”의 폭력성을 지니고 있었다면, 안티 기독교는 “기독교는 무조건 망해라”는 신념이 무차별적으로 전제되고 신봉된다는 점에서, 적어도 그 폭력성만큼은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사례들은 아주 많다.


예컨대, 순진한 기독교인 한 명이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들어와서 “샬롬~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저는 당신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길 바라며, 지옥에 가지 않길 기도합니다”라는 정말로 순진한 메시지를 남겼다면, 이는 안티 기독교인들의 집단 먹잇감이 되기엔 딱 안성맞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는 다짜고짜 반말부터 깔고 나가는 모습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게다가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서 순진한 기독교인 한 명에게 뭇매를 가할 때 그나마 동원되는 비난의 근거들은 대체로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행태에 대한 지적들 외에도 <바이블>(안티 기독교인들은 '성경'이나 '성서'라는 단어를 안 쓰고, ‘바이블’ 혹은 ‘똥경’이라는 표현을 잘 쓰는 것도 특기할만한 사항)에서 찾았다는 이상한 말들 이를테면 바이블의 오류와 모순,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황당한 얘기, 반인륜적인 얘기 등등 이런 것들에 기인한다.


기존 기독교가 <기독교 절대주의>라는 도그마를 가졌다면, 안티 기독교 역시 <기독교 박멸주의>라는 절대 교리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둘은 결국 평행선이요 폭력적 대결이 되기 십상이라고 하겠다. 어찌되었든 기독교 자체를 이미 <사회악>으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들의 정체성과 한계는 <안티 기독교>라는 그 명칭에서부터 더 없이 잘 드러난다. 안티라는 것은 결국 ‘반대’라는 의미인데, 그 어떤 사안에 대한 반대 자체가 이미 그 단체 이념의 정체성으로서 자리매김되어 있다. 그렇기에 생각해보라. ‘A’와 ‘not A’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설득의 여지자체가 이미 시작에서부터 봉쇄되어 있는 상태에서의 공존인 것이다.


어떤 방에 애초부터 ‘개를 좋아하는 사람’과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 같이 산다고 생각해보자. 그럴 경우 여기에 무슨 대화의 접점이 있을까? 안티 기독교인들도 이성적 설득을 얘기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기독교의 폐해를 받은 만큼 똑같이 기독교들에게도 되돌려주겠다는 식으로 그렇게 취급하는 성향이 강하다.


예컨대, “기독교는 예수를 안믿으면 지옥 간다고 협박하는데, 만일 우리가 너희들에게 단군 혹은 부처를 무조건 믿어야 지옥에 안갈 수 있다고 협박하거나 강요한다면, 기독교인들 너네들은 기분이 어때?”라는 식인 것이다.


안티 기독교가 진보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

안티 기독교 사이트를 가보면 알겠지만, 이들이 비판하는 주 대상들은 기존 기독교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에 대한 것들이지 그 이상의 깊이로 좀처럼 나아가진 않는다. 예컨대 진보적인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만큼은 대체로 비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들 안티 기독교인들은 진보 기독교(안티 기독교인들은 이들을 기독교 개혁파로 이해)에 대해서도 별로 좋아하질 않는다. 어떤 안티 기독교인은 개혁적인 진보 기독교는 보수 기독교보다 훨씬 더 얄밉고 더 암적인 존재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망해야 하는데, 그나마 망하지 않도록 여전히 건재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반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진보 기독교는 기독교가 망하지 않게끔 하는 숙주 노릇과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진보 기독교라고 하더라도 자기 경제적 밥줄 때문에 솔직하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그러한 점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 이들은 이미 진보라고도 볼 수 없다고 여겨진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보 기독교란 적어도 솔직하고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한 기독교를 말한다.


예전에 본인이 안티 기독교인과 논쟁을 하는 와중에 어떤 분이 댓글로서 안티 기독교의 진보 이해를 말끔하게 정리해놓은 글이 있어서 옮겨본다.

<토론을 보며 정리한 안티들이 진보기독교를 보는 시각>

1. 진보기독교는 보수기독교보다 더 위험한 놈들이다

2. 진보기독교는 보수기독교를 더 공고히 해주는 놈들이다

3. 진보기독교도 세력이 커지면 보수기독교처럼 똑같이 된다.

4. 진보기독교 세력은 보수기독교 세력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언제 주        류가 될려나?)

5. 진보기독교는 성서 안보고 불경 보나?

6. 진보기독교는 예수 안믿고 석가 믿냐?

7. 진보기독교는 야훼 안믿냐?

8. 보수기독교가 지금 저렇게 날뛰는데 진보기독교는 뭐 하고 있나?

