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길 목사, 북핵보다 더 위험한 것은 공동선에 대한 위협이다

이병길 목사

대통령 탄핵과 특검 정국이라는 엄중한 국가적 상황에서 대통령과 최순실 씨를 패러디한 ‘더러운 잠’이 논란이 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현직 국회의원 표창원 씨가 그 한가운데 서 있단다. 일부에서는 국회사무처는 ‘무엇 하는 데냐?’라는 볼멘소리까지 들린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는 일부 대학 교수들은 민주사회에서 그런 정도의 패러디를 가지고 문제 삼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하니, 그렇다면 ‘어느 정도가 자랑스러운가?’라고 묻고 싶다. 태평양 건너편에는 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느 날 밤사이,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클리블랜드, 시애틀, 그리고 뉴욕시 거리에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전신 나체 조형물이 나타났다. 분홍색 손톱에 프리메이슨 링을 착용한 조형물은 남성 상징을 유독 앙증맞게 표현했다. 젊은 여성들은 그 조형물 옆에서 요염한 자태를 스스럼없이 뽐내기까지 했다. 그것까지 이해를 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왜 사람들은 ‘벗기를 좋아하고,’ 특히 제 자신이 아닌 남의 치부를 ‘벗기기를 좋아할까?’ 흉기로 무참하게 사람을 죽이는 인간의 야수성은 예술이라는 도구로도 충분히 사람을 죽게 하는 잔인성을 보일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무죄 상태가 아닌 이상, 창조주가 가려 주신 것(창3:21; cf.vv.25,7)을 그대로 덮어두는 것이 창조적 아름다움이거늘 굳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려는 속셈은 타락한 본능의 발로가 아닐까? 창조주가 가려놓은 숨은 아름다움의 비밀의 미(美)는 그대로 두는 것이 정상일 듯싶다.

비밀의 미를 타락의 미로 작품화한 시대가 바로 유럽 문명사에 정신운동이자 이성의 꽃으로 표현되는 ‘르네상스’ 시대일 듯싶다.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조네(1478-1510)가 미완성으로 남긴 풍만한 여성의 관능미(官能美)를 표현한 ‘잠자는 비너스’(The Sleeping Venus, 1510)의 작품이 이탈리아 태생 티치아노 베첼리오(1488-1576)에 의해 완성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의 일이다. 현재 ‘르네상스의 도시’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한 여성 나체 ‘우르비노의 비너스’(The Venus of Urvino, 1538)가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1840-1902)에게 ‘걸작’으로 극찬된 것은 예술적 소양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하자.

이 그림이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에두아루 마네(1832-1887)의 손에서 다시 ‘올랭피아’로 다듬어지고, 대한민국에서 ‘더러운 잠’으로 합성 되어 우리 국회의사당에서 선을 보였다. 이 ‘더러운 잠’ 앞에서 국회의원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림은 처음부터 논란이 되었다니 그 논란의 역사가 결코 짧지만은 않다고 생각된다.

르네상스가 긍정적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는 없다. 당대는 종교적으로 로마 천주교가 중세 전 기간 중 부패의 정점에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이른바 역사가들이 미화한 이성을 존중하는 ‘문예부흥’ 시대다. 당시 이탈리아의 피렌체 공화국은 권력과 부(富)가 예술의 순수성을 짓밟고 인간의 관능미(官能美)를 사실로 표현하는 도구로 삼았다. 피렌체 공화국의 부패의 극치를 상징한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과 돈이 빚는 타락과 극치는 바로 인간의 관능미를 극대화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종교 개혁가들이 르네상스 시대를 타락한 시대로 보는 이유인 것이다.

실제로 피렌체의 수도사 사보나롤라(1452-1498)는 르네상스 문화를 비판하면서 예술 작품들을 그 시대의 도덕적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이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1497년 2월7일, 사보나롤라를 지지한 피렌체 시민들은 저마다 관능적 예술 작품과 음란물, 나체 그림과 사치품들을 시뇨리아 광장으로 대거 옮겨놓고, 그곳에서 불태우기까지 했다. 역사는 이를 ‘허영심의 모닥불’(bonfire of the vanities)이라고 부르고 있다.

개혁자의 측면에서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는 그 시대의 타락을 상징하며, 사회적 부패의 극치를 표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서면 먼저 시청 앞에 설치된 미켈란젤로의 5.17미터의 대리석 모조품 나체조각 ‘다비드 상’(Michelangelo David Statue, 1501-1504)과 마주친다. 이 조각상 역시 남성의 상징을 돌출시켜놓았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이다. 창조주의 걸작 미를 가려두는 것보다 노출시켜 감상하는 것이 더 낫다는 변명이다.

자연과 피조물은 창조주의 창조적 미를 담고 있다. 어떤 미는 들어나서 아름다운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숨겨진 비밀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인간은 어차피 창조주의 비밀을 다 알 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 알 수도 없다.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공동선’(The Common Good)을 침해하거나 훼손할 때는 문제가 달라질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사상과 양심, 표현과 언론, 집회와 결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민주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정신적 자유권으로서 예술 창작활동의 영역을 포괄한다. 예술 작품은 지정된 예술 공간에 있어야 더 빛나게 보일 수 있다. 문제는 ‘더러운 잠’이 전시된 장소가 정치활동 무대인 입법 공간이라는 점에서 비판 시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예술적 표현이 정치화 할 때 그 예술은 순수성을 포기한 것이나 짐배 없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패러디 조형물이 미국 국회의사당이나 워싱턴 기념비 앞에 설치되었다면 미국의 언론이 다르게 평가했을 것이다.

