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주 목사 /푸른숲교회

한국교회는 칼빈을 추종하는 성도들이 많다. 그래서 영국의 청교도를 같은 신앙의 류로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청교도(Puritan)라는 말 자체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유별란 부류”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청교도는 영국에서 완전한 종교개혁이 이뤄지기를 소망했기 때문에 조그만 잘못에도 시비를 거는 등 여러 왕이나 국교도들과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존 밀턴도 청교도를 “종교개혁을 개혁하는 이들”이라고 하였는데, 청교도의 출발은 존 낙스가 제네바에서 칼빈의 종교 개혁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완벽한 모델을 경험하고 고국 영국으로 돌아와 영국에서도 카돌릭과는 완전히 다른, 온전히 성경에만 근거한 개혁을 완성하고자 하였다. 이에 동조하는 개혁가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 청교도의 출발이었다.

사실 헨리 8세나 그의 후계자들이 추진한 종교개혁은 어중간했다. 일례로 성공회 목사들은 여전히 사제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고 사제복을 벗지 않았다. 성찬식 때도 카돌릭과 같이 무릎을 꿇고 떡과 포도즙을 받는 관습을 지속했다. 엘리자베스 여왕(1558-1603)은 종교개혁을 천명했지만 본인은 ‘새로운 신앙방식’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반면에 청교도들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모든 구습들은 개혁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여왕과 성공회 지도자들은 이런 청교도들의 행동이 자신들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시도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녀의 남은 임기 마지막 10년간 청교도들을 엄청난 핍박을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그녀의 조카이자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1603-1625)가 후계자가 되었다. 존 낙스의 장로교 신학과 제도 아래 성장한 제임스 1세는 청교도의 희망에 부응하여 1611년 KJV 성경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임스 1세도 역시 청교도들을 왕권 도전 세력으로 간주해 다른 왕들에 비해 더 심하게 핍박했다.

이 학정을 견디지 못한 일부 청교도들이 1607년 네델란드로 떠났고, 1620년에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했다. 이들은 미국에서 온전한 청교도운동을 일으키는 개척자가 되었다. 제임스 1세가 죽고 그의 말을 더듬는 아들 찰스 1세(1625-1649)가 왕이 되었다. 찰스는 프랑스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일 때 카돌릭 주교들과 함께 영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 등 공공연하게 카돌릭으로 회귀하려 했고, 자기 야심에 따라 켄터베리 대주교에 윌리엄 로드를 앉혔고, 잉글랜드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자 했다. 이 시기에 청교도들은 엄청난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런 찰스 1세의 학정에 굴하지 않고 영국 전역에서 찰스를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찰스는 반대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아일랜드의 군대까지 끌어들였다. 영국 전체가 심각한 내전상태로 치닫게 되었다. 이는 곧 영국이 카돌릭화 하느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것이었다.

이 때 탁월한 장군이자 신실한 청교도인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왕의 군대를 격파했다. 윌리엄 로드와 찰스 1세를 처형했다. 영국은 잠시 동안 호국경으로 임명된 크롬웰에 의해 통치되었다.

청교도들이 힘을 얻자 영국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자신들이 이루고자 했던 꿈을 완성시킬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이 때 성공회를 대체하고 새로운 교회 체계를 세우기 위해 100명이 넘는 청교도 신학자들이 1643-49년 까지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였다. 여기서 도출된 신앙선언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이었다. 예배지침도 공포했다.

청교도들은 칼빈의 가르침으로 제네바가 다스려진 것처럼 자신들의 신앙고백서와 예배지침을 통해 전 영국을 변화시키려했다. 온 국민에게 엄격한 생활을 요구하는 법률을 만들어 주일성수와 미신 타파 등을 강요했다. 심지어는 성탄절도 성경에 없는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극장은 문을 닫아야 했고 술집과 도박, 닭싸움 등의 오락도 당연히 처벌대상이었다.

그러나 청교도의 새로운 시도는 크롬웰의 죽음과 함께 약화되었다. 크롬웰이 사망하자 군중은 다시 왕을 요구했고 결과 프랑스로 망명했던 찰스 2세가 왕위를 물러받았다. 새로운 왕은 민심을 얻기 위해 그동안 금지했던 조치들을 해제시켰을 뿐 아니라 청교도들에 의해 사라졌던 모든 것들을 교회 안에 돌려놓았다. 더 나아가 청교도를 탄압하여 성직자들을 끌어내렸다. 청교도들에게는 교육의 기회마저 제공하지 않았다. 그 결과 청교도는 역사의 무대에서 점차 사라졌고 1700년대에는 영국에서 더 이상 청교도를 언급하지 않았다.

청교도가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유산을 물러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청교도들이 주어진 기회를 살리지 못한 채 영국민들에게 배척을 받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청교도 내의 분열이다. 크롬웰이 호국경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때 청교도 내에서는 끊임없이 분쟁과 다툼이 일어났다. 장로교파, 독립파, 퀘이커파, 개간파(Diggers), 평등파(Levellers) 등 여러 파당으로 나뉘어 개혁을 위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분오열 되어 싸우므로 청교도는 국민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한국 교회가 귀히 새겨야 할 실패의 요인이다.

또 하나의 요인은 로이드 존수 목사의 언급처럼, 종교의 혼합을 통해 이상을 펼치려는 생각의 위험성이다. 청교도들은 국가를 다스릴 힘으로 법을 제정해 그 힘으로 국민의 신앙과 삶을 개혁하려 했다. 그러나 율법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듯이 법률조항이 사람들의 근본을 바꿀 수는 없었다. 진정한 개혁은 정치적 권력이나 법률이 아니라 오직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100여년 후 조지 윗필드와 웨슬리 형제 등이 일으킨 대각성 운동을 통해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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