등등 이런 생각을 깊이 깔고 토론에 임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안티 기독교인은 진보기독교를 기존 기독교를 공고하게 해주거나 보수 기독교의 그늘로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참으로 이것은 단선적인 이해가 아닐 수 없는데, 한편으로는 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맥락도 이해가능하다. 왜냐하면 <기독교 반대>의 입장에선 그 어떤 기독교도 긍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닌 말로 안티들이게 기독교는 결코 긍정되어선 안되는 대상인 것이다.


만일 <안티 기독교>라고 자부하는 이가 기독교에 대한 긍정성도 표명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입장에 반하는 개념 없는 짓이거나 자기 안의 모순된 혼재를 가질 뿐이다. 안티 기독교 자체가 이미 기독교에 대한 부정성 표방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안티 기독교인들이 ‘진보는 예수 안믿고 석가 믿나?’ 하는 식의 발상도 하는 걸 보면, 진보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교다원론 사상에도 이미 여러 가지 다양한 분류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지도 궁금하다. 여기에는 얼마든지 열린 중심주의 노선도 있기 때문이다.2)


어쨌든 적어도 안티 기독교인에게만큼은 기독교는 망해야만 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대상이다. 안티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는 무조건 망해야 한다>는 명제는 이미 시작부터 요구되는 필연적 당위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이 진보 기독교를 단선적이고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맥락도 다음에서 엿볼 수 있다.


기존 기독교에서 보수와 진보에 대한 분류

 

보수

진보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 여부

‘무조건 믿어라’는 전제가 있다.

‘무조건 믿어라’는 전제가 있다.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가 없다.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 내용

(이는 범주적 한계를 의미)

성서무오설

예수의 유일회성

동정녀 탄생

예수의 피 대속설

부활 승천 재림 삼위일체 등등

전통 교리들

민중해방 or 생명평화 전통
(진보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이것을 당위로서 여기는 사람들이 꽤 있다)

진리는 없다.

온갖 오류들과 권력(힘)만 있다.

진리는 있지만

우리에겐 없다.

그 진리는 우리들의 오류와 비극을 통해서만 근접해나갈 수 있을 뿐이다.

나타나는

행태

전통교리는 무조건 믿어야 하며, 성경을 읽어도 여기서 벗어나면 안된다고 말한다.

(전통 교리를 포함, 사도신경, 사영리 등등은 많은 성경공부 교재의 전제들로 자리함)

민중해방 전통을 가장 중요시하기에, 타자를 위한 사회 변혁이 시작부터 강요될 수 있다.

(나 자신은 이것도 당위로 보면 곤란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진리는 없다고 보기에 회의주의 혹은 상대주의에 곧잘 빠진다.

(후기구조주의와 친화적이기에

가장 냉소적인 집단에 속한다.)

자기해체에까지도 열려 있으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창조적 구성 모색

(진리 탐구 과정 자체에서 얻는

합리주의적 성취를 중요시)

해당 진영

기존의 주류

보수 기독교 대부분

기존 민중신학 혹은 이와 비슷한 에큐메니칼의

진보 진영

3세대 민중신학

혹은 교회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탈중심주의자들

정강길의 

새로운 민중신학

혹은

과정신학

보수와 비교화하여 진보 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분류는 대체로 아래와 같이 분류될 수 있다.

진보 안에서도 이렇게 사상적으로도 다른 차이를 가지는 구분들이 있건만, 애석하게도 안티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를 볼 줄 아는 눈이 전혀 없어 보인다. 안티기독인들에게 진보란 보수의 살짝 탈바꿈이거나 보수의 그늘에 있는 자들로만 파악될 뿐이다.


진보 진영의 경우에도 그 편차들을 좀 더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점도 있지만, 적어도 <기존의 보수 기독교가 아닌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기독교>를 추구하는 흐름들도 있기에 기존 기독교의 해체를 촉구하는 점도 없잖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티 기독교에는 바로 이러한 맥락들을 간과하고 있는 점도 없잖아 있다. 앞서 보았듯이, 안티 기독교인들에게는 진보 기독교가 얄미울 수밖에 없으며 어떻든지 상대하기 손쉬운 보수 기독교를 상대로 해야 그 존재의의를 가질 수 있다. 이들이 비판하는 바이블 내용들이나,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 하는 것들은 현대 학문의 축적된 성과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진보 기독교인들에겐 전혀 별문제꺼리도 안되는 내용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마치 전체 기독교가 몽땅 다 박멸되어야 한다고 부르짖기에 진보측 기독교인들로선 조금 시큰둥하게 나올 수밖에. 실제로도 내가 알았던 주변의 안티 기독교인들도 진보측 기독교에 대해선 매우 상세하게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여전히 “개독교 박멸되는 그날 진실로 하늘이 열리리라!”는 외침은 곧잘 해대는 것이다.


