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반복적으로 받은 사람은 믿음이 생긴다.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사랑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많이 사랑받으면 믿음이 생긴다. 믿음이 생기면 들을 수 있다. 믿지 못하면 들을 수 없다. 어떤 여자를 의심한다. 그러면 뭘 마시라고 해도 독약 탄 것 아닌가 하며 의심한다. 자꾸 보험을 들면, 무슨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며 배후를 살펴본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고, 믿음이 없으면 들리지 않는다. 예수님은 중요 사역 때마다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너를 건져주겠다, 너를 보호해주겠다는 말일 것으로 상상한다. 그런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였다. 한 마디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의 기쁨이다”는 말이다. 위기의 순간에 주신 말씀은 사랑 확인, 믿음 확인이었다.

요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많이 다룬다. 제스처, 억양, 유머 등의 기법을 배워야 제대로 전달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커뮤니케이션은 사랑의 관계, 믿음의 관계다. 사랑하면 들린다. 믿으면 들린다. 사랑과 믿음은 얼마나 강력한지 죽음을 향해 나아가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것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게 한다. 돈벌고, 공부하고, 안주를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모두 죽음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려는 의도다. 그런데 결국 죽음의 함정에 빠져 죽음의 밥이 된다. 그러나 사랑을 느끼면, 죽음을 향해 간다. 희생의 자리로 간다. 십자가를 향해 간다. 바울은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울 수 있다”(고후 4:11)고 외친다.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원한다고 외친다(빌 3:10). 사랑을 느끼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희생이 힘들지 않다.

제니퍼 로페스의 ‘이너프’(enough)라는 영화가 있다. 식당 종업원인 로페스에게 어떤 멋진 남자가 꽃과 함께 데이트를 신청한다. 기쁜 마음으로 승낙하려는 순간, 뒤의 남자가 소리친다. “저 사람과 데이트하지 마세요. 지금 친구랑 내기 중이에요. 데이트 성공하면 200달러 받는다고 하는 것을 봤어요.” 로페스는 자기가 한낱 내기의 대상이 될 뻔한 상황에서 구해준 그 남자가 고마웠다. 그러다 결혼한다. 그런데 남편은 폭력을 쓰고, 바람 피우는 나쁜 사람이었다. 도망 중에 알게 된 것은 식당에서 꽃을 준 남자가 남편의 친구라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무슨 말인가. 식당에서의 일이 모두 조작이었던 것이다. 조작을 폭로한 자체가 조작었다는 말이다. 세상은 진짜 사랑이 없다. 진짜 믿음이 없다. 그래서 메마른 것이다.

내가 강해야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은 남자에게 줄 것이 없을 때 떠나고, 남자들은 여자에게서 얻을 것이 없을 때 떠난다”는 말이 있다. 과연 진정한 사랑도 그런가. 부모님의 사랑이 진하게 느껴질 때가 언제인가. 뭘 줄 때가 아니다. 좋은 것을 주고 싶지만, 없다. 그래서 안타까워할 때, 가장 진한 감동을 받는다. 자녀도 마찬가지다. 좋은 것을 주려고 하나, 줄 수 없어 안타까워할 때, 가장 진한 사랑을 느낀다. 주고 싶으나 주지 못하는 마음이 진한 사랑이다. 사랑은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잘하는 것이 아니다. 가슴이 있으면 된다. 안타까워하면 된다. 사랑만이 치유케 한다. 사랑은 믿게 한다. 사랑은 들리게 한다. 그래서 사랑하면 아무 것 없어도 행복하다.

<삼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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