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도르(condor)와 벌새(beebird)
서울시민 교회   최 한 주 목사


  사람이나 짐승은 무엇을 구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삶의 행태가 다르다. 똑같은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와도 그 배의 돛을 어떻게 달았느냐에 따라 배가 서쪽으로도 갈 수 있고 동쪽으로도 갈 수 있다. 그렇듯이 그가 추구하는 삶의 목적에 따라 나아가는 방향이 다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삶이 자신만의 것으로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에 영향을 끼치는 데 있다. 사람에게는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있고, 교회라는 영적인 공동체가 있다. 뿐 아니라 국가라는 공동체가 있다. 사람은 원하던 아니던 간에 이런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사는 삶의 행태가 그가 속한 공동체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

  미국 서부의 켈리포니아 주(州) 일대에는 ‘콘도르(condor)’라는 독수리 과에 속하는 새와 ‘벌새(beebird)’라는 작은 새가 같이 날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두 새가 다같이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빙빙 돌아다니는 데, 그러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쏜살같이 내리달아 먹이를 취하여 간다.
  그런데 같은 새이지만 찾는 먹이가 각각 다르다. 콘도르는 썩은 시체를 찾아다닌다. 그것이 그가 좋아하는 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막 위 높은 공중에서 빙빙 돌다가 썩은 짐승의 시체만 눈에 띄면 쏜살같이 내리달아 뜯어먹는다. 포식하게 되면 주위에 썩은 찌꺼기를 버려두고 전신에 더덕더덕 붙은 썩은 찌꺼기를 달고 날아간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또 썩은 고기를 찾아 헤멘다.
  그러나 벌새는 꽃을 찾는다. 꽃 속에 있는 꿀이 그의 먹이기 때문이다. 콘도르와 같이 공중에서 빙빙 돌다가 사막 가운데 핀 아름다운 꽃을 발견하면 내리달아 꿀을 따먹는다. 이 꽃 저 꽃으로 다니며 꿀을 따먹는 벌새의 이런 행위는 외로운 사막에 홀로 핀 꽃들에게 꽃가루를 묻어준다. 그러므로 다른 꽃에 수정을 시켜 꽃이 비록 시들더라도 또 다른 아름다운 꽃이 피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번식케 하여 사막을 아름답게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그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 콘도르와 벌새와 같다. 어떤 사람은 벌새와 같이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므로 삶 그 자체를 통하여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한다. 알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무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건설 현장에서 땀흘려 일하는 사람, 생업의 터전에서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 근무하는 직장이나 공직 사회 속에서 성실히 근무하는 사람, 교육의 현장이나 소식을 전하는 일을 맡아 최선을 다하는 사람, 숨은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성도 등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사회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유익하게 한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삶에 충실한 그것으로 자신 뿐 아니라 사회를 견실하게 세운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야 하고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일수록 아름답고 평안하다.
  교회와 교단 내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대부분 벌새와 같다. 대부분 주어진 사명에 충성하려 한다. 주어진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런 성도들이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내는 성실로 말미암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꽃이 수정되듯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생성하고 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이 사회와 공동체 속에는 콘도르와 같이 더럽고 썩어진 것을 추구한다. 기생하듯이 사는 많은 정치가들, 교육을 빌미로 썩은 것을 탐하는 무리들, 뿐 아니라 경제활동이라는 빌미로 다른 사람의 등을 쳐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렇지 않아야 하는데, 불행히도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은 콘도르와 같이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삶을 통하여 교회에서 교단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악취를 내어 고통을 준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부패케 하고 불안하게 한다.
  콘도르와 같은 삶의 형태로 사는 종교 지도자들이 많은 교단일수록 썩은 냄새가 더 많이 난다. 썩은 고기를 취하고는 잇빨 사이에 더덕더덕 끼인 썩은 것을 드러내고 웃는 모습은 어느 동물이 저런 추악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아름다운 벌새와 같이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은 왠지 점점 사라져 간다. 대신에 썩은 것을 구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져 간다. 특별히 교단 총회가 가까이 오면 왠지 서성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막을 빙빙 도는 콘도르의 모습이 연상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향하여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그리스도인들은 “혹 나의 삶이 콘도르와 같지 아니할까?”하며 자신의 삶을 검색해야 한다. 그러므로 벌새와 같이 주변을 아름답게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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