안티 기독교와 반기련에 대한 몇 가지 의문들

예전에 어떤 안티분께서 필자에게 자신도 안티 기독교인이라면서도 반기련 진영과는 다른 쪽에 있다고 얘기한 바 있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들도 충분히 인지하지만, 나 자신이 반기련을 든 것은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반기련이 안티 기독교계에선 가장 많이 인지되고 가장 많이 활발한 활동을 하는 안티 기독교계의 주류 실세라고 보았기에 거론한 것뿐이다. 어쨌든 기독교 자체에 대해 반대한다는 점에선 서로 공통되고 있잖은가.


어떤 안티들 가운데는 안티 기독교가 왜 <기독교박멸론>이냐 라고 따져 묻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앞의 얘기와도 연관되는데, 이들 얘기에 따르면 반기련측은 <기독교박멸론>을 외칠는지는 몰라도 그외 안티 기독교는 결코 기독교박멸주의로 매도될 순 없다고 주장한다. 그저 안티 기독교는 <기독교 싫다>는 점만 공통으로 할 뿐이지, 그 외에는 다른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로선 그 외의 다른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기독교 반대와 비난을 반말과 욕설로 전하느냐 아니면 점잖게 타이르느냐 정도? 하지만 이것은 그저 자기주장을 전하는 전달방식의 차이이지 안티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사상적 정체성에 따른 차이가 아니다.


나는 이미 <반기독교>라는 그 사유자체가 지닌 폭력성에 대해 얘기하는 거다. 그래서 본인은 저들에게 그렇다면 기독교박멸론 외에는 도대체 기독교에 대해서 어떤 입장이 또 있냐고 물으니까, 궁색하게도 그저 열려있을 뿐이라거나 정리되진 않았지만 형성중이라거나 다양할 뿐이라고만 얘기한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내게 있어서 여전히 개념정리가 되지 않은 자들의 무뇌아적 발언일 뿐이다. 자기가 뭘 얘길 하고 있는지 조차도 철저히 파악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안티분들은 내게 말하길 자신은 기독교가 정화되길 바라는 안티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얘기조차도 ‘안티 기독교’라는 개념과 그 지시된 맥락이 서로 핀트가 어긋난 차원일 따름이다. 사실 기독교 정화를 바란다면 나 역시 기독교 안티에 들어갈 것이다. 본인 역시 기독교 정화를 바라잖은가.

그리고 박멸의 대상이 정확히 기독교의 기독교인인지 기독교사상(전통 교리, 성서)인지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인 얘기와 합의가 안티 기독교 안에서도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내 생각에는 안티 기독교에 대한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반기련측과 그 외의 군소 안티집단들 간에도 서로 내분 갈등이 있는데, 이것은 그 어떤 사상적 차이에 따른 갈등이라기보다 다분히 감정적인 헤게모니 다툼의 차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안티 기독교는 기존의 보수 기독교와 적대적 공생관계

우리 사회에 안티 기독교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기존 기독교에겐 또 다른 기회일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안티 기독교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성찰하고 이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저들이 왜 그토록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엔 기존의 보수 기독교가 안티 기독교를 뭐라고 탓하기는 참으로 힘들다고 본다. 왜냐하면 기존 기독교가 제대로 똑바로 처신하고 있다면, 더 이상 안티 기독교가 지지받기도 힘들 뿐더러 그렇게 나오기도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만일 기존 기독교인들이 무지와 배타성과 사회적인 부덕의 행태를 보이면 보일수록 오히려 안티 기독교인들은 더욱 기뻐 날뛰며 좋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안티 기독교는 기존 기독교와 <적대적 공생관계>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해서 안티 기독교는 기존 기독교가 낳은 또 다른 괴물인 것이다. 아마도 ‘괴물’이라는 이 표현을 두고 안티 기독교 당사자들은 기분 나빠할 진 모르나, 그 의미는 기존 기독교의 배타적 폭력성을 똑같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 박멸주의’ 혹은 ‘기독교 반대’가 자신들의 근본 신념으로서 깔려 있는 한, 거기에 새롭고 건강한 대안 기독교를 말할 자리란 근본적으로는 봉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안티 기독교 운동을 하다가 새로운 대안 기독교를 모색한다고 할 경우, 그것은 안티 기독교에 대한 변절로 취급받을 수 있다. 저들에게 기독교란 그저 안 봐도 뻔한 집단일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저들이 아는 기독교의 세계란 너무나 짧기 그지없다. 물론 워낙 한국 기독교의 대부분이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로 지배되어 있는 현실이니 그 부분도 충분히 짐작할 만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안티 기독교가 이제 자신들의 존재 의미나 한계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안티 기독교의 존재의의를 기존의 보수 기독교에 대한 반박과 반감 및 이를 통한 카타르시스 제공에 그 존재의의를 둔다면 나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럴 경우 안티 기독교로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만 부여잡은 채 그저 감정의 배설만 뱉어낼 따름일 뿐이며, 그들의 논리가 전체 기독교를 설득하기엔 여전히 미흡할 뿐이라는 사실도 함께 직시되어야 할 것이다.