만일 급진적 예술 사조로 지칭되는 아방가르드(Avant-garde) 예술가가 인간의 신체적 미(美)를 강조하기 위해 누드 행세로 광화문 광장을 활보한다면 시민들은 단순히 표현의 자유와 예술적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모르긴 해도 아직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열려있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은 공동선에 대한 가치 기준이 건강하다는 것일 수도 있다. ‘민주’와 ‘자유’라는 말로써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구차스러운 변명 삼아 대한민국의 공동선에 대한 다수의 건강한 인식을 제압하려고 하는 발상은 민주주의에 대한 모욕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배경과 인식을 가진 시민들이 함께 추구하는 공동선이 있다. 이 공동선은 민주적 절차와 합의에 의한 최소한의 법적 장치인 헌법과 이 땅에 뿌리를 두고 살아온 모든 사람들의 관습법적 문화에 의하여 유지된다. 헌법은 사회적 공동선과 개인이 누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며, 성문화 되지 않은 관습법은 헌법 보다 더 구체적인 효력을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공동선은 한 개인을 포함한 다양한 출신 성분을 가진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사회적 공익(公益, Public interest) 기준의 가치로서, 어떤 조직이나 한 사회가 건강하게 공존해 가는 원리이며 사회적 보편질서 유지를 위한 기준이며, 집단적 이기주의와 공동체 훼손에 우려되는 극단적 개인주의적 이기심을 방지하는 표준이기 하다. 공동선과 개인의 자유권 사이는 서로 상충되지 않게 하는 것이 ‘미덕’일 것이다.

미국 전 하버드대학교 정치 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eal J. Sandel, 1921-2002) 교수가 공동선을 ‘공동체의 미덕’이라고 한 말을 기억한다. 샌델 교수는 ‘정의’의 세 가지 기준에서 ‘행복’, ‘자유’, ‘미덕’을 들면서, 정의는 이 세 가지가 다 사회적 구성원에게 유익이 될 때 결정된다고 한 말에 공감이 간다. 사회적 공동선과 개인의 자유가 조화로운 균형 유지를 위해서는 사회적 배려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예술적 가치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개인주의가 발달한 사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개인주의와 미국의 공동선이 상충되는 일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미국의 잊힌 건국의 아버지’, 청교도 존 윈스롭(John Winthrop, 1588-1649)은 ‘자신의 창조주의 영광과 피조물의 공동선’(but for the glory of his creation and common good of the creation, man)을 위해 존경 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모든 개인은 공공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공이 무너지고 쇠락한 연후에는 어떤 개인도 보전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인의 사랑’(Christian Charities) 실천은 곧 공동선을 이루는 것임을 천명한 바 있다. 개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지만 사회적 공동선을 훼손하거나 무너지게 한다면, 과연 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을까?

미국 민주주의는 공동선과 개인의 자유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국익과 절제된 사회규범 시스템에 균형 유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미국의 공동선 우선주의는 청교도의 메이플라워서약(Mayflower Compact)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IN THE NAME OF GOD, AMEN.)으로 시작되는 메이플라워 서약은 ‘바람직한 질서 수립과 보존을 위하여’(for our better Ordering and Preservation), 그리고 ‘식민지의 일반적 복지를 위하여’(for the general Good of the Colony;)라는 목표는 결국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최소한의 법적 장치로 이해된다. 이 서약에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선이 미덕으로 조화를 보일 때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청교도가 상륙하여 세운 첫 도시 매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 해안가 앨러턴 거리(Allerton Street)에 세워진 25미터 높이의 국립선조념비(The National Monument to the Forefathers, Aug. 1, 1889)는 청교도들의 공동선을 형상화한 화강암 조형물이다. 이 조형물 맨 꼭대기에는 ‘믿음’의 발판을 밟고 왼손에 성경을 들고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형상이 있고, 그 아래로 도덕, 법률, 교육, 자유를 상징하는 부벽이 받치고 있다. 이 기념비가 상징하는 것은 미국의 역사가 공동선을 중심으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것임을 보여준다. 표현의 자유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 자유가 대한민국의 공동선을 훼손하거나 무너지게 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된다. 대한민국이 존립하기에 개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대한민국의 정황(政況)은 공동선이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표현의 자유가 대한민국의 공동선을 침해할 때 이것은 곧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며, 나라의 근간(根幹)을 뒤엎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민주당이 이전의 여러 가지 사안과는 달리 신속하게 표창원 씨를 윤리위에 제소한 것이나 모 대선 후보가 이 사안을 엄중하게 논평한 것은 그만큼 사안이 중대하다는 표징이라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공동선을 침해하는 개인의 자유는 그에 해당하는 엄중한 책임을 물어 대한민국의 공동선을 튼튼하게 세워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의 공동선의 위협은 북핵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Jan 3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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