나오며 :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형성이야말로 안티 기독교에 대한 진정한 대응

분명히 말하지만, <대체>는 기존에 대한 <해체>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대안 기독교는 안티 기독교와 함께 하는 점도 있다. 하지만 해체만 있지 않고 예수정신만큼은 긍정하기에 이를 통한 대안기독교의 가능성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티 기독교와 다르게 갈라진다. 지금까지 주류 보수 기독교가 많은 오류와 비극들을 저질러왔었어도 그 안에서조차도 알게 모르게 우리가 존경할만한 기독 인사들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잖은가. 사실 KBS 인물 한국현대사에도 나왔었지만 함석헌, 김재준, 문익환, 허병섭 같은 분들은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에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 노동 운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분들이기도 하다. 이들 외에도 농촌교회나 민중교회를 하시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목사님들이나 혹은 그 밖에 소외되고 고통 받는 우리네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기독교인들 역시 알게 모르게 많이 있으며, 이분들은 모두 예수정신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다들 고백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안티 기독교의 이러한 비판이 아예 틀렸다고만 보질 않는다. 보수 기독교의 폐해에 대해 나 역시 동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들이 <기독교>라고 표현하고, 기독교에 대한 그 어떤 긍정적 가능성도 배제하는 <안티 기독교>를 표방하는 한에선 분명하게 반대한다. 만일 저들이 <안티 기독교>가 아닌 <안티 보수기독교>라고 바꿨으면 몰라도. 이미 저들의 비판에선 보수 기독교 외의 다른 기독교에 대해선 잘 모르면서도 도매금으로 넘어가 있을 따름이며, 진보적인 대안 기독교의 깊은 이해에 대해선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을 뿐이다. 내게 있어 그 부분에 대해 폭력적이냐 이성적이냐의 구분은 명확하다. 내가 폭력적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반기독교>라는 테제에는 기독교 자체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이 일찍부터 아예 포기되고 철저히 기독교 부정이라는 한 쪽 입장만 지니게 되는 엄연한 폐쇄성이 있기에 하는 얘기인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 어느 한 쪽만 고정적으로 못 박는 것 자체에 대해서 나는 폭력적이라고 본 것이다. 내가 보는 기독교에는 긍정항/부정항 모두가 있다. 여기서 나의 <새로운 기독교>는 다음과 같다. 부정항으로서의 기독교를 해체하여, 긍정항을 가지고서 다시 새롭게 기독교를 수립하겠다는 것이다.


<대안 기독교>란 표현은 '또 다른 제안으로서의 기독교'를 의미한다. 만에 하나 나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조차도 <오류>와 <비극>을 보일 경우 얼마든지 해체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 한에서 솔직한 합리성에 기반하고자 하는 기독교인 것이다. 나 자신이 추구하는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에 대한 모색은 다음과 같다.


기존 기독교새로운 대안 기독교

※ 관념적 이원론 → 현실적 관계론 (해석학적 렌즈)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 → 깨달음의 기독교

② 문자적 성서해석 → 사건적 성서해석

③ 초월적 유신론 → 포월적 유신론

④ 교리적 예수 → 역사적 예수

⑤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 → 이웃종교와 함께 가는 기독교

⑥ 가부장적 기독교 → 상호평등의 기독교

⑦ 숭배하는 예배 → 닮으려는 예배

⑧ 서구식 목회문화 → 우리식 목회문화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 → 수평적 구조의 교회

⑩ 죄의식의 종교 →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

⑪ 영혼 구원의 기독교 → 삶의 구원의 기독교

⑫ 내세 강조의 기독교 → 지금 여기서부터의 하나님 나라 기독교

♣ 새로운 대안 기독교로 전환되는 흐름들



기독교가 우리네 삶 속에서 사회 속에서 제대로 건강한 모습이라도 보여주기만 해봐라. 안티가 생길 이유가 뭐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오늘 이 시대에 기존 기독교를 변혁하려는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운동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종교운동이자 사회운동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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